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스산한 겨울, 혈혈단신으로 대추리에 찾아와 지킴이로 1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마리아(28)는 여전히 민박집을, 대추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학 보낸 셈 치라며 들어온 대추리
그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책 읽고 소설을 쓸 요량으로 집 근처 작은 공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삼성 핸드폰을 만드는,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은 재하청 업체였다. 하지만 2005년 삼성이 중국에 공장을 지으면서 하청이 줄자 마리아는 ‘단칼’에 잘렸다고 한다.
공장을 다니면서, 잘리고 나서는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땅과 자유’라는 공부모임에 나가고 있었어요. 녹색평론이나 이반 일리치의 사상에 대해 공부하는 모임이었는데 거기서 2005년 7월인가 전국순례 중인 대추리 주민들이 대구로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주민 중 한 분이 마이크를 잡았는데, 미군기지를 만들려는 이 황새울 들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거기서 살아온 이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씀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여기를 꼭 한 번 와봐야겠다, 저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하던 일이 있어서 당장은 못 가겠더라구요. 그래서 대구백화점 앞에서 10월 초까지 2주에 한 번씩 1인 시위를 했죠. 내가 1인 시위를 하니까 ‘땅과 자유’ 모임에 나오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같이 나와서 옆에서 음악회를 열어줬죠. 레코더, 캐스터네츠 같은 것 들고 나와서…. 옆에서 인형 팔던 아주머니나 과일 팔던 아저씨도 얼굴이 익자 관심을 가져주고, 다리 아프니 앉아서 하라고 의자도 가져다주고, 군것질 거리도 사줘서 피켓 들고 오뎅 먹으면서 1인 시위를 했죠.
나는 그 자리에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 생기고, 내 목소리, 주민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세상의 불의에 맞서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됐죠. 그게 굉장히 놀라웠어요. 다들 돈 쓰러 나온 사람들뿐인 번화가에서 대추리뿐만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때 모인 에너지가 자신을 대추리로 올라오게 한 것 같다고 그녀는 말한다. 아르바이트로 돈이 조금 모이자 마리아는 새만금 계화도를 거쳐 평택 대추리로 향했다.
대추리에 와서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분이 잘 때는 있냐고, 없으면 우리 집에서 자라고 하시는 거예요. 술을 마시고 새벽 두 시가 넘어서 그 집에 자러 갔는데 그때까지 잠을 안 주무시고 이불까지 펴놓은 채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 집에서 며칠을 묵었는데 할머니는 허리 디스크로 몸이 불편하시고, 할아버지는 위암으로 투병 중이셨던 거예요. 당시에는 몰랐죠. 주민들이 두 노인네 고생시키지 말고 ‘평화바람’(문정현 신부와 함께 대추리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단체)이 맡아라, 그래서 ‘평화바람’과 같이 지냈죠.
일주일 정도 있다가 내려갔는데 이른바 ‘대추리 병’에 걸려 며칠을 앓아누워야 했어요. “여기서 살다 죽고 싶다”는 말이 자꾸 귀에 어른거리고. 11월 23일(2005년)에 국방부의 강제수용 결정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짐을 싸서 다시 들어왔죠.
부모님에게 강제철거를 몸으로 막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죠. 대신 부모님도 농사를 지으니까 여기 얘기를 들려줬죠. 갯벌을 농지로, 일등미, 특등미가 나오는 땅으로 만들었는데 그 땅을 미군에게 다 주려고 한다, 그 분들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러 가는데 이게 다 공부 아니겠냐고. 유학 보낸 셈 치라고 했죠.
우리 집에서는 내가 ‘들소리 방송국’이죠. 사진을 찍어서 부모님에게 보여드리고, 포클레인이 수로를 이 지경으로 파헤치고 있다, 이 할아버지가 상처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여자 친구가 생긴 바로 그 분이다, 이분이 이장님 어머니다….
덕분인지 집 근처에 살던 전국농민회 간부의 민주노동당을 도와달라는 부탁에 아버지는 민주노동당 당원까지 되셨다고 한다. 물론 본인은 당원이 뭔지 별로 관심도 없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월드컵 때 한국이 져서 축구가 그만 나오니 좋다”고 하실 만큼 빨간 물이 많이 들었단다. “박정희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지만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아온 세월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에 대해, 사회가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을 하고 의식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것 아니겠냐는 짐작이다.
평택에 들어왔을 때는 한창 평화촌 만들기를 할 때였어요. 지킴이들이 하나 둘 마을로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죠. 같이 빈집 청소하고 도배도 하고 찻집을 만들겠다고 해서 같이 준비하고. 그러던 중에 앞으로 마을에 사람들이 계속 찾아와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묵을 곳이 필요하다는 말에 ‘평화바람’과 같이 이 집을 청소하고 마을 분들이 전기도 연결해주고 보일러도 손 봐주셔서 여기를 민박으로 삼고 내가 맡게 되었죠.
아마 이 민박집을 거쳐 간 사람들이 몇 백 명은 될 거예요. 나름대로는 이 집을 자본주의 시스템과는 동떨어진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죠. 숙박료도 알아서 통에 넣게 하고, 집에 있는 것은 다 맘대로 먹어도 되고, 이 집을 꾸미면서도 돈 한 푼 안들이고 꾸몄죠. 기억에 남는 손님은 민변 변호사 한 분이었는데, 가족이 함께 와서 하룻밤을 잤어요. 다음날 왠지 이 집에서는 그래야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딸이랑 설거지에 청소까지 싹 하고 가셨죠. 국회의원이나 조지 보베(프랑스의 유명한 농민운동가), 신디 시엔(미국의 이라크 반전시위로 유명한 평화활동가) 같은 유명한 사람도 많이 왔다갔는데 뭐 기억에 남는다기보다는 신경이 좀 쓰였죠.
우리는 갈 곳이 있기에 끝까지 싸워야
그래도 대추리에서의 2006년은 10년 같은 한 해였고, 행정대집행이 있던 지난 해 5월 4일은 문정현 신부의 말마따나 지날 것 같지 않던 하루였다. 대추리에서 힘들었던 일을 묻는 질문에 그녀도 5월 4일 이야기를 한다.
힘들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대추분교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는 정말 힘들었어요. 내가 왜 여기를 왔나, 왜 할머니들과 정이 들었나 싶었죠. 땅바닥을 뒹굴며 우시던 분들, 정신을 놓아버리신 분들 속에서 나도 충격을 많이 받았고.
바로 전날 집 앞까지 씨를 뿌렸던 들판,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지킴이들과 주민들이 농사일 하는 모습 보이던 곳이 다음날 문을 여니 철조망이 쳐져있고, 포클레인이 땅을 파고, 군인들이 숙영지를 만들고…. 나조차도 저 들판에 갈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는데 주민들은 어떻겠어요? 아마 한 달 동안은 주민들이 넋이 나갔었어요. 주민들은 해질녘이면 의자를 갖고 언덕에 올라가 들판만 바라보고.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다지만 달라진 건 없어요. 우린 지난 1년 간 살아온 것처럼 계속 여기서 살아가는 거죠. 주민들은 지금까지 싸워 온 것만으로도 존경스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큰 일을 한 거라고. 오히려 우리가 부족한 게 없었는지 반성해야죠.
주민들과 이심전심으로 살아온 지킴이들. 하지만 그들은 업보처럼 맞닥뜨린 싸움에 내몰린 주민들과도 행사 때마다 대추리를 찾는 이른바 외부세력과도 조금 다른 2006년을 보내지 않았을까?
강제철거가 들어오는 날은 주민들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 날이에요. 하지만 지킴이들은 여기서 쫓겨나도 돌아갈 집이 있죠. 그래서 주민들이 더 많은 공포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우리는 여기서 나가도 거리에서 싸울 수 있지만 주민들은 이 집이 부서진 다음을 생각할 수가 없죠.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쫓겨나도, 이 집이 부서져도 싸움을 끝낼 수는 없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형식으로든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주민들이 여기서 농사를 짓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대로 사는 것이지만 내가 여기서 농사를 짓는 건, 마늘을 심고 김장을 담그는 건 먹을 걸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움의 일부이자 나 자신이 희망을 찾는 행동이에요. 작년 초겨울에 마늘을 심는데 주민들이 아주 몇 분만 마늘을 심고 다들 마늘을 안 심었어요. 겨울에 마늘을 심으면 내년 여름에 캐거든요. 먹을 수 있을 지 없을 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마늘을 안 심는다는 건 농사를 포기했다는 거죠. 그걸 알고부터 나는 반드시 마늘을 심어야 했어요. 상황이 암담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해오던 것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싸움이라는 것을 마늘을 심는 걸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농사일 하나 하나가 내게는 메시지가 된 거죠.
생명, 평화, 이런 것들이 저 들판에서 철조망을 걷어낸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하루하루를 살면서 생명과 평화를 생산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고, 거기서 희망을 찾고 용기를 얻는 거죠.
여기서의 삶은 바로 나의 언어
처음 대추리에 들어올 때는 굴삭기가 집을 부수려하면 몸으로 막는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는 그녀에게 주민들과 함께 했던 2006년은 자신의 언어를 찾는 시간이었던 듯하다.
대추분교가 무너지던 그날 저녁 촛불행사에서 이제 10만 명 정도가 들고 일어날 거란 이야기가 나왔죠. 오늘 일이 전 세계에 알려졌고 모든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됐으니 이제 모두들 우리와 함께 싸울 거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되지 못했죠. 평화대행진 때도 10만 명을 목표로 했는데 얼마 오지는 않았어요. 그런 부분에서 주민들의 실망이 조금씩 쌓여간 것 같아요. 나는 운동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이 자기 말을 잘 지키지 못할 뿐더러 그 사람들의 말이 너무 기득권, 권력의 말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해요. 기자회견을 많이 하지만 언론에 잘 나오지 않잖아요. 그런데 나를 여기에 오게 했던 말은 기자회견에서 나왔던 거창하고 추상적인 말들이 아니라 주민들의 육성이었고, 그분들의 고통과 억울함에서 나온 말들이었어요.
여기서 산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하나의 언어예요. 누군가의 입에서는 쉽게 나왔다가 금방 잊히는 말도 있지만 여기에서의 말은 그래서는 안 되죠. 누군가는 이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진실을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주민들이 이주를 한다고 해도 이주해서 어떻게 사는지 계속 지켜볼 사람, 그들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알려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어요. 그렇게 해왔던 사람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대추리에서 있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 친할머니가 아주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언뜻 언뜻 이야기를 듣다보면 먹을 게 없어서 몽고까지도 갔다 왔다고 하시고, 막내 삼촌을 낳고는 못 먹어서 한동안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잠깐 멀었다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너무 힘든 기억이니까 이야기를 잘 안 해주셨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 할머니에게서 들어야 할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듣고 있는 거죠.
그녀는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얼마 전부터 닭을 키우기 시작했고, 조만간 집에서 염소도 얻어와 기를 생각이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무언가를 심고 보살피고 가꾸며 살아오신 분들이 미군기지 싸움을 하다 보니 밟히고 위협당하고 빼앗기는데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이란다. 이제 그분들에게 그분들이 평생 했던 일들을 상기시키는 것이 요즘 자신의 임무라며 부러 떠들썩하게 닭장도 짓고 비료 없이 배추를 키운다고 소문도 내고는 한다. 그러면 주민들 반응은? “아주 좋다”며 그녀는 활짝 웃는다. 그녀의 씩씩한 웃음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을 대추리의 마늘을 올 여름 꼭 먹어보고 싶다.
인터뷰 강곤 | 기자
사진 박김형준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