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실천연대의 기관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50호] 리얼리스트, 민중문학과 리얼리즘의 길을 묻다

- [인터뷰] 문동만 시인 -

2007년부터 활동해온 작가단체 ‘리얼리스트100’이 올 11월 반년간 문예지 [리얼리스트]를 창간했다. 90년대 이후 쇠퇴해온 민중문학을 꾸준히 지켜 온 작가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리얼리스트100’에 참여하고 있는 문동만 시인을 만나 문학운동, 민중문학, 리얼리즘의 미래를 물어 보았다.


[리얼리스트] 창간 소식을 접하고 무척 반가웠다. 언제부터 활동했으며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작가단체 ‘리얼리스트100’이 창립, 발족한 것은 2007년 9월 15일이다. 이전부터의 준비기간을 합치면 3년여가 되고, 초기에 준비한 사람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을 모으기 위해 돌아다니며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작업이 있었다.
2007년 말은 MB정권이 막 들어서고, 대운하에 대한 논란이 많이 있을 때였다. 준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전부터 큰 그림을 그리는 문학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보면 80년대에 활발했던 문학운동이 권력에 포섭되거나 포기되는 경향, 현실 참여적인 작가층과 독자층이 지리멸렬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잘 추슬러서 문학사의 흐름으로 의미 있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공유되었다고 생각한다.


90년대부터 민중문학, 노동문학이 우리 문학계에서 급격하게 쇠퇴했다. 그간 꾸준히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있어왔지만 리얼리스트처럼 조직화되거나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특히 작년과 올해를 기점으로 하여 작가들이 모이고 문예지까지 낼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

처음 준비하고 제안했을 때 공감했던 분들의 마음 속에는 문학운동에 대한 ‘꿈’이 여전히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이나 가치관은 쉽게 버려지지는 않지만, 유지하고 벼리고 진화시키는 것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그것이 가능한 터를 서로 의지하고 함께 만들자는 취지에 동의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공통된 지향을 잡기가 힘들었지만 ‘리얼리스트’라는 명명에 대해서는 새로운 시대 환경에 맞고, 진보적이면서도 참신하고 혁신성을 담아낼 수 있다는데 동의가 이루어졌다.
문예지 자체가 많이 읽히지 않고 출간되고 유통되기 어려운 현실이다. 처음에 발간하기까지는 두려움이나 불안함도 많이 있었다. 가장 큰 동력은 지금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는 소명의식이 아니었나 한다. 새롭게 고민하고 있는 젊은 작가층도 있지만 우리 세대 이후 30대에서 이런 일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리얼리스트]는 공개적으로 반자본주의 문학운동, 민중문학의 위상 회복, 리얼리즘의 쇄신과 풍부화라는 목표를 천명했다. 작가에게 민중문학, 노동문학,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

반자본주의라 하더라도 여러 경향이 있다. 반자본주의 문학운동이라 한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것 뿐 아니라 그 밖으로 더 많은 이념적 지향들이 (리얼리스트100 내부에) 포진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80년대에는 정파성을 가지고 이념과 문학에 대해 논쟁했지만 사실 그 후로 오랜 세월 동안 삶을 살아오면서 이념보다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 작품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리얼리즘’이 낡은 것 같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단이나 대학 강단의 압도적인 순수지향, 모더니즘적 경향이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더 풍부하게 해석하고 차용하고 제련하여 논쟁해야 한다. 오늘날 참여문학의 ‘부흥’까지는 아니더라도 작가들 사이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고 있다. 비상식적인 시대 자체가 작가들에게 그런 고민을 줄 수밖에 없는데, 리얼리즘을 낡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민중문학, 노동문학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말초적인 쾌락이나 이윤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고, 노동자계급의 삶을 정직하게 대변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노동자계급이 향유해야 할, 노동자계급의 대안적인 문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노동자 민중이 문학, 특히 민중문학과 노동문학을 스스로의 문화로 향유하고 있지는 못하다. 노동자들에게 노동문학, 민중문학은 어떠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라고 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그러한 의식을 갖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고, 실제로 대안적인 문화라는 지향을 가지고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문학을 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우리의 문학이 노동자계급 혹은 깨어있는 시민층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관도 낙관도 하기 어렵다. 문학이라는 것은 자판기처럼 넣은 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의도한 대로 읽히지도 않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온전히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를 함께 공감하면서 이 시대를 견뎌갔으면 하는 것이다. 작가로서 우리는 기록자, 창작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을 통해 소소한 물길을 내고, 우리의 존재를 알고 서로 찾아오고 만나는 그릇으로서 말이다.


과거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노동해방문학이 발전하고 널리 향유되었던 것은 현실정치에서 혁명의 전망이나 운동의 열정이 살아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현실과 문학 사이의 긴장관계가 있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정치에서 자본주의 극복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과 실천이 협소해지고 있기 때문에 문학 역시도 쉽게 대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대학이나 현장에 문학회들이 존재하고 노동문학이 10만부씩 나가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적 흐름이라는 것이, 촛불정국 때에는 촛불만 보이고 금방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기도 한다. 그러나 쉽게 그렇게 되지 않는 완고한 부분이 세상에 존재한다. 같이 흘러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상심도 필요한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을 설득할 내용과 형식이 진지하게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문학은 삶이고 한이며 언어이다. 문학이 현실정치의 난맥을 뚫을 수 있는 활로가 될 수는 없고 현실정치가 문학에 영향을 주는 것이 맞다. 현실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소수일 수밖에 없고, 문학은 그런 것들을 환기하고,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나도 쓰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력 같은 것을 주어 보려고, 보다 근본적인 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고 노력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