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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권력 쟁취!’는 이제 낡은 구호인가? (下)

산별 전략논쟁 1-1

우리는 지난 호에서 <현장권력 쟁취!>는 낡은 구호이기는커녕 산별체제 하에서 그 중요성이 더 커지며 그 운동의 전략적 위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는 지도부들이 지금 추진하는 산별전환이 단지 노동조합의 조직 형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운동 내용을 도입하고 안착시키려 하는 문제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도부들이 이 참에 기회주의적인 운동 전략을 전면화하고 대세로 만드는 과정이므로 우리도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산별 전환에 비판적인 현장조직과 정치조직들이 투쟁으로 건설되는 산별노조가 아니라 조직형식만의 전환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산별 전환은 기업별 운동에서 산업별 운동으로, 단순히 노조운동의 변화로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서구식 양날개 운동, 즉 <사민주의 정당운동 - 사민주의 노조운동 체제>로 운동 전반을 재편하는 과정 속에 대공장 산별 전환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지도부들은 <민주노동당 - 산별노조>라는 양날개로 운동을 이끌고 가야 한다고 말해 왔다. 말이 양날개지 단일한 운동의 분업체계다. <의회주의 정치운동>이라는 날개와 <산업 정책개입/ 경영참가 운동>이라는 날개로 각각 정치 ․ 경제 분업을 하는 단일한 사민주의 운동인 것이다.

사민주의 양날개 운동의 완성

의회주의 정치운동만으로는 대중적 조직 기반을 확보하는 데 근원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민주의는 노조운동에서 인적 ․ 재정적 자원을 보완해야 한다. 산별노조가 이를 담당하여 유기적인 보완을 이룸으로써 단일한 사민주의 운동을 완성한다.
개량주의 지도부들은 남한에서 사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현재의 민노당만으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느낀다. 의회주의 정치운동을 보완할 다른 날개가, 즉 산업 및 사회적 차원의 운동(산별 교섭과 사회적 교섭을 통한 정책개입/ 경영참가 운동)이 필요하다. 민노당에 결여되어 있는 이 부분을 메워 줌으로써 사민주의 양날개 운동을 완성하는 과정이 바로 지금의 대공장 산별 전환이다. 그 점에서 산별 전환은 민노당으로 대표되는 의회주의 정치세력화의 조직적 완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단위사업장 노조운동은 의회주의 정치운동과 함께 양날개 분업체제 하에 파트너쉽을 이루는 데 적합하지가 않다. 산별노조와는 달리 현장투쟁에 여전히 매여 있는 단위사업장 노동조합(‘기업별 노조’)은 의회주의 정치운동의 유기적인 조직 기반이 되기가 어렵다. 현장 대중의 통제로부터 아직은 완전히 자립화하지 못한 단위사업장 노조 지도부로서는 사민주의 운동의 한쪽 날개로 기능하는 데 근본적인 제약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산별 전환을 재촉하는 민노당 소속 금속연맹 지도부들이 “노조는 기업 밖에서 조직되는 것이 원칙”(김연홍 금속연맹 정책국장)이라고 강변하면서 산별노조를 통해 민노당의 지역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업 밖에서 조직되”어야, 즉 단위사업장 현장으로부터 노조가 자립화해야 노조관료들이 제약 없이 의회주의 정치세력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양날개 운동의 완성을 위해서 현장투쟁의 족쇄를 털어버려야 한다는 속마음을 어찌 이리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인가.

“기업별 노조의 폐해”를 가져온 진짜 주범은?

산별 추진 지도부들이 과거 대공장 단위사업장의 전투적 임단투를 “전투적 조합주의”라고 비난하고, <현장권력 쟁취!>를 낡은 구호로 몰아가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기회주의 세력들은 10여 년 동안 이 전투적 조합주의를 “기업별 노조의 폐해”라고 지목하여 줄기차게 공격해 왔다.
오늘날 대공장의 임단투가 전투성이 거세되어 틀에 박힌 형식화된 투쟁으로 전락하고, 노자간 대리전의 성격이 탈각되고, 선도적인 투쟁으로 전국 전선을 쳐주는 역할을 잃어버리게 된 데에는 바로 이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공격이 한 몫 단단히 했다.
산별 만능주의를 외치는 기회주의 세력에 의해 전투적 조합주의가 이렇게 공격당하고 내몰림에 따라 대공장 임단투도 애초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잃어버리고 오늘날과 같이 “기업 내 분배투쟁”(산별 만능주의자들이 비판하는)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산별 만능주의자들은 이 기업 내 분배투쟁을 전투적 조합주의 탓으로 돌리지만, 실은 반대로 대공장 임단투에서 전투적 조합주의가 제거되어 버린 탓이다. 그 점에서 대공장 임단투를 오늘날과 같이 기업내 분배투쟁으로 전락시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산별 만능주의자들이다. 기업별 노조의 진짜 폐해는 산별 만능주의자 자신들이 초래한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전투적 조합주의를 내몰고 들어서는 산별노조는 이러한 과정 때문에 협조적 조합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연대를 억누르는 관료적 노조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산별 만능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처럼 과거 대공장의 전투적 임단투는 단사에 한정되지 않고 중소공장의 임금 단협까지 함께 끌어올려 전체적으로 상향평준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연대도 87년 대투쟁에서부터 91년 현중 골리앗 투쟁에 이어 90년대 중반 전지협 ․ 전기협 궤도연대파업과 현자 양봉수 열사투쟁에 이르기까지의 전노협 시절(산별 만능주의자들이 전투적 조합주의라고 비난하는 바로 그 전노협 시절)에 가장 활발했다. 전투적 조합주의가 산별 만능주의자들에 의해 공격당해 소멸되어버린 오늘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산별 만능주의자들은 기업별 노조의 전투적 조합주의가 계급적 연대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계급적 연대의 운동기풍을 무너뜨린 일등공신은 산별 만능주의자 자신들이다. 이것은 굳이 노선적 차원에서 얘기하지 않더라도 현재 산별 추진 대공장 지도부들이 사내하청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외면하고 나아가 관료적으로 통제해 온 현실의 수많은 사례들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연대를 무너뜨린 산별 만능주의자들이 산별노조를 통한 계급적 단결을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이 노선적으로든 당장 보여주는 모습으로든 어느 모로 보나 어불성설이다.
기업별 노조의 폐해라고 말해지는 단사주의 ․ 조합주의와 계급적 연대의 방기는 이와 같이 산별 만능주의자들 자신들이 뿌리고 심어놓은 것이다.

이행적 운동으로서의 <현장권력 쟁취!>

전투적 임단투와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연대는 사민주의 양날개 운동을 안착시키는 데 심각한 장애요인이다. 그래서 전투적 조합주의를 그토록 집요하게 공격한 것이었고, 이는 단지 노동조합 활동방식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다분히 운동의 전략적 진로를 바꿔내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던 것이다.

산별 전환이 이와 같이 양날개 운동을 안착시키는 전략적 차원의 사업이라는 사실은 산별 만능주의자들이 <현장권력 쟁취!>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를 보면 특히 잘 알 수 있다. 당장, 산별 만능주의자들에게 <현장권력 쟁취!>는 교섭 ․ 쟁의권을 비롯하여 상근인력과 재정 등 모든 권한을 산별노조로 중앙집중 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운동방향이다. 전문적 정책 역량을 강화하고 정책적 대안과 산업 및 사회적 의제를 개발하여 경영참가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노조운동의 궤도를 전면적으로 바꿔내야 하는 상황에서 현장 중심의 평조합원 대중운동을 강화하려 하는 <현장권력 쟁취!>는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산별 만능주의자들이 <현장권력 쟁취!>를 낡은 구호로 몰아가고자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현장권력 쟁취운동이 노동해방 ․ 노동자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가교를 이룰 수 있는 ‘이행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산별 만능주의자들의 사민주의는 “자본주의 말고는 대안 없다”고 하면서 노동해방 ․ 노동자권력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들어선 운동이다. 노동해방 ․ 노동자권력 쟁취투쟁으로 이행하는 현장권력 쟁취운동을 승인한다는 것은, 산별 만능주의자들로서는 자신들의 사민주의 기획 전반을 스스로 기각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장권력 쟁취운동이 어떻게 노동해방으로 가는 이행적 운동이 되길래 산별 만능주의자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것인가?
모든 공장과 작업장 내에서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통제체제(흔히 말하는 현장관리체제)를 강요, 부과한다. 자본(사측)은 자신이 규제하는 작업장 생산질서에 따라 노동자들이 끽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일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본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작업량과 작업속도, 작업일정과 작업인원을 결정하고, 여기에 따라 교대제 등 근무체계를 부과하고 기존 인력을 이리저리 전환배치/ 인사이동을 단행한다.
그리고 이런 생산과 작업에 대한 통제체제는 그 이전에 자본이 경영진을 통해 생산목표와 투자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른 자동화와 신기술 도입, 공장증설 및 공장통합 등등에 대한 ‘경영권 행사’에 뒤따르는 것이다. 자본은 이러한 전반적인 ‘경영전권’과 작업장 차원의 생산통제체제를 통해 생산과 노동과정에 대한 전제적 지배를 유지, 강화함으로써 잉여노동 착취를 극대화하려 한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나 기계가 아닌 이상 현장 노동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노동력과 건강을 보호하고, 나아가 비인격적인 통제/관리체제에서 벗어나 현장 노동자 자신이 주도하는 체제로 작업장 생산질서를 바꿔내고자 저항하고 대항력을 조직한다. 작업조건을 개선하고 노동강도를 완화하기 위해 M/H(시간당 투입인원), UPH(시간당 생산대수), 편성효율이나 외주 모듈화의 결정, 작업장 순환근무, 전환배치 문제 등을 놓고 사측에 맞서 싸운다.
이러한 작업규제력을 둘러싼 투쟁과 함께 그에 수반되는 작업질서 주도권을 놓고 또한 싸운다. 현장의 대/소위원들이 언제든지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작업중지권과 연장·특근 동의권 등, 노동재해를 유발시킬 위험한 작업을 강요하는 관리자의 전횡적 힘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산업안전 감독권, 그리고 징계위 노사동수 구성 등 안전 대책과 징계 ․ 인사 문제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나아간다. 이 모두가 작업장에서 노동자의 현장권력을 구성하는 부분들이다.

작업장 주도권을 넘어 경영권/ 소유권에 대한 도전으로

그러나 이런 권한과 권리들이 현장권력을 이루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장권력 쟁취!>는 이러한 작업장 주도권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작업장 생산질서에 대한 주도권은 여전히 기업의 경영권과 소유권이 자본에게 있는 한 언제든 되빼앗길 수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며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현장의 권한 ․ 권리들을 사측과의 협약으로 보장받고자 체결하는 단협이 언제든지 사측에 의해 휴지조각으로 전락되는 현실이 이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그래서 작업장 주도권을 넘어 경영권과 소유권에 대한 도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구적으로 이어질 수 없으며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측의 경영권/ 소유권을 신성불가침으로 인정하고 대신 ‘기업 내 분배투쟁’에 한정하는 한편 기업 울타리를 넘어서는 계급적 연대에 대해서는 철저히 방기하는 일종의 ‘담합적인 작업장 노사관계’를 형성하는 경우인데, 현재 현대차를 비롯한 완성차 대공장의 현장이 이러한 경향으로 빠져드는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조차도 ‘기업 내 분배투쟁’에 묶여 있는 한 결국 해당 업종 ․ 산업이 호황을 계속 유지하지 못한다면 무한정 지속될 수가 없다. 회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어용 ․ 노사협조주의로 전락하든지 아니면 경영권/소유권의 문제를 제기하는 현장권력 쟁취운동으로 가든지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과거 대공장의 전투적 현장조직들이 제기한 ‘현장권력 쟁취!’ 슬로건이 모호하다고 비판받는 이유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명확하지 못해서이다. 작업장 주도권 수준을 넘어 경영권/소유권에 대한 침해로 나아가는 현장권력 쟁취운동은 세계노동운동사에서 보통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 운동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장권력/ 생산통제권 쟁취운동은 단사에서 작업장 주도권의 확대 강화를 당연히 전제로 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점진적인 양적 성장의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연쇄적인 공장점거 파업 물결 같은 질적 비약을 수반하는 대중투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완전한 의미의 현장권력은 단위사업장 차원의 이중권력 상황을 뜻한다. 아직 경영권/소유권이 사측에 있지만 생산과 관련한 문제에서 사측이 노동자의 동의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마음대로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를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이 이중권력이다. 그러나 이중권력 상황은 그 자리에 멈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으로서, 노동자에 의한 기업 몰수와 노동자 경영체제로 전진하든지, 아니면 현장권력 와해와 자본의 지배권 회복으로 역전하든지 일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장권력/ 생산통제권 쟁취운동은 단위사업장의 노자간 역관계를 넘어 전반적인 계급투쟁의 역관계를 반영한다. 전체 계급투쟁과 분리되어 고립된 한 단사에서 자본의 경영권/소유권에 도전하는 운동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생산통제권 쟁취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소유권의 문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현장권력/ 생산통제권 쟁취운동은 전반적인 계급투쟁 고양기에 일반화되고 기업 몰수/ 국유화 요구로 발전하여 급속히 노동자권력 쟁취투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한 계기를 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세계노동운동사를 보면, 현장권력/ 생산통제권 쟁취운동은 보통 전국적인 공장평의회 운동 형태를 취했다. 관료화된 상층 중심의 산별노조로는 그 같은 현장 평조합원 대중운동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동조합과는 독립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노동조합(산별노조)은 현장권력의 조직적 표현으로 기능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장/ 작업장을 직접 대표하는 독자적인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20세기 초 러시아 노동자 혁명의 여파로 전개된 독일(공장위원회/ 레테[평의회]), 이탈리아(공장평의회), 영국(단위사업장위원회)에서의 운동들을 비롯하여 68년 혁명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70년대에는 칠레(코르돈[산업통제위원회])와 이란 혁명(쇼라[평의회])에서, 그리고 현재의 베네주엘라(차베스의 볼리바르 운동과는 별개로 아래로부터 전개되고 있는 노동자 생산통제를 통한 기업 몰수/ 국유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현 시기 계급투쟁에서 이행적 슬로건을 내걸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논쟁 -- 산별주의자와의 논쟁이 아닌 노동해방주의 진영 내부의 논쟁 -- 에 직면한다. 현장권력/ 생산통제권 쟁취운동이 이와 같이 계급투쟁 고양기 ․ (준)혁명기에나 전면화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당면의 계급투쟁에서 <현장권력 쟁취!> 슬로건을 내거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 슬로건을 개량주의적 성격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계급투쟁 고양기 ․ (준)혁명기도 아닌 상황에서 이행적/ 과도적 요구를 내거는 것이 과연 맞느냐 하는 더 일반적인 논쟁을 불러들인다.
먼저, <현장권력 쟁취!>와 같은 이행적 슬로건 ․ 요구를 당면 계급투쟁에서는 내걸 수 없고 오직 계투 고양기 ․ (준)혁명기가 되어야 내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계급투쟁에 뒷북이나 치겠다는 얘기나 다름없음을 우선 지적해 놓고 이야기를 해보자.
당면 계급투쟁을 (준)혁명적 시기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제출된 이행적 슬로건 ․ 요구를 지금은 내걸 수 없고 미래에나, (준)혁명적 시기에나 가서야 내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행 강령의 정신을 폐기하고 대기주의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이행 강령을 계급투쟁의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과거 이행 강령의 자구와 현실 계급투쟁을 추상적으로만 대비시키는 선전주의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기주의자들은 당면 계급투쟁과 노동자권력 쟁취투쟁 사이에, 방어투쟁(예컨대, 현 시기 자본의 구조조정 공격에 맞서는 투쟁, 비정규직화에 맞서는 투쟁 등)과 공세적인 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현실 계급투쟁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추상적 선전의 영역을 벗어나 현실 운동에 이르면 항상 최소강령에 스스로를 제한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최소저항선을 찾는 개량주의 세력과 실천적으로 차이를 가져오지 못하며 직접적인 운동 현안들에서 개량주의와의 투쟁을 기피한 채 추상적인 최대강령 선전주의를 보장하는 써클적 한계 안에 안주하고자 한다.

불균등하게 발전하는 현 시기 계급투쟁 속에서 일면적으로 비관적인 요소만을, 자본의 압도적인 힘과 개량주의 세력의 압도적인 영향력만을 보는 세력은 이행 강령을 당면 계급투쟁에 창조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과 시야가 원천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잠재해 있는 이행적 운동의 요소들을 보지 못한다.
<현장권력 쟁취!>는 인위적인 가공물이 아니라, 운동의 객관적 상황을 표현한다. 당면 계급투쟁의 구체적 모순을 표현한다. 현장권력 쟁취투쟁으로 전진하든지, 아니면 현장권력의 요소들마저 박살나고 자본의 전일적 지배로 되돌아가든지.

우리는 개량주의 세력들이 털어내려고 하는 현장권력의 요소들을 계급투쟁의 강고한 진지로 삼아서 전진해야 한다. 현장권력 쟁취투쟁의 계기들을 배태하고 있는(그러나 현재 산별전환 속에서 더욱더 주변화 되고 있는) 작업장 주도권 투쟁을 확대 강화하고, 이를 자본의 경영권/소유권에 도전하는 생산통제권 쟁취운동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를 위한 목적의식적인 선전선동/ 조직화 작업이 지금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다름 아닌 ‘현장권력 쟁취!’ 슬로건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이행적 슬로건 ․ 요구를 현 시기 당면 계급투쟁에서 내걸 수 없다는 대기론적 헛소리를 일축하고, 개량주의 주류 세력의 양날개 운동에 대당하는 대안적인 운동의 전망을 모든 현장투쟁들에 불어넣어야 한다.

대공장 현장조직들이 의례적인 장식처럼 자신의 깃발에 써넣은 ‘현장권력 쟁취!’ 구호는 정세적 긴장감이 빠진 공문구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다. 대세를 굳혀 가고 있는 사민주의 양날개 운동과 "함께 가는" ‘현장권력 쟁취!’인가? 의회주의 정치세력화를 "보조하는" ‘현장권력 쟁취!’인가? 산별교섭/ 사회적 교섭과 경영참가를 "뒷받침하는" ‘현장권력 쟁취!’인가?
현장조직 선진활동가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 ‘현장권력 쟁취!’에 어떠한 전략전술적 내용도 싣지 못한 채 관성적으로나 내거는 구호로 계속 방치시켜 놓는 것은 개량주의 지도부들이 대세몰이 하고 있는 양날개 운동의 하부단위 운동으로 전락시키는 데 공범이 되는 것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전망을 열어주자!

우리는 대공장 현장조직들로 인해 오명을 뒤집어쓰고 실추되어버린 ‘현장권력 쟁취!’를 구해내서 원래의 제 자리로 가져다 놓아야 한다. 현재의 방어투쟁과 이후 공세적 투쟁 사이의 간극을 허물고, 현장투쟁과 노동자권력 쟁취투쟁 사이에 가교를 놓아줄 이행적 운동으로서의 ‘현장권력 쟁취!’를 되찾아야 한다. 자본의 공격 앞에서 노동운동을 거듭 수세로 몰아넣고 있는 개량주의 지도부들의 양날개 운동에 맞서 진정한 대안으로서 ‘현장권력 쟁취!’의 전략적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래서 현 시기 ‘현장권력 쟁취!’ 슬로건을 통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전망을 열어줄 수 있어야 한다. 현장에서 노동강도 강화를 저지하는 투쟁, 자본의 현장통제를 박살내는 투쟁, 자동화와 신기술 도입, 공장 통합과 증설, 근무체계와 조직개편 등을 통한 전환배치와 고용불안 공세에 맞서는 투쟁, 안전대책과 징계/인사를 둘러싼 투쟁, 구조조정/ 정리해고 분쇄투쟁, 그리고 현장의 현안에 대응하는 모든 투쟁들에 이러한 전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러한 투쟁들은 결코 단사의 요구만을 가지고 싸우는 투쟁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에 일반화된 요구 투쟁이다. 이러한 현장투쟁들과 노동자권력 쟁취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은 없다.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가 있다.
자본주의 말고는 대안 없다는 사민주의적 산별론자들이 노동해방 대신에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독일 스웨덴식 자본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워 이행의 고리를 아무리 감추고 차단하려고 해도 이 모든 현장의 계급적 요구투쟁들(산별론자들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한 이행의 고리는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이 모든 투쟁들을 ‘현장권력 쟁취!’ 슬로건으로 모아내고 이 투쟁들이 나아가야 할 지점을 밝혀주어야 한다. 오직 현장권력 쟁취를 통해서만 이 투쟁들이 근본적인 해결 지점으로 나아가는 가교를 놓을 수 있다는 점을 매 시기 투쟁 속에서 대중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양 효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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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 , 현장권력 , 공장평의회 , 전투적 조합주의 , 대공장 임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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