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미디어세탁소] <한겨레>, 개혁언론이란 수식조차 과분하다

<한겨레>는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의 열망을 안고 탄생했다.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 해직 기자들과 1980년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강제해직된 기자들의 기운이 작용하였고, 창간위원회 구성 등을 통해 1988년 5월, 2만 7천2백23명이 출연한 50억의 국민주 기금을 바탕으로 <한겨레> 1호가 발행되었다. 종합일간지 최초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시행하는 등 <한겨레>의 탄생은 한국 사회운동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았으며 독립적 언론이 왜 민주주의에서 중요한가를 상징적으로 웅변했다.


그러나 <한겨레>의 탄생 배경과 지향은 현재의 <한겨레>가 실존하는 외부적 환경의 변화로 인해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한겨레> 역시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의 신문대금, 즉 구독료만으로 운영비가 충당되지 않기 때문에 창간 당시와는 다르게 국가권력은 물론, 자본과 시장현실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존의 환경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부 환경적 요인에 더해 <한겨레> 기사와 논조 역시 무뎌지고 있으며 일각에서 “한겨레 변했다”를 넘어서 “한겨레도 뭐”라는 냉소적 평가로 나타나고 있다.


편집방향과 다르다는 얄팍한 핑계


지난 12월 8일과 9일 양일에 걸쳐 <한겨레>는 한미FTA체결지원위원회에서 제작한 “더 넓은 시장 더 높은 미래를 위한 항해가 시작됩니다.”라는 제목의 홍보책자 20만 부를 삽지로 끼워 배포하였다. 그리고 <한겨레>는 이에 대한 대가로 약 1,500만~2,000만 원 가량을 챙겼다. 한미FTA 협상이 지속될수록 정부는 한미FTA가 죽음의 거래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는 선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실제 2007년 한미FTA체결지원위원회의 예산 95억 원 가운데 광고·홍보비로책정한 예산은 무려 60억 원 이상. 여기에 국정홍보처가 2007년 국가 주요시책 사업에 대한 홍보 예산으로 78억 원을 집행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어 국가예산으로 집행되는 한미FTA의 광고 홍보비가 중복되어 한국 사회 구성원 절반 이상이 반대하는 한미FTA의 선전을 위해 낭비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겨레>도 이와 같은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고, 또한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해야하는 언론매체임에도 불구하고, 2,000만 원 가량을 챙기기 위해 <한겨레>를 선택한 독자의 정치적·사회적 의식에 냉수를 퍼부었다. 이 뿐 아니다. 이미 <한겨레>는 정부의 ‘한미FTA 환상 심어주기’ 대열에 동참한 전적이 있다. 한미FTA 2차 협상을 앞둔 7월 7일, <한겨레>는 재정경제부, 외교통상부, 국정홍보처가 공동 기획한 “이대로 멈출 것인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 한미FTA, 외눈박이의 시각을 바로잡습니다.”라는 제목의 전면광고를 게재하였다. 7월 7일, 19일, 21일과 8월 4일, 5일, 국정홍보처가 신문 광고료로 집행한 돈은 무려 7억 5천 가량. 다른 매체까지 포함되어 있다하더라도 당시 <한겨레>가 국정홍보처의 한미FTA 전면광고로 챙긴 수입은 두둑하다. 그러나 광고 즉, 자본의 미끼를 덥석 문 <한겨레>는 “한미FTA라는 주요한 문제에 대해 편집방향과는 다르게 판매국에서 결정한 일”이라며 얄팍한 핑계를 대고 말았다.


광고를 통한 언론매체의 압력은 당연 언론의 독립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언론매체에서 경계해야 하고 긴장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최근 <한겨레>의 행보를 본다면 광고에 따른 생존경쟁만이 너무 치열할 뿐이다. 정부 광고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이 광고와 삽지 배포를 통해 확인되었고, 특히 <레디앙>에 연재되는 ‘이재영의 시민단체 정책비평’ 칼럼 가운데 “기업 사회 공헌? 자본의 광고 공헌?”을 보면 광고와 기사논조의 함수관계를 알 수 있다.


12월 4일자 <한겨레>는 참 재밌다. 1면 하단에는 “포항공과대학 20년, 포스코와 함께 세계 과학의 중심에 서겠습니다.”라는 통광고가 실렸다. 그리고 그 위에는 대기업 전문기자가 쓴 ‘포스코 모든 협력업체 4조3교대 근무 추진’이라는 사이드톱 기사가 실렸고, 17면에는 ‘포스코-협력업체 상생모델 도입’이 한 면 전체를 차지했다. 뭐, 이런 우연이 겹칠 수도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살펴보니, 30면에 논설위원이 쓴 ‘포스텍과 김호길 박사’가 또 있다.
- [이재영] 시민단체 정책비평 “기업 사회 공헌? 자본의 광고 공헌?”(레디앙, 12월 8일)





그래서 찾아보았다. <한겨레> 12월 4일자. “한 단계 격상된 대기업-중소기업 상생기업 사례로 주목된다. … 뉴 패러다임 모델은 … 노사 상생의 경영혁신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포스코 모든 협력업체 4조3교대 근무 추진’).”, “포항공대는 … 20년 만에 아시아 최고 수준의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으로 발돋움 했다(‘[유레카]포스텍과 김호길 박사’).” 이처럼 <한겨레>는 1면 광고와 함께 포항공과대학 20년의 축하와 기념을 기사를 통해 공공연히 나타냈다. 지난해 여름 포항건설노조가 포스코를 점거했던 그 당시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노동자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포항건설 노동자들의 절박한 외침이 공권력과 포스코에 의해 오히려 메아리치고 있는데, <한겨레>는 당당하게 포스코와 협력업체가 상생모델을 도입하고, 매우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였다. 1면 하단 광고와 함께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지난해 여름 포항건설노조가 포스코를 점거했을 그 당시, <한겨레>는 그나마 이야기했다. “주5일제 최대쟁점 ‘일용노동자만 소외’(7월 18일)”, “또 메아리없이 상처만 ‘하도급’ 치유 지금부터(7월 21일)”, “포스코 전방위 여론전…포항시장·언론에 손썼다?(7월 21일)” 등을 비롯하여 “단독”이라며 “포스코, 노무관리 문서서 ‘사용자’ 성격 드러내(7월 26일)”, “포스코 내부문건 통해본 ‘안정된 노사관계’ 실체는?(7월 26일)”, “경찰, 포스코에 ‘파업정보’ 넘겨(7월 26일)” 등의 기사로 말이다.


그러나 <한겨레>가 이야기하듯이 광고와 편집방향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여타 매체를 통해서 확인된 ‘말이 되지 않는’ 불변의 진리이다. 특히 광고라는 자본의 노림수가 작동하는 영역에서 광고가 기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한겨레>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결국 <한겨레>는 1988년에서 2006년까지 시간을 견디지 못하였다. 사회 민주주의운동과 언론의 독립이라는 애초의 가치를 결국 386세대의 거추장스러운 거들먹과 87년 체제의 종말을 눈으로 확인하는 지금 진보언론 영역은커녕 개혁언론이라는 상징조차도 과분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몰가치적 중립성이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발상


광고와 기사의 함수관계를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겨레> 기사는 정체되어 있다 못해 후퇴하고 있다. 진보적 의제, 아니 우리 삶과 생존권의 의제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난해도 그리고 그 전에도 민중들은 마지막 출구를 찾아 거리로 나온다. 지난 11월 22일, 29일과 12월 6일 진행된 ‘민중총궐기’는 언론매체에 의하면 민중들이 방화와 폭력, 그리고 불법으로 온갖 몹쓸 짓을 한 것이었다. <한겨레>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삶의 기본적 권리와 공공성을 저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문제를 폭발적으로 예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겨레>는 침묵했다. 11월 22일 민중총궐기를 다룬 23일자 <한겨레>는 “‘한-미 FTA 반대’ 7만여 명 시위 곳곳 큰 충돌”, “반 FTA 격렬 시위, 청사 5곳 문 뜯고 창 깨고”라며 전형적 언론매체의 집회관전평을 기사화했고, 사설을 통해서는 “정부-‘진보운동’ 갈등, 대화밖엔 해법 없다”라며 <한겨레>다운 해법을 제시했다. 온갖 사회의 문제를 더 이상은 지켜볼 수 없다는 농민, 노동자, 사회적 소수자 등의 행동을 ‘대화’로 풀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23일자 <한겨레>에서 다섯 면에 걸쳐 게재한 “한겨레 광고대상”을 보고 있자니 쓴 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결국 <한겨레>는 11월 24일 사설을 통해 “폭력은 시위의 호소력을 떨어뜨린다”며 드디어 수구매체와 같은 논조로 민중들을 가르치고, 호통치고 말았다. <한겨레>가 민중총궐기의 예고를 지나쳤다 하더라도 정치경제, 그리고 사회 구조 모순의 역학관계와 현재의 상황, 상식이 배제된 현실을 풀어나갈 수 있는 2차, 3차 총궐기의 시간이 존재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그 기회를 잡지도 아니 잡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3차 민중총궐기 이후 12월 7일 “‘반FTA시위’ 명동 일대 6차선 점거”라는 기사로 민중총궐기가 함의한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 외면하였다.


그리고는 12월 8일 <한겨레> 1면 톱기사는 다름 아닌 “[체험 르포]전경출신 기자, 다시 진압복 입다”이었다. 기자가 밝힌 글에 따르면 기자는 “국내 언론 사상 처음 시도한다는 설렘이 마음을 잡아끌었다”고 한다. 집회를 막기 위한 공권력, 더더군다나 최근에는 집회의 자유를 온갖 재갈을 물려가며 공안정국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한겨레>의 선택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특히 전경체험을 했던 기자는 인터넷을 통해서 친절하게 1차 민중총궐기는 집회취재의 ‘전통’이라며 “시위대와 경찰의 ‘중간’에 서서 격한 충돌이 일어나는지 확인하고, 더불어 교통 상황과 양쪽의 움직임 등을 나열하는 식이니까요. 이런 태도를 ‘중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라 말하며 그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고 고백했다. 집회취재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기자는 2차 총궐기 때는 농민과 동행하면서, 그리고 3차 총궐기 때는 기동대원들과 함께하면서 진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했다. 기계적으로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몰가치적 언론매체 태도의 강박이 만들어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집회 취재 현장에 있는 대상들과의 소통이 단지 어느 그룹에 속해서 그 정체성을 부여받는 순간 의미를 갖게 된다는 발상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의문이다. 민중총궐기를 취재한다면 최소한 민중총궐기가 담고 있는 의미와 사회적 현실, 그리고 현재 한국사회의 소통방법에 대해서 발언해야 하지 않았을까? 집회에 대해서 취재한다면 최소한 왜 집회가 불허되었고, 전경과 집회 참가자가 왜 도로에서 거리에서 마주하고 있을까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해야하지 않았을까? 희롱하면 그렇다. ‘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면 대통령의 하루도 체험을 해보고, 대통령의 어려운 점 등은 무엇인지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국내 언론 사상 최초’로 말이다.


이는 결국 <한겨레>가 진보적 언론매체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사회현안을 접근하는 방식과 내용이 과연 <한겨레>가 정론지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겨레>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 문제에 대한 고발을 넘어 이 사회 안에서의 다양한 모순관계와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은 배제한 채, 그저 사회적 약자의 권리는 동정과 시혜로 보호받아야 한다며 주장하거나 혹은 외면해야하는 의제로 전락시킬 것인가. 그리고 갈등이 고조되면 정부와 대화로 풀어야 하고, 따라서 정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차근히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사회 문제를 봉합할 것인가. <한겨레>가 읽고 있는 사회 문제가 과연 진보적이며 일상적인가를 되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사회의 진보적 의제를 공론화하고, 다양한 사회적 불합리와 권위, 그리고 권력을 해체하기 위한 방식과 접근이 과연 삶의 가치들과 소통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 또한 필요하다.


‘탈’을 쓴 것이라면 벗고, ‘착각’이라면 정신 차려야…


<한겨레>의 협찬광고비율이 지난 해 동기대비 60% 상승했다고 한다. 결국 돈이 된다면 정부의 거짓말을 선전해주는 매체로 전락하기도 하고 자본과 기업의 달콤한 유혹도 뿌리치지 못한다. 부동산, 투기 광고도 서슴지 않는다.


또한 몰가치적인 언론매체 태도는 진보적 의제 자체를 생산하지 못하고, 결국 이는 <한겨레>의 후퇴로 이어진다. 창간의 가치는 무색하고, 진보하지 못하였다. 더더군다나 기계적 형평성이라는 자기 검열적 태도는 <한겨레>가 진보는커녕 개혁언론매체의 자격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한다.


최근 <한겨레> 노조에서 발간하는 <진보언론>을 보면 <한겨레>가 진보의제를 <경향>에게 선점 당했고, <한겨레>가 과연 ‘진보’인가라며 ‘착각하지 말자’라며 서로에게 호통을 친다. 내부에서의 비판적 평가는 긍정하나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것은 <한겨레>는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의 ‘탈’을 쓴 것이라면 벗어야할 것이고, ‘진보’라 ‘착각’하고 있다면 정신 차려야 한다. 이것이 <한겨레> 창간의 가치와 지향을 그나마 복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라는 것을 <한겨레>는 알아야 한다.


※ 의문이거나 혹은 팁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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