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이슈] 인권위원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떠날 때는 말없이, 인권위원장 사퇴 이후

취재 기법 중에 ‘귀대기’라는 것이 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으려 할 때 쓰는 수단이다. 일단 문틈에 귀를 가져다 댄다. 그리곤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 글자씩 희미하게 고막을 스친다. 여러 명 분을 모아 하나 둘 맞춰보면 문장이 된다.

사진 | 시민의 신문


지난 9월25일 오후 7시 서울 을지로 1가 국가인권위원회 뒤편 중화요리 집에서도 이 방법이 유효했다. 조영황 당시 위원장을 제외한 인권위원들이 모였다. 오후 2시쯤 전원위원회에서 “물러날 때가 됐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잠적한 조 위원장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비공식 회의였다.


문틈을 향해 밀착


주로 조 위원장의 무능을 성토하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인권위원들의 발언인지 귀를 의심할 뻔했다. 위원장의 결심을 돌릴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위원회 내부에 있던 위원장에 대한 ‘왕따’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당시 분석은 분분했다. 조 위원장의 사퇴가 우발적이었기 때문이다. 위원들과 불화 조짐은 있었지만 급작스럽게 자리를 내던질 줄은 누구도 몰랐다. 직전 주말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인권위원 워크숍에서 1차로 조 전 위원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사단을 예고했다.


인권감수성 보다는 당파에 따라 조합된 인권위원들은 위원장과 사사건건 충돌을 빚었다. 이미 정치 이슈가 돼버린 북한 인권문제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해오던 인권위다. 이런 ‘딴죽걸이’ 세력이 외부뿐만 아니라 안에도 있었다. 정말로 “때려 치고 싶다”는 심정이었을 수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 가눌 길 없어


‘혹시나’ 하는 의심도 거둘 수 없었다. 조 전 위원장 사퇴 불과 한 달 전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 정책을 주도한 유진룡 문광부 차관이 정권에 비수를 꽂는 발언과 바다이야기 의혹을 흘리고 옷을 벗었다. 차관 직 사퇴 후 그가 내놓은 모든 발언이 정치적으로 해석됐다. 본인은 죽어도 아니라고 했는데 보수언론은 그를 국정홍보처의 방종에 맞선 소신파 등등으로 재해석했다. 조 전 위원장도 기자들을 만나 몇 마디만 한다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랴.


이 때문에 서울 반포동 그의 아파트 앞에서 이른바 ‘뻗치기’가 시작됐다. ‘뻗치기’는 누군가 올 때까지 한없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취재 기법이다. 주로 연차가 낮은 초짜들이 한다. 머릿속에 수십 가지 질문을 떠올린 뒤 이걸 중요도 순으로 재배열하고 주인공이 나타나면 쏟아 부어야 한다.


자칭 ‘일등’신문을 비롯해 통신사까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심지어 인권위 기사를 별 취급 안하던 경제지들까지 몰려왔다. 첫날에는 조 전 위원장의 아들이 기자를 상대했다. 문틈 사이로 이어진 대화는 30여분을 끌었지만 거듭된 멘트는 “아버지가 그러실 줄 몰랐다”였다. 또 기자들이 집 앞을 지키고 있으면 조 위원장은 집에 들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조 전 위원장이 함구를 결심했다면 기자들은 옥쇄를 지시받았다. 일등신문이 지키니 낙종 염려가 커진 통신사 소속 기자가 남았다. 조 전 위원장의 의지와 전력을 믿은 본보는 하루 만에 철수했지만 나머지는 돌아가면서 집 앞을 지켰다. 지치다 지쳐 조 전 위원장의 부인에게까지 마이크를 들이댔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나온 말이 “남편은 원래 평범하게 살았어야 했던 인물”이었다. 만 이틀을 기다린 다른 기자들 맥이 풀리는 표정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온다.


시골 할아버지의 구수함


곁에서 본 조 전 위원장에게는 구수함이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합격했고 형편이 어려워 곧 변호사를 개업한 분이다. 전남 고흥군법원 판사를 끝으로 농민이 될 준비를 했다가 국민고충처리위원장 직을 통해 공직에 발을 들였다. 지난해 3월 최영도 제 2기 위원장이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두 달 만에 물러나게 되자 급히 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인권위원장으로의 역할도 악평을 받을 만큼은 아니었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을 진통 끝에 내놓았고 차별금지법안을 마련했다. 2기 인권위를 맞아 조직 내부 혁신도 이뤘다. 미진한 점이 하나둘 씩 개선되던 상황이었다. 사퇴 직전에는 사무총장과 함께 국회를 찾아 인권위 발전 방안을 위한 논의에도 열심이었다. 물론 다른 위원들에게는 위원장과 사무총장의 행보가 자신들을 따돌리는 행태로 보여 반발심을 불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양쪽서 뭇매, 맷집만큼은 최고


현장에서 본 인권위의 최대 강점은 아젠다 세팅 능력이다. 인권을 기준으로 사회 제도와 관행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공식 기구다. 기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인적 구성도 정부의 위원회 중 어느 조직보다 비공무원 출신 수혈 비율이 높다. 어느 부처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직권조사 권한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권이 ‘먹히는’ 시대에 서 있다.


그러나 보수 진보 양쪽에서 욕을 먹는다. ‘입심 좋은 좌파들의 놀이터’로 조롱한 보수 신문은 조 위원장 사퇴 건이 불거지자 당장 문 닫으라고 일갈했다. 또 다른 신문은 연말까지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북한 인권 관련 입장을 내놓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없다는 에둘러치기 수법으로….


인권단체들의 불만 또한 만만치 않다. 이미 관료화 됐다는 분석이다. 지나치게 몸을 사리며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위원들과 조사관들의 자질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위원들의 인권에 대한 전문성과 감수성 부족, 군.경 등에서 차출된 조사관들의 낮은 의식 등이 진정인에 대한 독직사건으로 불거지거나 하나마나한 권고로 그치는 부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진 | 참세상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지만 유엔 인권위가 권고한 사항 중에 한국에서 제도로 구현된 것은 호주제 폐지 하나라는 자조도 나오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비정규직 보호 법안 등등은 설 곳이 없다.


그래도 믿을 건 인권위


그러나 단언컨대 누구도 인권위의 권한을 줄이거나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정권 차원에서 인권위를 없앤다면 반인권 정부라는 낙인에 시달릴 것이다. 정치적 부담을 안고 그런 무리수를 둘 무식한(?) 정치인은 없다. 국민 정서를 배반하는 최악의 사건이 인권위에서 터지지 않는 한 말이다.


안경환 신임 위원장은 ‘향내 나는 비누’의 소임을 다하겠다고 했다. 오세영의 시 ‘사랑의 묘약’을 인용했다.


비누는
스스로 풀어질 줄 안다.
자신을 허물어야 결국 남도
허물어짐을 아는 까닭에
오래될수록 굳는
옷의 때,
세탁이든 세수든
굳어버린 이념은
유액질의 부드러운 애무로써만
풀어진다.
섬세한 감정의 올을 하나씩 붙들고
전신으로 애무하는 비누,
그 사랑의 妙藥.
비누는 결코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까닭에
이념보다 큰 사랑을 안는다



이념보다 큰 사랑을 안기 위해 인권위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존재는 작아지고 향기만 남기겠다는 각오였다.


인권위 7층 창구에는 지금도 하루 평균 10여 건의 진정이 접수된다. 딸의 담임교사와 진학 상담 차 만났다가 술을 마시고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된 50대 어머니의 사연, 파업 기간 중 사측이 고용한 ‘진압부대’로 부터 성적 수치심을 당한 여성 노조원의 호소 등등이 쏟아진다. 경찰, 검찰, 관계부처,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 여러 기관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인권위를 찾는다.


대안은 ‘낮은 곳으로’라고 본다. 매년 조사인력을 추가한 인권위에는 현재 54명의 조사관이 있다. 이들이 현장으로 뛰어야 한다. 조사권이 없다는 이유로 앉아서 자료만 제출받는다면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다.


기각이나 각하가 많아 인용율이 형편없으니 인권위 문 닫아야 한다는 논리는 단순 무식하다. 인권위가 조정과 합의를 우선시한다는 것을 모르는 발상이다. 그러나 조사관들의 피나는 노력이 전제다. 이것마저 없다면 진짜로 문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독재의 유습이 건재한 현실


마지막으로 안 위원장이 2002년 모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을 인용하겠다. 제목은 ‘인권위를 휘어잡지 말라’였다.

“연전에 개봉된 ‘시고니 위버의 진실’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 인권위원회가 탄생한다. 민주화 학생운동가 출신의 변호사가 위원장에 임명되나 그는 끝없는 테러의 위협에 시달린다. 아직도 건재하는 구악 세력과 전면적인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 선 그는 외롭기 짝이 없다. 독재의 유습이 건재한 한심한 남의 나라, 영화 속에서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영화와 연극, 시와 소설을 사랑한 안 위원장이 오늘의 모습을 예고하고 쓴 것일까. 연말까지 내 놓겠다는 북한 인권에 대한 의견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을까. 오늘도 평택 팽성읍 원정 삼거리에서 경찰의 무차별 불심검문을 감시하는 활동가들과 서울 수송동 종로구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성람공투단의 모습을 떠올리기 바란다. 안 위원장과 인권위 전 직원이 각오를 다져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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