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련의 정치신문 가자! 노동해방

발전노동자들과 함께 한 24시간

지난 9월 3일 오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 도로는 파업을 앞둔 발전노동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7대 요구안을 내걸고 발전노동자들이 국가자본을 상대로 한 투쟁에 나선 것이다. 파업찬반투표가 64%로 가결된 8월 27일 이후 언론에서는 연일 파업에 대한 악선동을 일삼았고 정부는 직권중재를 때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럼에도 발전노동자들은 이를 노동자의 단결로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투쟁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오의 분위기는 비교적 밝아 보였다. 집회 도중 대오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조합원들이 너무 많아서 보기에 좀 안 좋긴 했지만, 활기찬 집회 분위기를 보니 파업투쟁을 앞두고 동지들의 사기가 드높아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업전야

집회가 끝날 무렵, 따로 연락을 받은 수십 명의 동지들이 무대 뒤편으로 모였다. 발전노조 파업을 위해 꾸려진 사수대였다. 우리도 연대 단위로서 사수대에 참가하여 파업대오 1차 집결지인 고려대로 미리 이동하였다. 걱정했던 공권력의 원천봉쇄는 없었다. 우리는 각자 흩어져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집회와 행진을 마친 파업대오가 조별로 흩어졌다가 고려대 중앙광장으로 거의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앙광장으로 갔다. 거대한 무대와 함께 발전노동자들이 이미 구름처럼 집결해 있었다.
준비된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고 난 후 본격적인 규찰업무를 시작하였다. 워낙 탁 트인 공간이라서 여기저기로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지들을 끌어 모으는 데만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지만, 황혼이 지고 어둠이 깔릴 때쯤 모든 준비가 끝나 파업전야제가 시작되었다. 낮에 나눠 준 3000여 개의 빨간 수건은 단결된 노동자들이 만들어 내는 하나의 장관이었다.

규찰을 서면서 이탈자들을 저지하는 것은 조금은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저기 샛길이 많은데다가 사람이 부족해서 제대로 관리가 되지도 않았고, 지나가던 사람이 많아서 이탈자와 구분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든 이탈자들을 막고 대오의 분위기를 유지해야 할 사수대가 ‘정말로 잠깐 나갔다 오는 거겠지’, ‘잠깐 쉬다가 말겠지’ 하는 생각으로 규율을 느슨하게 집행했다는 점이다. 이는 파업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규율의 문제가 파업 준비 과정에서 미리 제대로 공유되고 집행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철저한 평가를 받아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규찰을 서던 동지들에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 보았던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공공부문에도 불어 닥치고 있는 구조조정으로 인한 현장의 불안감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있으면 정년퇴직할 늙은 노동자들이 후배들을 위해 파업에 힘차게 결합하며 예전 투쟁들 얘기를 즐겁게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지난 2002년 파업의 경험이 아직까지 발전노조의 밑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너무도 허무하게 끝나버린 파업

파업 당일 새벽, 여러 가지 급변하는 상황들을 접하면서 이번 파업이 과연 선언은 될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파업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직권중재 회부가 결정되고 수배자 명단이 발표되는 극악한 탄압을 지금 상태로 뚫을 수 있을지가 솔직히 불안했다. 파업이 선언되면 당장 내일부터 수배자와 파업대오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지를 빨리 결정하고 공유하고 결의해야 하는데 쟁대위에서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특히, 사수대가 부족해서 교대시간도 일정하지 못할 뿐더러 당장 지금 있는 사람 교대하기도 벅찬데 쟁대위에서 사수대더러 쓰레기를 치우라고 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연대 온 것이 아니라 용역으로 불려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교대근무를 마친 동지들이 먼 길을 달려 계속해서 결합하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날이 밝고 기상 후 집결한 결과 대오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아직도 먼 곳에서 올라온 동지들이 속속 결합하고 있었지만, 이미 파업 분위기는 한풀 꺾여 있었다. 근처의 산꼭대기에 있는 개운산 근린공원까지 올라가서 시간을 끈 후 파업종결을 선언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평가지점들

이번 파업은 어찌 보면 파업돌입 선언이라도 한 것이 장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쉬운 점투성이다. 연대대오로서 밖에서 보기에도 준비가 너무도 부족했다. 우선 8월 27일에 파업이 가결되고 난 이후 왜 파업이 1주일 미뤄졌는지가 애매하다. 물론 필요하다면 시간을 끌 수도 있겠지만, 추가로 확보한 1주일 동안 파업 조직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너무도 궁금하다. 뿐만 아니라, 파업 가결 선동을 위해 현장 조합원들에게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궁금하다. 지도부 차원에서는 거의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서 64%라는, 요즘처럼 노동조합운동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비교적 크게 낮지는 않은 가결율에 실망만 했을 뿐, 그 이전과 그 이후에 어떤 조직 활동을 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혹시 밖에서 보아서 몰랐던 것이라면, 사실은 이러저러한 노력을 했는데 조합원이 안 따라줬을 뿐이라고 좀 깨우쳐 주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사수대 역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준비가 부실했다. 애초에 본부별로 나와 줘야 할 인원이 도저히 나오지 못한데다가 나온 동지들도 미리 준비와 결의를 하지 못한 채 그저 뽑혀서 어쩔 수 없이 나왔을 뿐이었다. 이는 단순히 사수대 운용의 문제가 아니다. 사수대를 건설한다는 것은 의식과 결의가 충분히 되어 있는 파업대오의 중핵을 형성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정도의 중핵을 교육시킴으로써 다른 조합원들의 기본적 교양과 규율 역시 함께 향상되는 것인데 사수대 준비는 물론 파업대오 전체의 기본적 교양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엄청난 수의 이탈자는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파업 돌입 이후 어떠한 전술을 취할 것인지, 뻔히 예상되는 탄압들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대오를 유지할 것인지, 당장 대오가 머물 안전한 장소와 시설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과연 준비해 둔 상태에서 지도부가 파업 선언과 종결을 결정한 것인지도 궁금하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이번 파업을 위해 지도부가 과연 어떤 준비를 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물론, 이번 파업이 승리하지 못한 원인을 모조리 지도부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일 것이다. 이번 파업에서 어찌 보면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학생들이 파업에 대거 결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 수가 적잖은 좌파 학생운동가들 중 발전 파업대오와 함께 움직였던 동지들은 거의 없었다. 우리와 함께 규찰을 서던 발전 조합원 동지가, 고려대에서 파업 전야제를 하니까 여기 있는 학생도 당연히 고려대 학생이겠거니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는데 아니라고 일일이 설명 드릴 수도 없어서 괜시리 민망했던 기억이 날 정도다. 그리고 좀 더 많은 학생들을 조직하여 발전 파업에 결합하지 못한 우리 자신이 부끄러웠다.

다음 투쟁을 지부 단위에서부터 힘차게 준비하자!!

아쉬운 점이 많긴 했지만, 지도부의 준비가 미비함에도 불구하고 발전노동자들이 이만큼이라도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2002년 파업의 가열찬 경험이 현장 조합원 대중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번 파업에서의 무기력했던 기억들은 앞으로도 현장 정서를 지배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이미 같은 공공부문 사업장인 철도공사만 하더라도 엄청난 규모의 외주화를 통해 정규직이라는 존재 자체를 일종의 특권층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KTX 여승무원 동지들이 이미 오래 전에 진행된 승무 외주화에 맞서 정규직화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철도 전체의 싸움으로 번지지 못해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로는 모자랐는지 다음 차례는 발전이라고 자본은 공공연히 엄포를 놓고 있다.

전면적인 구조조정은 이제 시작되려 하지만, 이미 발전 5사에서는 각각의 지부별로 비정규직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다. 노동자들이 거대한 투쟁으로 쉽게 모이지 못하도록 각개격파 한 이후 힘이 약해지면 전면공세를 펴는 것은 자본이 즐겨 쓰는 전술이다. 이러한 공세들을 막아내는 지부 단위에서의 작은 싸움들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발전 구조조정 야욕을 분쇄해야 한다. 다음 파업 때에 발전노동자들은 더욱 강고한 파업대오로, 우리들은 더욱 강력한 학생 연대대오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기찬 (학사정연 회원)
태그

파업 , 발전노조 , 5사통합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학사정연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