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주거권, 공간의 공공성을 둘러싼 권리

[특집] 문화적 관점에서 본 주거권

집이 뭐죠?” 한 아파트 건설업체의 TV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질문이다. 부동산 투기, 부동산 대란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하고, 부동산 정책의 실패로 정권 교체까지 이야기되는 곳, 대한민국. 하지만 우리는 “집이 뭐죠?”라고 질문해 본 적이 거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집이 뭐죠?”라는 질문은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다. “집이 뭐기는….” 집은 재산이고, 가능다면 확실한 재테크의 수단이라고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자연스럽게 강요받아 왔다. “돈이 있으면 우선 집을 사라!”


한국 사회에서 집은 매우 특별한 상품이고 재산이다. 어느새 한국 사회에서 집은 ‘보통 사람’(?)에게 있어 삶의 희망이자 목표로서 존재한다. 집은 살벌한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소한의 행복과 노후를 보장해주는 실질적인 보험제도이고, 그 어떤 임금노동보다도 충실하게 화답해주는 경제적 보충물이다.

몇 년째 주민등록 등재와 최소한의 주거권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포이동 266번지, 낮은 지붕 너머 '부와 성공'의 상징 타워펠리스가 보인다. 사진 | 박김형준


그래서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청춘과 일상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에 자발적으로 헌납한다. 결국 집의 소유 여부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고,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지표로까지 작용한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에게 집은 삶의 철학이자 종교이며 신화 그 자체이다.


집의 신화는 진보진영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집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한국 사회는 이데올로기를 넘어 오직 ‘집을 가진 자’와 ‘집이 없는 자’, 또는 ‘부동산 거품이 지속되기를(집값이 오르기를) 바라는 자’와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를(집값이 폭락하기를) 바라는 자’의 경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집’의 사회적 의미를 찾아서


집에 대해, 주거권에 대해 문화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집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 자체를 새롭게 상상하는 것이다.


집은 재산이나 상품이기 이전에 우리의 ‘일상과 공동체를 구성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다. 우리의 삶에서 집은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1차원적이고 물리적인 기능을 넘어, 삶의 다양한 가치와 권리를 구성하고 소통하기 위한 공간이다. 집은 소유하고 판매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기’ 위해 존재하며, 그 삶은 단순한 생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 권리, 다양한 삶의 가치를 발현하고 소통하며 공존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집을 포함한 모든 사회 공간의 배타적 사유화, 그리고 이를 통한 사적 공간의 상품화를 강요한다. 자본과 서구 근대화를 통한 공간의 과도한 사유화와 이에 기초한 불평등 구조는 사적 공간의 보장이 아니라 오히려 ‘사적 공간과 주체’, ‘사적 공간 간’의 격리와 배제를 낳았다. 집을 비롯한 사적 공간의 상품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주거 공간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과 주거권의 배제’, ‘공간의 일방적인 사유화와 독점에 따른 사회적 공공성 훼손 및 비효율성 가중(구획된 과밀 공간의 생산과 빈공간의 방치)’ 등의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자본주의는 사적 공간, 아니 모든 공간의 배타적 사유화(그리고 기계적 분할을 통한 획일화)를 강요하며, 역설적이게도 집을 비롯한 사회적 공간에 대한 배타적 사유화는 모든 공간에 대한 인간의 접근권과 사용권을 심각하게 배제시킨다.


따라서 문화적 관점으로 주거의 사회적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경제적 효율성에 기초한 집의 소유 여부만이 아니라 집의 사용과 주거의 내용에 주목하는 과정이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공간의 배타적 사유화, 사적 공간의 상품화를 넘어 사적 공간 내, 사적 공간 간의 사회적 소통과 공존이야말로 문화적 관점에서 주거를 고민하고 사용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가 집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의 획득을 삶의 가치와 목표로 강요하고, 이를 위해 모든 일상의 희생을 요구하지만, ‘소유’는 주거 공간에 접근하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배타성에 기초한 소유 과정은 지금의 부동산 독점, 집 값 폭등, 노숙인의 확산 등과 같이 ‘소유’를 통해 공간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접근과 사용을 제한하고 차별한다.


결국 문화적 관점으로 집과 주거에 접근하는 것은 집을 둘러싼 ‘소유’라는 환상 자체를 해체시키는 과정이다. 소유는 공간의 사용과 향유를 위한 수많은 접근 경로 중의 하나이자 접근 단계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소유의 유무를 넘어 집이라는 공간 안팎의 실질적인 일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에 대한 과도한 소유욕과 상품화로 인해 소모되는 수많은 삶의 가치와 사회적 비용을 되돌려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주거 문화를 둘러싼 사회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


집과 주거에 대한 문화적 접근, 다시 말해 문화적 다양성과 공공성에 기초한 주거문화의 상상력은 ‘집-거주-생활-지역-공동체’라는 사회적 장(field)의 특이성과 관계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거를 둘러싼 삶의 가치와 권리를 사유하게 한다.


집의 소유 여부를 넘어 주거의 권리로 접근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거 공간 내의 삶의 가치와 주거 공간 간의 관계 맺기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주거 단위, 생활공간, 지역 공동체 내의 공존과 소통을 의미한다. 주거권은 담과 벽 안의 배타적인 소유 공간 몇 평으로 가두어질 수 없다. 주거권은 다양한 일상의 공간들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수많은 사적, 공적 공간들과 중첩되어 있다. 주거권은 우리의 일상 공간을 둘러싼 물질적, 비물질적 권리를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문화적 관점에서 주거권은 필연적으로 ‘집’이라는 경제적, 물질적 담장을 허물고 삶의 가치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권리, 공간의 공공성과 만난다. 도로, 공유지, 각종 공공기관, 지역문화시설 등 지역 공동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공간들은 우리의 주거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주거권은 집에 대한 개인적 소유 여부, 주택의 물리적 보장 여부를 넘어 삶의 공간을 둘러싼 행복하게 살 권리이기 때문이다.


주거권의 확장은 주택정책에 대한 공공성 확보만으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 공간에 대한 자본의 철저한 독점 속에서, 주거 공간의 물리적, 물질적 확보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주거권은 물질적 권리인 주택의 확보와 동시에 주거를 둘러싼 삶의 다양한 문화적 권리와 상호보완적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주택의 확보만큼이나 주거 환경을 둘러싼 사회적 공간(하드웨어+소프트웨어)에 대한 접근권과 사용권이 동시에 보장되어야 하고, 이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지역 공동체가 소통하고 공존하는 사회적 공간 자체에 대한 공공성 확보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자본주의와 토건국가의 개발주의는 주택의 소유와 지역 내 문화공간의 공공성을 철저하게 분리한다. 그리고 그 분리는 결국 새로운 상품 공간의 창출과 주거 환경의 공공성 해체로 귀결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을 가장 극단적인 밀도로 미분화, 정형화하고 각각의 면적을 철저하게 유료화한 주거문화의 결과가 바로 살벌한(!) 아파트 단지이듯이, 주거 환경 내에서 문화공간은 언제나 문화와 예술의 사회성이 거세된 고밀도의 ‘문화상품전시장’(문화의 상품화) 또는 ‘상업문화공간’(상품의 문화적 재배치)으로 재구조화된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삶의 일상적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주거권은 이처럼 일상의 공간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접근권과 사용권을 둘러싼 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자본이라는 권력에 의해 구획된 공간구조에 배치되어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구획된 공간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자기 결정적인 삶의 흔적과 의미를 만들어 갈 것인가?” 공간의 정의와 권리를 둘러싼 주거권 투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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