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23년간의 죽음

평범한 진리가 상식이 되기까지

2002년 11월 28일. 30여일 넘게 비닐천막 하나 없이 노숙농성을 벌이던 의문사 유가족들이 여의도에 있던 옛 한나라당사 옆 건물, 수위실 TV 앞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TV에서는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한 국방부 특조단의 조사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국방부가 특조단을 구성한다는 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예상했듯이, 허원근 일병이 타살되었고 군의 조직적 은폐가 있었다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의 발표를 전면 부인하는 내용이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허영춘 씨는 어느새 건물 밖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1984년 강원도 화천 GOP에서 M16 소총으로 양쪽 가슴에 두발을 쏘고, 그래도 죽지 않아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는 ‘허원근 일병 사건’의 아버지, 허영춘 씨를 만나러 유가협(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실로 가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23년간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데 한 치의 주저함이 없는 분이라는 그 이유가, 아버지에게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자리가 될 것이란 그 사실이 섭외 막판까지 기자를 망설이게 했다. 역시나 허영춘 씨는 “어 그래, 와라”는 말 한마디로 어렵게 입을 떼었던 기자의 말꼬리를 덮어주었다.



총소리는 두 방인데 왜 총상이 세 개예요?


그게 4월 2일이었지. 이놈들이 1시 몇 분인가 발견을 했다는데 그럼 연락이라도 바로 해줬어야지, 8시가 다 되어서 전화가 왔어요. 그때만 해도 진도에는 전화기가 집집마다 없을 때여서 마을에서 전화 받으라고 방송을 했지. 전화를 받으니 원근이가 자살을 했다는 거야. 그나마 뭍으로 물길이 나 있던 때라 택시를 하던 처남과 원근이 어머니와 운전수 한 명 더 해서, 넷이서 바로 올라갔지. 올라가다가 원근이 어머니가 너무 경황이 없어하고 멀미를 하는 통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서 원근이 어머니를 내려놓고 다시 갔어.
현장을 가서보자마자, 이건 자살이 아니다, 누가 죽인 거다, 하는 생각이 딱 들었지. 게다가 의심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세발을 쏴서 자살을 했다는데 탄피는 두 개뿐이고 일주일 뒤 부검 때는 헌병대 조사를 받고 나온 원근이 동료가 “아버님, 총소리는 두 방 났는데 왜 몸에 총상이 세 개예요?”라고 오히려 나보고 묻더라고. 그리고 하는 소리가 “중대장이 상황일지를 찢어 버리라는 것을 내가 거부하고 감찰실에 넘겼습니다.”라는 거야.


그날 이후 허영춘 씨는 청와대, 국방부, 헌병대 등에 수 십 통의 탄원서를 보냈다. 국방부 범죄수사단을 찾아가 재조사를 요구하다가 “몸조심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연이 있는 헌병대 중령도, 전직 군수사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95년에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서 배에 세 발을 쏘고 자살한 사람도 있다, 머리에 총을 맞고 10미터를 뛰어가는 사람도 봤다는 말을 듣고 나오는 길에 오래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범죄수사단에서 원근이 부대 동료들 주소를 다 받아 적어왔어. 그 애들이 제대할 때를 기다려서 전국 방방곡곡을 물어물어 거의 다 만나봤지. 다들 자기들도 잘 모른다는 말 밖에 없었어. 중대장(허원근 일병은 중대장 전령병이었다)도 만났는데 자기도 피해자라며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울더라고. 대대장은 중대장이 죽인 게 아닌지 의심했다지만 내 생각에는 사람을 죽일 위인이 아니야. 중대장은 원근이 사건 있고 얼마 뒤 제대해서 사업하다 실패하고 이혼하고 얼마 있다가 병에 걸려 죽었지.
변호사들도 많이 찾아다녔어요. 다들 못 맡는다고 손사래를 치는 거야. 군사정권 아래서 이걸 맡을 변호사는 없을 거라더군. 민복기라고 대법원장 출신 변호사가 개업을 했다기에 또 찾아갔지. 내가 쓴 탄원서랑 자료를 한참 보더니 소중한 자료니까 잘 보관하라고, 좋은 시절이 오면 꼭 밝혀질 거라고 하드만.
육군본부에서 한 번, 국방부에서 재조사단에서 또 한 번, 다 하나같이 자살했다고 시늉만 낸 조사를 했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 국민고충처리위가 생겼기에 그리로 달려갔지. 거기서 자살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았어. 그런데 거기서도 자살이라는 거야. 88년 농성을 할 때는 우리를 취재도 많이 했는데 하나도 안 나와요. 그것도 참 분했지.


또 다시 은폐, 국방부의 파렴치한 범죄행위



그리고 마침내 허영춘 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의 400여 일의 농성투쟁 끝에 생긴 의문사위에서 2002년 8월 ‘허원근 일병 사건’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소대장 진급 축하 술자리에서 술에 취한 하사관의 총에 맞았던 허원근 일병이 다음 날 오전까지 살아있자 사건 은폐를 위해 두발의 총을 더 쏴서 자살로 조작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증언만 존재할 뿐 결정적인 물증이 없어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되었지만 그동안 군 당국의 발표와는 180도 바뀐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곧 국방부는 특별조사단을 꾸려 의문사위 결정을 뒤엎는다. 의문사위의 조사에 결정적 진술을 했던 증언자는 제외한 채 전현직 군인들을 불러 강압적인 조사를 펼쳤으며 내부 ‘타살’ 의견도 무시한 채 이미 나 있는 결론에 끼워 맞추기를 한 것이다.


“허일병 사망사건을 의문사위에서 내년 3~4월에 재조사하겠다고 언론에 공개했는데, 국방부 차원에서 ‘재조사는 절대 할 수 없다’고 하는 강력한 요구와 지속적인 관심 필요하다.” 이게 국방부 특조단이 내놓은 최종 업무종결보고 내용이야. 원근이 부검한 법의학자가 의문사위에서처럼 특조단에서도 1차에서 타살이다, 2차에서 강압적으로 나왔는데도 타살에 무게를 더 둔다, 그랬는데 특조단 진술서에는 “자살인 것 같다”고 적어놨어요. 다 이런 식이었지.
누구는 원근이 사건이 특조단 발표로 뒤집어졌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국방부는 계속 자살이라고 했고 또 그 소리를 한 번 더 한 거야. 이미 의문사위 조사로 밝혀질 것은 다 밝혀졌다고 봐야지.
그래도 괘씸하지. 어찌 보면 사람 죽인 일보다 더 나쁜 일 아닌가. 자기들이 나서서 진상을 밝히고 잘못을 빌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고, 이제는 진실이 좀 밝혀질라 하니 다시 스물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그걸 다시 막고 가리고.


거기에는 의문사위의 조사를 끊임없이 흠집 내고 주요 증언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등의 조선일보 보도도 한 몫 거들었다. 하지만 허영춘 씨의 말마따나 국방부 특조단의 조사는 법적 근거도 권한도 없는 자체 조사에 불과한 것이기에 ‘허원근 일병 사건’의 진실이 다시 묻혔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직 채 맞춰지지 않고 있는 진실의 조각들은 과거사 정리를 위한 진실화해 위원회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허영춘 씨는 이제 의문사위 발표를 근거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준비 중이다. 그는 사건 책임자의 처벌보다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군통수권자가 사과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또 다른 의문사를 막는 길이란 생각에서다.



몸은 죽은 이유를 기록한다


인터뷰 시작부터 주방에서 나오지 않던 유가족 한 분이 밥 먹고 하라며 저녁상을 내놓으셨다. 아들을 보내고 낯선 젊은이들에게 밥을 지어주시는 어머니 앞에 앉아 꾸역꾸역 밥숟갈을 뜨고 있는데 어머니는 “경대(강경대 열사) 기념관이 서울에 세워진다.”며 달력을 가리킨다. 달력을 보니 다시 겨울이다. 의문사 유가족들은 거의 매해 겨울을 여의도 국회 앞에서 맞았다. 1988년 유가협에서 진행한 139일간의 농성, 98년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벌였던 422일간의 농성, 그리고 그 축에도 끼지 못할 99년, 2002년, 2005년의 수십 일간의 농성과 1인 시위 등. 아마 이들이 국회 앞에서 보낸 날은 천일을 넘어서지 않을까. 허영춘 씨는 또한 두 가지 법 제정을 위해 요즘도 1인 시위를 하고 의원보좌관들을 만나러 국회로 출퇴근을 한다. 반인권적인 국가범죄에 대해서 공소시효를 배제하도록 하는 법(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안)과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검시관 제도를 두기 위한 법(검시를 행할 자의 자격 및 직무범위에 관한 법률안)이 그것이다.


두 법 모두 원근이 같은 아이들이 다시 생기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것들이지.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무식해서 아무도 몰라. 특히 검시관법은.
원근이 사진을 갖고 여기 저기 법의학자들을 찾아갔어. 내가 당신에게 누가 죽였는지, 자살인지 타살인지 묻지 않겠다. 그냥 이게 가능한 일이냐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면 아무 말도 안 해요. 우리들 먹여 살리는 곳이 정부고 국방부인데 어떻게 말하느냐는 거지.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나 육과수(육군과학수사연구소) 이런 데가 다 자유롭지 못한 곳이지. 그러니 법의학을 잘 안 하려고 할 거 아니야?
원근이 사진을 보면 오른 쪽 가슴 총상이랑 왼쪽 가슴 총상이랑 달라요. 그걸 ‘장시간의 생활반응’이 있었다고 하는데, 시간 간격을 두고 총을 맞았다는 증거지. 그런데 이 사진도 옷을 다 벗기고 피를 닦은 뒤에 찍은 거야. 그 전 사진은 아예 없어. 현장보존은 말할 것도 없지.
사망 사건이 나면 제일 먼저 법의학자가 달려가야 해.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가느냐가 사인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하지. 그래서 전국에 인력이 충분해야 하는 거야. 되도록 두 명이 가는 게 좋고. 가까운 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가도 좋지. 또 국가기관에서 독립해서 의견을 내고 그 의견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그런데 법의학을 해봤자 갈 곳도 많지 않고 가서도 여기 저기 눈치를 봐야 하니 누가 법의학을 공부하려 들겠어.


그를 아는 사람들은 허영춘 씨는 법의학에 있어 전문가 수준이라고들 한다. 이것도 다 의문사한 아들의 죽음이 아버지에게 남긴 부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실제로 그가 쓴 다른 의문사 유가족의 탄원서를 담당 검사가 보고 그의 법의학 지식에 놀라워하기도 했다.



『망원록』이라고 원한을 잊게 한다는 제목의 책이 560년 전에 있었어요. 지금보다 조선시대 검시제도가 훨씬 발달했었다고 볼 수 있지. 그때는 사건이 나면 3심을 해서 관할관청에서 한 번, 옆 관청에서 한 번, 마지막으로 관할관청을 감독하는 관청에서 한 번 봤다고. 그래서 『망원록』 여는 글에 대한법의학회 회장이 ‘조상 보기 부끄럽다’고 까지 써놨어요.
원근이 사건에서도 제대로 된 법의학자 한 명이라도 현장을 봤다면 이렇게 진상규명이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몸에는 죽은 이유가 기록되어 있는 법이거든. 그런데 법의학자는커녕 군의관 한 명도 그 현장을 본 일이 없다는 거야.
일을 해오면서 마음 아픈 일도 많았지. 두 분이 돌아가셨는데 한 분은 어머니가 데모한다고 강제로 입영을 시켰어. “나 이렇게 가면 어머니 다시 못 볼지도 몰라요.” 그러고 갔는데 그 아들이 군대에서 의문사를 당한 거야. 어머니도 결국 91년도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지. 또 한 분은 군부대에서 아버지가 재취(재혼)를 비관해 자살했다고 발표를 했어요. 그런데 친엄마는 어릴 적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새엄마랑 10년 넘게 같이 살았는데 다 큰 자식이 군대 가서 그걸로 자살을 하냐고. 그래서 아버지가 자살이 아니라 구타에 의한 타살이라고 진정을 냈는데 관련자가 고발을 한 거야. 그 때문에 법원에 불려 다니다가 홧김에 농약을 드셨지. 원근이도 누나 학비 걱정 때문에 자살했다고 처음에 발표했어. 그런데 원근이가 맏이고 위에 누나가 없어요. 이게 무슨 짓이야. 사람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런 일을 해야 되겠어. 그리고 그걸 밝히려는데 나서서 덮고 훼방 놓고. 이 부모들 심정을 겪어보지 않고 누가 헤아리겠나. 이제 다들 나이가 먹어서 걱정이야. 시간이 별로 없어.


지난 2003년에는 허영춘 씨를 비롯한 의문사 유가족 12명은 서울대학교에 시신 기증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법의학을 지망한 학생들이 실습할 시신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까닭은 그의 말마따나 “수십 년에 걸쳐 진상규명 작업을 벌이면서 혈육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결국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까지 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진리가 상식이 되기까지는 23년이란 세월은 아직 모자란 것일까? 허영춘 씨는 아직도 아들의 유골을 묻지 않고 있다.


사진 박김형준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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