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실천연대의 기관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46호]‘진보좌파’라는 이름의 허상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결하였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남한 사회에 엄청난 바람을 몰고 왔다. 거센 바람이 불면 풀잎이 눕듯, 수백만 인민이 전직 대통령 영정 앞에 엎드렸다. 또는 인간 ‘노무현’이라는 이름 앞에서 눈물을 뿌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분향소를 찾았다. 개중에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와서 슬픔으로 하루를 보낸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개별적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 며칠간 추모 열기는 나날이 증폭되었다. 그것은 ‘민주당’이나 ‘노사모’의 동원력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장례를 치르는 한 주일 동안은 온 나라가 진공상태에 빠진 듯하였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벌어진, 그 엄청난 규모의 자발적인 추모 물결은 인류의 지난 역사를 샅샅이 톺아보아도 찾아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또 미래에도 웬만해서는 연출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기억은 편집될 수 있다

그런데 그 거대한 군중이 한 가지 슬픈 감정에 젖어 있는 동안에, 생뚱맞게도 나는 2,3년 전쯤에 ‘공공의 적’이었던 대통령 노무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무렵에는 세상 잘못 돌아가는 건 모두 노무현 탓이었다. 오죽하면 인터넷에서는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는 댓글놀이가 유행하였다. 말이 나온 김에 그에 관한 기억을 조금 더 뒤적여보자.

취임 초기에 그는 대처 전 영국 수상의 전기를 손에 들고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뒤, 작은 정부를 지향하였다. 그러면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상처가 되었다. 비정규직 악법으로, 노동자들은 그때도 서러웠다. 파업은 금기시되었고, 시위하던 농민이 진압 경찰에게 두들겨 맞아 죽는 일도 벌어졌다.

골프장 백 몇십 개를 지어 경기부양을 하자는 허무맹랑한 소리도 정부에서 나왔다. 사기업에 민간 토지의 강제수용권을 주는, 몰상식한 기업도시특별법도 만들었다. 새만금 갯벌은 여전히 썩어갔고, 이명박의 대운하 못지않은 개발주의 열풍이 시골동네까지 휩쓸어 전국에 땅 투기 바람이 불었다.

물론 이런 기억을 나 혼자만 떠올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슬픔에 젖은 5백만 조문객 가운데 상당수가 분향소에 흐르는 향냄새를 맡으며, 재임 시절의 실패한 대통령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에 따라 기억은 편집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실패한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기억은 묻어두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바보 노무현의 얼굴만 떠올리며 마음껏 슬퍼해도 괜찮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이 정권의 압박에서, 그렇게라도 잠시 해방될 수 있다면 말이다.

500만 열기에 편승한 세력들

사실 5백만 인민이 한 가지 감정으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전직 대통령의 급작스런 죽음 앞에서, 청와대도 한나라당도 잠시 숨을 골랐다. 부르주아 언론도 잠시 고개를 숙였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 노무현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엄청난 열기에 현실 권력도 잠시 주눅이 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거대한 열기 속에서도 패륜적 발언을 쏟아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애쓰는 파시스트 논객도 있었다. 조갑제니 지만원이니 김동길이니 하는, 한물간 ‘올드보이’들의 코미디도 펼쳐졌다. 하지만 그것은 가끔씩 ‘튀는’ 말로 먹고사는 이들의 가련한 몸부림쯤으로 여기면 그만이다. 그들 목소리에 채널을 맞추는 건 한가한 사람들이나 할 일이므로.

한편, 이들의 맞은쪽에서는 서로 상주(喪主)임을 자처하며 존재를 과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노사모’의 한 리더는 “국민이 죽여 놓고 무슨 국민장을 하느냐. 우리 힘으로 노 전 대통령을 모셔야 한다.”고 오만을 떨었다. 거기에 지난 정권의 민주당 인사들은 공식 상주 역할을 자임하며 모처럼 면면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지지율 급등의 반사이득을 톡톡히 챙겼다.

민주당은 비로소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이명박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당분간은 현 정권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일 기세다. 하지만 이미 낡은 체제의 산물이자 지방 토호세력의 연합체인 민주당이 진짜 민주투사 집단으로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 대통령 추모 정국을 지나오면서 이른바 ‘진보 정당’ 인사들의 적절치 못한 움직임도 더러 감지되었다. 진보신당의 유능한 논객 진 아무개 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하여 제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도 적절치 못했다.

민주노동당 이 아무개 의원의 입에서는 고인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 철철 넘치는 추모의 변이 쏟아졌다. 용산 철거민 학살 사건 때, 전철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거리를 두려 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양새였다.

그러더니 얼마 전 이 의원이 대한문 앞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물론 그 기개는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궁금하다. 시민분향소가 마련되어 언론의 조명을 받은 그곳은, 민주당이나 노사모 같은 상주들의 자리가 아닌지.

이른바 ‘진보좌파’라는 이름의 허상

당사자들은 말할 것이다. 지금은 모든 진보좌파, 또는 민주세력이 반이명박 전선으로 모여야 할 때라고. 하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이명박에 반대하면 모두가 민주세력이 된다는 소린가. 몇 년 전으로 돌아가 민주당이 청와대를 접수하면 죽었던 민주주의가 살아난다는 말인가? 더구나 언제 우리 역사에 부르주아들의 민주주의 말고, 민중에 의한 민주주의가 한번이라도 꽃핀 적이 있던가?

참 고역스러운 시절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명박 정권에 극도로 증오를 표출한다. 물론 이 시대 민중에게 이명박은 악(惡)이다. 그렇다고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저주를 퍼붓는 사람이 누구나 선(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이명박은, 고장 난 자본주의 프로그램에서 불쑥 튀어나온 팝업창일 뿐이다. 대중은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과 노무현이라는 팝업창을 닫고, 오래 묵혀둔 스팸메일을 열었던 것이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확장자를 단 수많은 실행파일이 작동하는 거대한 가상현실에서 살고 있다. 그 안에서는 실체보다는 이미지와 관념만 설친다. 보수니 진보니, 우파니 좌파니 하는 말들이 그것이다. 그런 관념적인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번갈아 나타나는 팝업창을 마주할 뿐이다. 모든 팝업창을 닫고, 새로운 운영체제를 설치할 수는 없을까.

컴퓨터 프로그램은 결국은 ‘0’과 ‘1’이라는 이진법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렇듯,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이진법으로 작동된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은 바로 그 자본과 노동의 모순관계를 은연중에 덮어버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주도권을 합리화한다. 컴퓨터바이러스가 0과 1의 이진법 체계를 망가뜨리듯, 부르주아 언론이 만들어낸 관념적 용어는 노동과 자본의 이진법 관계를 곡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주의를 걱정한다. 민주당도 민주노동당도 ‘범민주세력’의 단결을 호소한다. 하지만 ‘노동’이 없는 민주주의는 허무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냉철하게 톺아봐야 하는 까닭이다

이제는 추모 기간에 편집했던 지난 정권에 대한 기억을, 한 번 더 편집해야 할 때다. 그러면서 지난 정권이 지배하던 시절에 노동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새겨봐야 한다. 더 이상은 ‘진보’니 ‘좌파’니 하는 관념의 허상으로 세계를 보지 말자.

오직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그리고 노동자의 입으로 말하자. 이제 자본주의는 그만 좀 끝내자고.


박남일 - 자신을 저술노동자라고 부르는 박남일은 현재 인문서 출판기획과 저술활동을 하면서 칼럼을 연재한다. 청년심산문학상, 창작문학상 등을 받았고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꿈 너머 꿈을 꾸다-정도전의 조선창업프로젝트> 등을 지었으며, KBS에 방연된 <역사의 라이벌>(전4권) 등을 엮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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