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노올자] 상상 속의 걷기 여행

간혹 가다 울리는 내 전화기에 낯선 번호가 떴다. 낯선 번호는 잘 받지 않지만 오랜만에 온 몸을 흔들어대는 전화기의 진동이 고마워 덥석 받아버렸다. 월간 <사람>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한 달 전 ‘내가 평소 무엇을 하며 노는지’ 글을 쓸 일이 있을 것이라 일러준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친구가 날 추천했다는 데 어떡하랴. 그냥 쓰는 수밖에!


전화를 받은 후 며칠간은 평소 제대로 놀지 못해 쓸 말이 없다는 것이 큰 고민이었다. ‘노는 것’에 대해 ‘글’까지 써야하는 상황이다 보니 평소 신나게 놀아야하는 상황이 스트레스인 나에겐 여간 고민되는 일이 아니었다.


평소 나의 놀이는 신나지도 못하고 화끈하지도 못하다. 사람도 잘 만나지 않아 약속도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남들보다 잘 빈둥거린다는 것. 그렇게 시간을 죽이면서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귀 기울이며 혼자 잘 히죽거린다는 것. 종종은 깔깔거리며 ‘정말 웃긴다.’며 혼잣말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것. 덕분에 내 애인(좋아하는 연예인)은 매주 바뀐다는 것. 그것이 최근 3년 간 나의 주된 놀이였다. 즉 TV는 나의 놀이터였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놀이터에 비치되어있는 놀이기구였던 것이다.


그랬던 나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피로를 쉽게 느끼며, 게으름을 미덕으로 여기는 몸을 가진 내가 ‘여행’에 빠진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인생의 목표로 가진 친구가 소개해 준 여행수필로 시작되었다. 그 책은 여자 혼자 몸으로 산티아고까지 걷기 여행을 한 김남희씨의 이야기였다. 그 분의 글을 읽으며 여자 혼자 낯선 곳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알 수 있었다. 나 자신과의 대화, 낯선 사람에게 도움 받는 법,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무엇보다도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지레 ‘두려운 것’들을 덤덤히 이겨낼 수 있는 마음 깊은 곳의 용기가 큰 힘이 되었다.


기차에 앉아 그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매일 걷기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한다. 서울에선 어디를 걸으면 좋을까, 이번 여름엔 한 달 동안 우리나라 끝에서 끝까지 다 걸어봐야지, 내년 여름까진 꼭 돈을 모아서 산티아고로 떠날 거야, 그래!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타야해, 아, 쿠바도 가봐야 하는데….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온통 여행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다. 지금은 여행을 상상하는 것이 나의 놀이인 셈이다.


여행을 꿈꾸며 낯선 곳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하는 일, 허공을 바라보며 상상하는 동안 나는 행복하다. 가만히 앉아있는 순간에도 나는 어딘가를 걷고 있으며 내일은 어디를 걸을 것인지 정한다. 마음이 동한다 해서 항상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걷고 있는 익숙한 길도 매일 반복되는 여행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누군가에겐 우연히 발견한 여행지의 뒷골목일 수도 있으므로.


앞으로 나는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산을 만나는 진정한 등산의 의미를 아는, 그런 여행자가 되고 싶다. 그것을 꿈꾸며 준비하는 것이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나만의 진정한 놀이’이다.


덧붙이는 말

이번 호를 끝으로 활동가 릴레이 연재 ‘노올자’를 마칩니다. 무겁고 거창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이야기 속에 담긴 생활인으로서의 활동가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기억합니다. 활동가 릴레이라는 형식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월간 <사람>은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담아갈 것입니다. 그동안 ‘노올자’에 참여해주신 활동가 여러분과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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