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학교가 공정하다는 믿음을 버려~

교육격차, 해법은 평등을 위한 역차별

꼴에 교육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물론 대학 다닐 때에는 운동한다는 핑계와 잘난 맛에 공부와 담을 쌓아서 항상 밑바닥을 헤맸지만 (그땐 왜 그랬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단지 교육학을 공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끔 아주 가끔 물어온다. “공부 잘 하는 비결 있으면 알려줘”라고.


그러면 잠시 망설이면서 상대를 살핀다. 접대성 발언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사실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계산이 오고간다. 만약 대충 듣기 좋은 말로 넘어가고자 한다면 “딱히 왕도는 없지만, 열심히 꾸준히 하면 돼요.”라고 얼버무린다.



부모의 능력이 곧 아이의 성적


하지만 제대로 말해도 된다고 견적이 나온 경우에는 “대학은 어디를 나오셨죠? 잘 사세요? 연봉이 얼마죠? 영어 잘 하세요?”라고 되묻는다. 그리고는 “아이의 성적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좌우한다는 것이 교육학의 상식입니다.”라고 말한 뒤, 요즘 공부 잘 하는 아이의 일반적인 특징 또는 조건을 쭉 알려준다.



대졸 이상의 엄마 아빠, 전문직 이상 아빠, 돈 많이 버는 아빠
영어되는 엄마, 집에 있는 엄마, 입시정보에 빠른 엄마, 정보망과 인맥이 있는 엄마
무턱대고 비싼 사교육을 시키는 게 아니라 사교육시장에서 현명한 소비를 하는 엄마
좋은 동네, 다른 건 몰라도 공부와 대학입시에 관해서만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가정
독립적이긴 하나 반항적이지 않은 아이, 자신감 있는 아이, 집중력이 뛰어난 아이
전문직 이상을 꿈으로 하는 아이(교사, 간호사, 경찰, 어른 등 평범한 꿈이 아니라)
간혹 이기적인 아이, 함께 나누는 것보다 경쟁에서의 승리를 더 좋아하는 아이
TV와 컴퓨터 게임을 자제할 줄 아는 아이, 오래 책상에 앉아있는 아이
면학분위기가 괜찮은 학교, 오래 공부시키는 학교
교사 말을 잘 듣거나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아이



물론 이 조건들이 각기 무엇을 뜻하는지도 풀어서 말한다. 그리고 머리 똑똑하거나 IQ 높게 나왔다고 공부 잘하다고 믿으면 부모로서는 빵점이라고, 흔히들 하는 머리는 똑똑한데 노력은 안 하네~ 따위의 말이 참 거시기하고 개그스럽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가장 최적의 조합은 ‘돈 많이 버는 아빠와 영어되는 엄마’, 또는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라고 요점 정리하면서 끝맺는다.

사진출처 | 전교조 서울지부 홈페이지

여력이 있을 경우에는 학교가 공정하다느니, 잘 살지 못해도 열심히만 하면 학교에서 1등 할 수 있다느니,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느니 하는 것들이 다 거짓말임을 일러두면서 “요즘은 아이가 공부 못하는 것이 아이 탓만은 아닐 수 있거든요. 괜히 아이 잡거나 들들 볶거나 뺑뺑이 돌리거나 해서 아이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화풀이하지 말구요, 하고 싶은 거 하게 두세요. 마음 비우는 게 좋아요. 오히려 그러다보면 아이가 공부 잘 할 수도 있긴 하죠.”라는 별책부록을 선물하기도 한다.



사교육의 효과는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나…


신자유주의 시대, 잘 사는 집과 못 사는 집의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그리고 교육 분야에서는 그 차이가 사교육으로 나타난다. 잘 사는 집은 사교육에 대한 정보를 잘 분석하여 아이에게 딱 맞는 맞춤형 사교육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싼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비싸도 아무 문제없다. 돈이 되니까 괜찮다. 물론 이 와중에 엄마는 평범한 외식을 한다. 부모의 과소비는 아이를 내팽개친 졸부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못 사는 집은 정보도 없지만 돈도 없다. 사교육은 돈에 맞춘다. 그렇게 잘 사는 집 아이와 못 사는 집 아이의 사교육은 다르며, 그 중심에는 돈이 있다.


그런데 재밌게도, 아이의 성적에 미치는 사교육의 효과는 없다. 아무래도 사교육이 문제가 되다보니 교육학자들이 이런저런 연구와 조사를 여러 차례 하였는데, 그 때마다 효과는 거의 없거나 아주 적은 것으로 나왔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들은 사교육 효과가 대단한 것으로 믿고 있는데, 실증적으로 연구해보면 없거나 미약하다고 나오니 말이다. 어찌된 일일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사교육이란 것이 자기 혼자로는 효과가 없지만, 부모의 경제력이나 정보력, 사는 동네,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등과 결합하면 효과가 발휘되는 경우이다. 이렇게 본다면 똑같은 사교육이라고 하더라도 가정환경에 따라 결과는 다를 수 있다. 둘째, 사교육이 정말 효과가 적은 경우이다. 그러니까 사교육이란 것이 모두 양질이 아니라 극소수의 우수 사교육과 대다수의 그냥 사교육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사교육 전체적으로 보면 효과가 적게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효과 있는 극소수의 우수 사교육을 누가 취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아무래도 돈과 정보력이 이를 좌우할 것이다. 물론 돈과 정보력은 가정환경의 다른 이름이긴 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위의 두 가지가 맞는다면, 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사교육에 돈을 지출할까? 효과가 의심스러운 사교육을 위해 허리를 졸라매고 있을까?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사교육은 아이의 ‘승리’를 위해서도 받지만, ‘불안’해서 받기도 한다. 옆집 아이도 받는데 내 아이만 받지 않으면 뒤쳐지지 않을까 불안하여 받는 경우가 어쩌면 더 많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사교육의 또 다른 얼굴은 불안을 먹고 사는 괴물이 아닐까. 또한 아이의 사교육을 위해 돈을 대는 부모는 ‘죄수들의 딜레마 게임’에 나오는 죄수일 수도 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부모를 죄수로 만들었다. 부자가 아닌 부모는 더더욱 아이에게 죄를 짓도록 만들었다. 돈 없는 것도 서러운데 아이에게 뭔가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 같고 결과적으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고스란히 대물림하는 것 같으니, 참 살맛나지 않는다. 이러니 아이 낳고 싶을까?



그러면, 어떡하지…


가정환경에 따라 성적이 결정되는 사회, 그리고 대물림되는 사회. 문제다. 상류층이나 여론주도층 입장에서야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겠지만,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칫하다가는 평생 자식으로부터 욕먹고 살아야 한다. 왜 엄마 아빠는 부자가 아니냐고, 왜 평범하냐고, 그래서 지금 내가 피곤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런 만큼 대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책은 뭘까. 답은 역차별이다. 그것도 빠른 시기부터 역차별이 이루어져야 한다. 돈으로 성적과 학력을 사는 시대이니 만큼, 돈의 힘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 돈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차단하기란 만만치 않다. 벽을 두를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모두가 고르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 차별이 적어지면 근원적으로 해결되나, 이는 교육 분야에서 해볼 수 있는 대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학교의 노력만을 이야기할 때에는 차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게 역차별이다. 누구는 돈 많고, 누구는 없거나 적으면 어떻게 할까? 누구는 50미터 앞에서 뛰고, 누구는 출발선에 서 있으면 어떻게 할까? 50미터 앞에 서 있는 아이를 출발선으로 끌고 올까, 아니면 출발선에 있는 아이를 50미터 앞으로 데리고 갈까?


아이는 우리 나이로 8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이전에 너무 많은 일들이 아이에게 벌어진다. 누구는 엄마 아빠 잘 만나서 돈으로 도배질을 하고, 누구는 그냥 자란다. 돈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평범한 아이도 영재(?)로 만든다. 일류대 가는 절대반지를 살 수 있다. 그리고 절대반지를 낀 아이는 초등학교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확실하게 그 힘을 만방에 고한다. 적어도 결혼하거나 첫 직장을 가질 때까지 쭈욱~. 물론 돈 없어서 그냥 자란 아이, 절대반지가 뭔지 구경도 못한 아이도 계속 그냥 쭈욱~ 간다. 운명은 이미 결정된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부모가 자식교육 한다는 데, 그걸 못하게 할까. 그래서 6년 동안 아무 것도 못하게 할까. 무슨 독재국가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하나.


학교에 돈의 힘이 발휘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학교 다니는데 돈 내야 한다면 그래서 돈 없어서 공부 못하는 체제라면, 돈 안 내도 학교 다닐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돈 없는 부모 슬하에 태어나 교육적 지원을 받지 못한 아이에게는 취학연령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집중적으로 보육과 교육 지원이 있어야 한다. 특히, 사실상 방치되어 있는 취학 전 6년 동안은 보다 파격적인 관심과 지원이 요구된다. 다른 국가들이 학교교육의 평등을 위해 무상의무교육, 단선형 학제, 평준화, 소외계층에 대한 집중 지원 등 역차별 정책 등을 실시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간혹 가다 역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차별 맞다. 하지만 평등을 위한 차별은 정의롭다. 만약 차별이 싫으면, 자기 아이의 보육과 교육부터 손 놓아야 한다. 돈 없어 보살핌 받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하는 다른 아이와 자기 아이가 차별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하는 자가 정의인 것도 명백한 현실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