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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건설노동자 이씨가 말하는 파업 이야기



일제 강점기 하에서부터 노동자는 ‘노가다’로 불렸다. 1945년 일제 강점기가 끝난 지 60 년이 훌쩍 넘어 2006년을 살아가는 건설노동자들도 ‘노가다’로 불린다. 건설노동자가 여전히 ‘노가다’인 이유는 식민지 사회든, 민주사회든 힘 가지고 돈 가진 자들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방식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구 사는 건설노동자 이씨는 노가다의 의미를 그렇게 설명해 주었다.
건설노동자 이씨는 10년을 넘게 노가다를 해 오면서 임금을 떼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건 바로 ‘쓰메기리’ 때문인데, ‘쓰메기리’는 원청회사에서 하청 전문회사에게 공사대금을 어음으로 지불하는 데서부터 생긴다. 노동자의 임금은 어음으로 줄 수 없기 때문에 현금으로 지불한다. 하지만 전문회사는 어음을 회수하는 기간 동안 노동자 임금을 주지 않는다. 어음 회수기간 동안 임금을 공사비로 써버리는 탓이다. 어음 회수 기간만큼 임금 지급이 유보되는 것을 ‘쓰메기리’라 한다. 이 기간 동안 ‘오야지’들이 돈을 갖고 튀기도 하기 때문에 임금을 떼이는 것이다. 또한 ‘쓰메기리’란 우리말로 하면 손톱 깎기이다. 손톱을 깎아내듯이 임금을 그렇게 깎아낸다는 뜻도 될 것이라 설명했다.



건설노동자 이 씨는 자신이 겪은 파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4월 3일 구미 형곡동 대우, 롯데 듀클라스 아파트 신축현장의 협력(전문)업체 (주)진솔건설에서 형틀목수팀장들에게 시공참여자 계약서 작성을 요구했다. 시공참여자 계약서는 현대판 노예문서라 할만 하다. 이에 맞서 형틀목수팀장들이 하루 파업에 돌입했다. 그 결과 시공참여자 계약서를 철회시키고 더불어 도급 임금을 평당 4천 원 인상하는 요구를 쟁취했다. 이 투쟁에 참여했던 40여 명의 팀장들이 우리도 뭉치고 싸우면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후, 이 팀장들이 중심이 되어 대구, 경북지역에 흩어져 있던 형틀목수 팀장들을 세포처럼 조직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에서 형틀목수 팀장들과 몇 차례의 간담회와 교육을 통해 팀원들인 일반 건설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현장간담회와 선전과 선동을 하고, 조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5월21일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 약 일천이백 명의 건설노동자들이 모였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건설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자신감에 충만한 노동자들은 마침내 6월1일 파업출정식을 시작으로 역사적인 파업에 돌입했다.


노가다로 일컫는 토목, 건축 건설노동자들의 파업은 전평 이래 60년 만에 처음 일어나는 일이라 했다. 파업을 서두른 감도 없지 않고, 경험부족이었지만 한 데 뭉쳐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만큼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건설노동자들은 대구 본리어린이공원에 거점을 잡아 천막을 치고, 조직을 지구별로 나누었다. 지구별 모임을 가지고, 지구별로 사수대를 꾸리고, 지구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리어린이공원 부근에는 삼성, 롯데, 포스코 등 메이저급 건설현장이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거점으로 역할을 했다. 새벽에는 공사현장을 봉쇄하고, 작업하는 현장을 타격 했다. 새벽일정을 마치면 다시 거점으로 돌아와 전체 결의대회와 지구별 모임을 가지곤 했다. 약 일천오백 대오가 항상 유지되었다.
노가다로 긴긴 세월 당해 온 만큼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하니 아무도 감당할 자가 없었다. 더러 몰래 돌아가던 현장은 건설노동자들에 의해 풍비박산이 나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엠에프 이후 10년간 임금 인상은 고사하고 오히려 일당이 깎였다. 반면에 분양가는 두 배 이상으로 뛰었으며, 아슬아슬한 고층 공사장에서 무거운 연장을 차고, 서커스 하듯 하루 열 시간에서 열 두 시간을 일해야 했다. 그런데도 4대 보험은커녕 근로기준법도 적용받지 못했다. 노동부 항의 방문 마치고 돌아오면서 타워크레인이 돌아가는 곳이 보이면 어김없이 들어가 현장을 멈춰 세우곤 했다. 6월 12일까지 이렇게 현장은 봉쇄되었다.



사측과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대구 건설노동자들이 벌이는 투쟁의 불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전국의 건설노동자가 이백만 명이 된다. 이들 역시 대구 건설노동자들과 똑 같은 조건이기 때문에 이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일어선다면 87년 대투쟁과 같은 엄청난 일이 벌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구 투쟁을 고립시키고, 초기에 진압을 하려 했다. 경찰은 건설 사측에게 건설노동자들이 닥치면 112에 신고하라고 하면서,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을 공안탄압으로 몰고 갔다. 파업 11일 차에 경찰은 영장을 발부받아 동인동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이미 수배가 내려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이면 현장 봉쇄투쟁을 전개했다. 파업 12일 차에는 수성경찰서에 항의 방문하러 갔다가 경찰이 폭력침탈을 하자 분노한 노동자들이 수성경찰서 민원실을 모조리 부숴버린 사건도 있었다. 정부는 파업노동자들의 투쟁을 막기 위해 공사현장에서는 집회를 불허했다.



대구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길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건설 현장을 완전히 봉쇄하여 작업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대구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을 전국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확산시키는 길이다. 그러니까 12일까지는 현장을 완전히 봉쇄시켰지만,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지 못했다. 건설노동자의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대구 건설노동자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다. 그 일은 건설연맹에서 맡아 주어야 했다. 아쉽게도 토건협 경기서부와 경기중부에서 현장을 순회하며 대구투쟁을 알리며 조직하려 했을 뿐, 다른 곳에서 가시적인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투쟁이 대구에 제한 될 경우, 정부와 사측은 투쟁을 고립화시키려고 할 것이다. 파업대오를 현장과 분리시켜 놓고,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꼬드겨 현장을 돌리려 할 것이다. 이 당시로선 대구 파업을 완강하게 지켜내며 현장을 봉쇄하는 일과 아직 파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건설노동자들을 파업투쟁으로 조직하는 일이 관건이었다.



건설노동자 이씨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길게 내 뿜고는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12일 이후부터는 새벽 공사현장 봉쇄 투쟁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경찰이 허락한 국채보상공원에서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 6월 17일 본리어린이공원 거점을 경찰이 침탈하였다. 현장 거점이 없어지자 투쟁본부를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로 옮겼다. 그러나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들은 수배를 이유로 들어 투쟁본부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투쟁 현장은 토건협에서 내려 온 활동가들이 조직부장과 같은 역할을 맡으며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들이 투쟁지침을 만들어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조직적 혼란이 생겼고, 현장 조합원들은 다시 현장 거점을 확보하기를 요구했다. 현장 거점을 마련하겠다던 지도부들은 차일피일 미루면서 새벽 현장 봉쇄투쟁조차 없어지고, 낮에 공원에서 집회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위원장이 다시 투쟁본부로 들어와 상황실장을 맡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교섭이 있는 날이면 투쟁을 배치하지 않았다. 이후부터 파업대오에서 이탈하는 노동자들이 조금씩 늘어갔다. 교섭에서 전문회사 사측은 철근노동자들에게 오천 원의 임금 인상을 해주고, 형틀목수노동자들에겐 일만 원의 임금을 인상해 주겠다고 제시했다.
파업 돌입 시 건설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안은 일당 십칠만 원이었다. 현재 철근노동자들이 십이만 원을 받고 있으니, 오만 원 임금인상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런데 위원장은 교섭석상에서 사측에게 임금인상 요구안을 임의대로 변경하여 20% 인상안을 제시해 버렸다. 위원장이 조합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해 버린 일이었다. 이 일을 두고 나중에 위원장은 “실수했다”고 했지만 이건 실수 정도가 아니었다. 지도부의 상태를 간파한 사측과 정부는 더욱 완강하게 버티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불만은 단지 요구안의 축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날 지도부가 내린 투쟁지침을 다음날 아침이면 취소하여 버리는 바람에 조합원들은 지도부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위원장은 계속 사측의 최종안을 받아들이고 파업을 접자고 했다. 6월 26일 조합원들이 모여 집단토론을 했다. 조합원들은 현장타격투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고, 근로기준법에 따른 8시간 노동제, 그리고 임금인상은 오천 원이 아니라 최소 20% 인상을 요구하며 투쟁할 것을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그 동안의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현장타격투쟁을 계속할 것과 이전과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6월28일 건설노동자들은 대구 시내 죽전네거리를 막고 선전, 선동을 했다. 경찰이 집결하자 지하철을 타고 반고개네거리로 가서 다시 도로를 점거하고 선전, 선동을 했다. 이렇게 경찰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로 완전히 골탕 먹였다. 투본으로 돌아오면서 신일타워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곧바로 현장타격에 들어가 현장을 완전히 세우고 돌아왔다. 이날 투쟁을 하고 돌아 온 조합원들은 오랜 만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작 이렇게 투쟁했어야 했는데 아쉽다고들 말했다. 이날 투쟁에 고무된 건설노동자들은 내일부터는 현장타격을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6월 28일 밤과 위원장은 교섭위원들과 개별 면담을 하며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아마 투쟁을 포기할 계산이었을 성 싶다. 6월 29일 새벽 3시 경에 위원장은 옷 갈아입으러 간다며 집에 들렀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연행을 위장하여 자수를 한 것으로, 조합원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다. 이 일로 대구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포항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고, 7월 5일이면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는 마당에 이렇게 대구 건설노동자들의 파업은 유리조각처럼 깨지고 있었다.



7월 2일 사측의 최종제시안을 놓고 찬반투표를 하였다. 결과는 찬성 380표, 반대 330표로 나왔다. 이날 새벽 대우프럼프에 공사현장에 올라갔던 농성대오가 내려왔다. 마지막까지 농성을 한 25 명은 찬반투표를 거부했다. 거부한 이유는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이렇게 난장판이 된 투쟁을 더 이끌어나갈 지도부가 없다는 대안 부재론 때문이었다. 찬반투표에서 찬성이 그나마 많이 나온 이유도 완전히 똑같았다. 잠정합의안에는 반대하지만, 믿을 만한 지도부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찬성하였다고들 했다. 이날 이후 투본에는 하루 한 두 건씩 건설노동자들이 찾아와 사무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곤 했다. 조합원들은 너나없이 “좆도 싸워보지도 못하고, 받아먹을 것도 없다. 이것은 완전히 굴욕적인 패배다.”라며 지도부에 대한 무차별한 성토로 파업투쟁을 평가했다.



다시 건설노동자 이씨는 말문을 열었다.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조직분열이다. 조합원들은 지도부에 대해 배신감에 치를 떨고, 그리고 분노하고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당하며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데 대해 허탈해 하고 있다. 또한 일반조합원들은 파업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자의식이 살아난 데 비해 팀장들은 노동자와 관리자 사이의 이중성도 비추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가다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 비록 지도부에 의해 무너지긴 했지만, 고집 세고 도통 남의 이야기라곤 들을 줄 모르던 노가다들이 뭉쳐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의 건설노동자들이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연대의 정신을 배운 것 등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합원들의 요구와 열망을 올곧게 실천해 낼 수 있는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파업했던 건설노동자들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면 이젠 “노가다”가 아니라 당당한 “건설노동자”로 뭉쳐야 한다. 파업 때 했던 것처럼 소대로 뭉치고, 지구별로 뭉쳐, 일상 속에서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사측은 더 많이 부려먹고, 저 적게 주려고 할 것이고, 파업노동자들을 현장에서 분리시키려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설노동자들은 더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파업은 사측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노동자 내부의 지도부에 의해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내부를 더욱 강하게 조직하기 위해선 조직체계를 소대에서 지구로, 그리고 지역으로 더욱 단단히 묶어야 한다.
앞으로 투쟁이 대구 뿐 아니라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을 전국적으로 묶어내고 확대시키기 위해선 건설 활동가들의 전국적인 모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포항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투쟁과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투쟁에 결합하면서 더욱 경험을 쌓고,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한 번 패배는 병가지상사라 했으니, 이번 투쟁을 거울삼아 승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며 건설노동자 이 씨는 말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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