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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은 도발적이다. 아니 한국 사회가 그를 끊임없이 도발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첫 작품인 2001년 작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는 KBS ‘열린 채널’ 상영불가 방침 때문에 법정소송으로 이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2004년에서야 방영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작품인 <미친 시간>(2003년 작)은 베트남 전쟁에서 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정면으로 다룬 것이기에 베트남 전쟁 참전 전우회의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이후 2004년 이주노동자 인터뷰 프로젝트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그는 얼마 전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란 프로젝트로 다시 한 번 세상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다”는 부제를 달고 있는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2006년 대한민국의 자화상, 110분짜리 대한민국에 대한 진단서다. 작년 말 한국독립영화협회 홈페이지에 쓴 그의 제안문을 읽고 모인 16명의 독립다큐멘터리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들이 의기투합해 한미FTA부터 새만금, 홍콩의 원정시위대와 APEC 반대투쟁, 원주 화상 경마장과 강원랜드 카지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와 평택 대추리 주민들까지 지금 시기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뜨거운 현안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았다.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무료 상영’이라는, 내용에 딱 들어맞는 배급형식으로 석 달째 절찬리에 상영 중인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의 프로듀서이자 총연출 이마리오 감독을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영상집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월드컵 때 뭘 하며 보냈나, 축구는 좋아하는지.
“사무실(서울영상집단)에 함께 있는 친구 작업에 스텝으로 참여해 촬영을 나갔다. 토고전과 프랑스전에 광화문으로 갔는데, 내가 녹음을 맡고 있어서 귀가 아파 죽는 줄 알았다. 월드컵을 주제로 한 영화는 아니고 ‘전쟁’의 일상성이랄까, 전쟁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먼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밀접하게 관계된 것이고 현재에도 우리 옆에서 진행 중이다, 뭐 그런 내용의 작품인데 응원하러 나온 사람 인터뷰를 따기 위해서였다.
축구는 대단히 좋아한다. 학교에 축구부가 없어져서 꿈을 접기는 했지만 어릴 적 장래희망이 축구선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북에서 홀로 내려오신 분이었는데 경평전(광복 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렸던 축구경기로 당시 가장 인기 있던 대회였음)에서 북한 수비 대표로 뛰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어려운 살림에서도 축구공은 가죽 공으로 사주셨고, 축구화도 비록 시장에서 산 것이었지만 떨어질 걱정 않고 신을 수 있었다. 지금은 뭐 마땅히 함께 찰 사람도 없어 못 하고 있다.”
5·18 비디오의 충격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정 형편도 넉넉지 않은데다 지방 소도시(그는 강원도 동해 출신이다)에서 학창시절을 다 보냈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된 계기가 있었나.
“동해는 10년 전까지 대학 하나 없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사회에 대한 관심도 없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던, 한마디로 아무생각 없던 청소년이었다. 그러다 대입 때문에 춘천에 갔다. 둘째 날 면접까지 마친 뒤 할 일이 없어 춘천역 광장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비디오를 보여 준다’는 말에 혹해서 본 것이 5·18 비디오였다. 충격적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동안 내가 배우고 알고 있던 것이 몽땅 거짓이고 사기였다란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그 전까지는 ‘학생운동’, 이런 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는데 그때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대학에 들어가 동아리에 들고 세미나를 하고 운동과 세상을 조금씩 배워가게 됐다. 그게 가장 큰 영향 아니었을까? 내가 있던 동아리는 처음에는 사회과학 동아리였는데 90년대 들면서 점차 신입회원이 안 들어와 방향전환을 한 것이 ‘영화’였다. 그래서 이래저래 동아리 활동과 영화 공부를 하다 늦게 군대에 갔다 왔고 대학 졸업 후 전망을 고민하면서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공부를 하게 됐다. 다큐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걸 잘 할 수 있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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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를 하기 위해 아무리 생각해도 졸업을 할 이유가 없었던 대학을 미련 없이 그만둔 채 서울로 왔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니?, 공무원 시험이라도 봐라” 등등의 레퍼토리를 읊으셨다고 한다.
“3남2녀 중 막내인 내가 유일하게 대학을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 누나들이 나보다 공부를 더 잘했던 것 같다. 자신들은 형편이 안 돼 못 갔기에 막내라도 보내야겠다고 해서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거다. 그런 막내가 대학에서 운동한다고 하고, 이제는 돈 안 되는 영화를 찍는다고 이러고 있으니 어머니 속이 많이 상하셨을 거다. 몇 년 전 강릉인권영화제에서 <주민등록증을 찢어라>가 상영될 때 오셔서 보라고 했다. 누나와 함께 보신 이후로는 별 말씀이 없다. 내가 하는 일을 인정을 했다기보다는 저놈은 저렇게 살려나보다 하시는 모양이다. 그나마 요즘은 이곳저곳 강의도 나가게 되어 생계에 도움이 되는 편이지만 서울에 처음 왔을 때는 정말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었던 적도 많았다. 주로 결혼식 비디오 찍으며 근근이 살았다. 하지만 적게 벌면 적게 쓰게 되는 거 같다.”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기는 어떤가. 여전히 만만치 않을 텐데.
“저마다 작업방식이 다르고 주제에 따라 상황이나 조건도 다르니 딱 얼마나 든다고 표준을 정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이 연출, 촬영, 편집 등 전 작업을 감독 혼자 하지만 서영집(서울영상집단) 같은 경우는 팀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럴 때 제작비에는 인건비를 칠 경우는 아무리 기간이 짧아도 1년 반에서 2년 걸리는 작업이니 억대가 넘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인건비를 제대로 치는 경우는 드물고 특히 서영집에서 찍는 것은 최소한의 실비로 제작한다고 보면 맞다. 외국은 다큐(다큐멘터리) 기본 제작비가 십 몇 억을 넘겨 몇 십 억대에 이르기도 한다. 다큐를 지원하는 펀드가 대단히 세분화 되어있고, 기획 단계에서 5,000만원, 제작 단계에서는 몇 억…. 이러니 최종 단계에서 나오는 다큐가 양질의 작품이 된다. 한국 같은 경우는 아르바이트도 하다가 찍고 그러다 돈 떨어지면 또 아르바이트 하고, 그러니 한 편 완성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한국에서도 영화진흥위원회가 1998년부터인가 독립영화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2000년부터는 다큐도 연간 1억 원 정도를 지원한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10편을 지원한다고 했을 때 1천만 원이면 큰 액수도 아니다. 천만 원을 받아도 결국 한 명이 작업할 경제적 지원밖에 안 되는 셈이라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 물론 턱없이 부족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조금씩 나아진다고는 할 수 있다.”
“<미친 시간>을 찍고 내 바닥이 보였다”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와 <미친 시간> 이후 감독을 맡지 않고 프로듀서로 두 편을 기획했다. 감독에서 프로듀서로 역할을 옮기게 된 이유는.
“<미친 시간> 끝내고 났더니 나란 인간이 보였다. 내가 이렇구나, 내가 알았던 지식이란 게 참 얄팍했구나, 이런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다큐는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만든 이의 세계관, 이런 것이 고스란히 녹아들고 드러나게 된다. 그야말로 감독의 철학이 담기는 거다. 그런데 <미친 시간>을 완성하고 보니 거기에서 내 본전이 다 드러나고 바닥이 보이는 거다. 한심스러웠다. 그러면서 힘든 시간을 좀 보내기도 했다. 다큐를 왜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의 프로듀서를 하면서, 다른 이들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힘을 받았고 답을 찾은 거 같기도 하다. 또 다른 이들의 작업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보게 되니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고 나름의 재미도 느꼈다. 다큐에 대한 의욕과 작업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찾게 된 거다.”
현재 감독으로서 구상 중인 작품이 있는지.
“5.18을 다룬 다큐를 구상하고 있다. 광주 비디오가 내게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기에 언젠가는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5.18은 거의 얘기가 안 되는 거 같다. 나라에서는 기념식도 하고 그러는데 운동진영에서는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듯싶다. 마치 죽어 있는 화석과 같아 보이는데 과연 그 당시 총을 들었던 사람들, 도청에서 끝까지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이들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게 이론으로는 ‘민주화운동’이다, 이렇게 정식화 됐지만 그건 이론일 뿐이고 그것과는 다른 뭐가 있지 않을까? 그들이 정말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지, 그런 것을 다큐로 이야기하고 싶다. 이미 소재로서는 5.18에서 새로울 것이 없을 거다. 방송에서 이미 다 다뤘다. 하지만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시각, 어떤 태도와 어떤 관점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는 게 중요하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래서 보는 이들이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당시 총을 들었던 사람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5·18이 화석화 되었다고 했는데 말대로 국가가 기념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도 마찬가지고 ‘국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품세계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청산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 할 처지도 능력도 안 되지만 국가에 맡겨둬서는 안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상처를 달래줘야 하는 것인데 국가는 그걸 하지 않는다. 5·18도 그렇고 베트남 참전 군인에게도 “너희가 돈 벌러 갔다 온 거 아니냐?” 하고 방치하고 있는 거 아니냐? 주민등록증도 각기 다른 생김새의 전 국민을 통제와 관리 대상으로 놓고 번호를 매겨 구분하려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그게 ‘국가’라기 보다는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인 것 같다. 과연 국가가 왜 필요한 것인가, 어떤 것이 민주주의이고, 지금 하고 있는 대의제가 맞는 것인가 등등. 이런 고민은 한참 동안은 계속 될 것 같다.”
“다큐는 가장 주관적인 매체”
운동 차원에서 다큐를 찍고 있는 것인가. 다큐와 미디어 운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운동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 생각은 영화 쪽이 더 많이 차지하는데 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운동 쪽에 더 큰 것 같다. 그렇다고 뭐 ‘예술’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다큐를 찍는 작업이 현실에 살면서 예술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예술의 경계에 다큐라는 것이 있기에 다큐의 존재 의미가 아닐까? 나는 다큐를 시작할 때도 영상운동을 하자, 뭐 이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세상에 뭔가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이게 다큐를 통해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거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바꾸고 좋게 하는데 작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왜 그렇게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영화를 만드는지,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세상을 보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안 보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고 깊게 고민 하지 않는다. 독립영화도, 다큐도 경계에 서 있는 영화다. 어느 한 부분에 들어가 있기 보다는 경계지점에 서서 소수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다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이 좋아진다고 해도 다큐의 역할은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좋아져도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렇게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는 시각이 다양하고 생각도 다 다른데 그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 획일화가 한국 사회에서 특히 심하다. 또 삐딱하게 세상을 보는 것이 즐겁지 않나?
영화 자체가 자본주의적이다 보니까 다큐를 보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냥 즐기려고 편하게 극장을 찾는데 다큐는 모르던 사실, 또는 알지만 외면하고 싶던 이야기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와 닿으니 힘들 것이다. 또 많이 접해보지 않은 방식, 형식의 차이로 인한 불편함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낯 섬이 장점이자 힘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큐’라는 것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다큐는 객관적인 사실이고 극영화는 허구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다큐는 상업영화나 극영화보다 훨씬 더 주관적인 매체다. 극영화가 사람들에게 뭔가를 느끼게 하려면 최소한의 객관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다큐는 “난 이렇게 생각해, 이건 이런 거야” 이렇게 직접 말하고 보여준다. 그래서 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큐를 보고 나서 사람들은 영화 자체 이야기보다 그것이 다루고 있는 사건, 그 속에 나왔던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됐나 하고. 다큐는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는 점이 크게 작용을 하는 것이다. 김태일 감독님이 다큐를 정의한 게 있는데, “보이는 것을 찍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한다.”란 말이다. 멋있게 표현했다고 생각해서 써먹으려고 기억해뒀다.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다큐 아닐까? 그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앞으로 어떤 것으로 바뀌어갈 런지는 지금 나로서도 잘 모르겠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가 온라인으로 상영을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지났다. 개봉을 하면서 대한민국이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고 했는데 희망을 찾았나.
“작업을 하면서 정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어떤 관람후기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있으므로 그 자체가 희망”이란 글을 읽으며 동감했다. 여전히 대추리에서, FTA를 저지하려 광화문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미쳐가는 사회에서 미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그는 30대 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전히 성장 중인 젊은이다. 그 까닭은 그의 길 찾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때문이다. 2,3년 뒤에 그는 서울을 떠나 강릉 어디쯤으로 갈 생각이다. 서울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란 것이 10년 가까운 그의 서울살이 총평이다. 그는 60, 70이 되어서도 다큐 감독으로, 죽을 때까지 다큐를 찍고 싶다고 한다. 마지막 작품은 자신의 다큐에 등장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어떻게 변했는지 그 간의 이야기를 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떻게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나”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한 편의 작품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그로 인해 한 시대, 한 시절을 요동치게 하기도 한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박김형준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