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한상희의 쇳소리] 사법서비스에 대한 접근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다. 당장에야 어떠하든 결국에는 이 세상에 정의가 승리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어디 그런가? 하냥 내버려 두어도 정의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우리 사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몇 가지 사건들은 사필귀정을 떠올리며 정의를 낙관하기에는 아직 성근 우리의 세간사를 보여준다. 한 일간신문에서 신문받는 피의자의 권리는 어떤 것이 있는가를 자세히 알려주던 검사는 검찰조직 내부에서 수사방해의 비아냥에 시달리며 한직으로 쫓겨났다가 결국 옷을 벗어야 하게 되었다. 이어 십여 년 간 교수재임용의 부당함을 외치던 전직 교수는 자신에 패소판결을 내린 부장판사에게 석궁으로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지방에서 유지들과 유착하여 유전무죄의 악습을 선도하던 전직판사는 ‘법률의 미비’라는 틈새를 타고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소위 법조삼륜이 활약하는 우리 사법의 모든 영역에서 줄이어 터진 이 사건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예외 없이 법을 그들의 것으로 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형사피의자의 권리는 가장 기초적인 인권이다. 그래서 수사검사와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피의자의 권리는 체포될 당시부터 국가가 피의자에게 상세히 알려주어야 할 항목이 된다. 하지만, 이런 국가임무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던 검사에게 조직은 좌천과 사실상의 해직이라는 부담을 강요한다. 국민의 인권보다 조직의 편의가 우선하고 그래서 국민위에 군림하는 조직의 권력이 우리 검찰의 지향점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석궁테러’라는 이름이 달린 김명호 교수의 사건은 더욱 미묘하다. 외견상의 행위는 폭력이었기에, 그것도 사법을 향한 ‘테러성’ 폭력이었기에 일단은 “비난받아 마땅하다.”라는 전제가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그렇다면 일반인의 일상적 언어로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법정의 닫힌 마음은 어떤 폭력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어떤 판사는 그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본인소송을 고집하는 바람에 패소를 자초하였다고 논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인의 상식적 진실이 형식적 증거법칙이라는 터널을 지나면서 ‘실체적 진실’로 변용되고, 그 조차도 형식적 법률주의의 법리논쟁 속에서 주변적인 다툼 정도로 왜곡되는 현실에서 변호사를 ‘산다’고 한 들 그와 법원 사이를 가로막는 단절공간을 메워 낼 수 있었을까?


사필귀정은 세상사(=事)와 정의(=正)가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이 양자를 연결지우는 매개가 존재하여야 한다. 세상사를 정의로 돌려놓는(歸) 또 다른 인간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법체계는 이를 위해 법관을 만들고 검사를 고용하고 변호사를 둔다. 정의를 법의 말로 바꾸고 이를 다시 일상의 행위로 되살려내는 휴먼 인터페이스로서 이들의 역할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법을 서비스라고 하고 그에 대한 접근이 보장되는 것 자체를 인권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민들이 법과 정의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순간 그들은 입을 막고 귀를 닫는다. 그리고 이 답답한 속에서 우리들은 또다시 외친다. 사필귀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