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는 탐욕의 대명사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 내면에 있는 무한대의 욕망을 빗댄 말일 뿐 자신들의 황금기가 도래했는지 알 턱이 없는 돼지는 그저 돼지일 따름이다.
1992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어느 덧 중년이 되어버린 자신에게 바치는 영화라는 장편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의 주인공은 그러나 좀 복잡한 돼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의 잔혹함을 잊기 위해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된 포로코 로소. 그는 외딴 무인도에 은둔하며 붉은 비행기를 몰고 하늘의 해적을 잡는 현상금 사냥꾼이자 “애국 따위는 인간들이나 많이 하라”며 돼지는 조국도 국경도 없다고 중얼대는 무정부주의자이고 다시 공군으로 돌아와 국가의 스폰을 받으라는 제안에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로 남겠다.”라고 호언하는 ‘국가비협조죄’에 ‘나태한 죄’까지 더해진 사상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포로코는 옛 전투에서 잃은 동료의 부인이자 지금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마담 지나와 술잔을 기울이며 “좋은 친구들은 모두 죽는다”고 쓸쓸해하는 로맨티스트 돼지다. 영화 후반, 지나가 위험한 결투를 말리며 “당신이 돼지갈비가 되는 장례식은 싫어요.”라는 애틋한(?) 고백을 하지만 “날지 않는 돼지는 돼지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그는 돼지가 되지 않고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자의 비애를 갖고 있다. 그러니 황금 돼지들 틈에서 날지도 못하고 마법도 모르는 나는 이불 뒤집어쓰고 붉은 돼지띠를 맞아『붉은 돼지』나 봐야겠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