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교육이란 상품을 소비하는 자본

교육 공공성과 교육권


주거권, 뉴타운에서 길을 잃다

교육권, 역차별을 말하라



‘못 배운 게 한’이란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한 평생 고생하며 번 돈을 OO대학에 쾌척했다는 미담 기사를 볼 때마다 그 분들이 겪었을 교육에 대한, 교육에 의한 차별과 불평등, 나아가 수모와 멸시가 얼마나 컸을 지를 어림짐작하게 된다.
한국은 학벌사회다. 이 말은 한국에서 교육이 부의 세습과 빈곤의 대물림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란 말이며,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교육은 의무이자 권리이고 책임이다. 그러나 교육문제에서 횡횡하는 시장주의, 공교육의 사망선고, 조기영어 열풍과 생계를 위협하는 사교육, 교육이 나서서 양극화를 구조화 하는 현실에서 정작 교육의 내용은 반세기 전 국가주의 교육을 답습하고 있으니, 교육권이 설 자리는 좁기만 하다. 월간 <사람>은 교육권의 원론적인 내용보다 교육권이 처한 이러한 현실을 진단했다.


교육이란 상품을 소비하는 자본
학교가 공정하다는 믿음을 버려~
양극화를 재촉하는 조기영어교육
교실에서 국가는 떠나라
충성맹세를 가르치는 이들에게 묻노니...
빈곤과 장애, 그리고 새로운 교육소외






이 사회에서 공교육은 늘 위기였고 불만의 대상이었다. 동시에 계층 유지, 상승의 사다리라는 기대감 속에서 사람들은 학교를 거부하지도 못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이렇게 공교육, 달리 말해 학교는 대다수 한국 사람에게 ‘애증’의 대상으로 군림해왔던 셈이다.



소비자 중심의 맞춤형 교육?


95년 김영삼 정부는 ‘공교육의 위기’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으며 교육시스템을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맞는 것으로 뜯어고치겠다고 선언하였고 개혁의 청사진을 제출했다. 공교육을 정권유지 수단 정도로나 여기던 과거 정부와 달리 문민정부답게 국민이 원하는 교육을 위해 전화번호부처럼 두꺼운 보고서를 연이어 내놓는 수고와 재정투자를 정부는 아끼지 않았다. 공교육에 대한 개념과 시스템을 ‘시장주의’적 관점에 따라 확 바꾸려는 시도가 국가정책 차원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이 때라 할 수 있겠다. 국민을 훈육과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인간 위에 군림해온 국가주의 학교체제에 신물이 난 국민들에게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을지 모른다.


소비자주권론을 내세워 공급자 위주의 획일적 교육서비스 강요가 아닌 수요자 중심으로 맞춤형 교육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 시장주의 교육개혁을 아우르는 핵심이었다. 이건 ‘국민’들에겐 매혹적인 이야기로 들렸다. 사실 학교교육은 너무 문제가 많다는 걸 거의 모든 국민이 경험했고 이미 ‘입시경쟁’의 피로가 이 사회 전반에 심각하게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이 상품이라면 소비자는 자본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바통을 넘겨받아 진행된 시장주의 관점에 터한 교육개혁의 결과는 참담하다. 경쟁과 차별과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많은 아이들이 여전히 성적 때문에 자살하고 사교육비 부담으로 부모들의 허리는 이미 휠대로 휘었다. 하지만 휘도록 사교육비를 마련해도 상위권 대학은 부유층 차지가 되고 있다는 소식이 줄을 잇고 있다. 행복은 그야말로 갈수록 성적순이고 성적은 갈수록 경제력순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누구나 다 같이 잘 살고 있지 못한데도, 시장주의 교육재편은 가난과 부의 대물림구조를 고착화시켜왔고 앞으로도 그럴 전망이다. 시장주의 관점에서 교육은 상품이다. 상품이 거래되는 곳은 시장이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시작된 교육개혁을 ‘시장주의’라고 통칭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교육시장화가 위기에 처한 공교육을 개선하여 국민들이 교육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해소하고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방책이라면 문제 삼을 이유가 없지만 교육시장화, 상품화는 공교육을 붕괴시키고, 불평등재생산을 정당화하는 관점이고 실제로 그래왔다는데 있다.

사진 | 참세상


교육받을 권리가 ‘사회권’에 속한 까닭


더욱 문제인 것은 ‘소비자’의 실체가 ‘자본’이라는 것이다. 교육에 대한 권리는 자본과 부유층의 몫이다. 당연히 나머지 대다수의 권리는 여기에서 희생되어야 한다. 수월성의 강조, 영재교육 확대, 자립형 사립고, 특목고 확대, 수준별 교육과정 등의 일련의 정책들은 바로 공교육이 모두가 아닌 10을 위한 기관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급기야 자본은 ‘경제교과서’까지 교육인적자원부와 만들어 내놓았다. 90의 희생을 바탕으로 10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의 구축이 시장주의 교육개편이 목표하는 바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고 상품이 될 수도 없으며 상품이어선 안 된다.


교육은 ‘인간 발달’과 함께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도모하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으로서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역사 변화에 따라 체계화된 형태로까지 변화해 왔다.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서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교육이 인간다운 삶의 영위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에 대한 권리는 곧 인간다운 삶의 권리나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평등한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서 배제나 차별은 용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회적 기본권이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인 탓에 그에 대한 보장은 ‘사회가 책임질 일’이며 이 역시 보편화된 상식이다. 만일 경제력을 이유로, 출신지역을 이유로, 성별을 이유로, 장애여부를 이유로, 인종을 이유로 배제와 차별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인류 보편이 추구해온 정의로운 상식에 대한 도발이나 마찬가지다. 교육에 대한 권리가 당연한 권리임에도 차별과 배제는 줄곧 따라다녔다. 이 사회는 ‘천부인권’조차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차별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어떤 교육을, 얼마만큼 받았는가’를 ‘사회적 차별’의 핵심 잣대로 삼을 뿐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한다. 시장주의 관점은 이를 바로잡기는커녕 확대재생산, 심화한다.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교육권의 전부인 양 대치한다.


모순을 확대재생산하며 수십 년 째 돌아가고 있는 불평등 시스템의 최대 피해자는 다름 아닌 노동자, 민중 자신이다. 우리의 미래인 노동자, 민중의 아이들이다. 그러나 민중진영에서는 아직까지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민중교육권 실현을 당당히 요구하지 못해왔다. 교육을 통해 지위가 대물림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거의 눈뜨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니, 어떻게든 교육을 시키기 위해 뼈 빠지게 노력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게임의 룰을 바꿀 생각보다는 그 속에서 농락당해온 것이다.



패배주의를 넘어 교육 공공성을 요구해야


교육문제만큼 사회경제적 처지와 불평등을 뼈아프고 가슴 저리게 하는 문제도 드물다. “교육에서조차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고, 나의 처지를 대물림해야만 하는가!”라는…. 그럼에도 잘못된 상식과 뿌리 깊은 패배주의가 ‘정당한 요구’를 스스로 꺼내기 힘든 ‘황당한 요구’로 인식하게끔 만들어 왔던 것이다. ‘산업수요에 부응하는 교육’ 등 자본은 거침없이 나서는데 노동자, 농민 등 대항의 근본 주체는 없고 일부시민단체와 교사만이 나서는 형국이었다. 자본이 나서는 교육논의의 진정한 대항주체는 민중이며 이제 민중이 나서야 한다.


교육 공공성은 민중이 교육에서 소외됨을 극복하고 인간의 전면적 발달 도모를 보장하는 원리이다. 교육으로부터의 소외 극복과 전면적 발달의 기회는 ‘사사성’으로 절대 보장되지 않는다. 교육 기회(양과 내용 모두)를 공적으로 보장하고 공적 방식으로 이를 해결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요컨대, 교육 공공성은 모든 인간을 교육으로부터 소외시키지 않으며 나아가 어떠한 차별도 없이 전면적 발달을 도모하는 원리인 것이다. 더불어, 교육 공공성은 민중적 교육실천의 원리와 이념이다.



교육 공공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지배계급의 교육에 대한 자의적 전유를 뛰어넘어 모든 인간의 전면적 발달을 이루는 교육실천의 원리이다. 자본주의 질서하의 사회관계는 교육의 공공적 성격(사회적 일, 사회적 권리, 보편의 이익)을 왜곡시키는데 즉,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의 교육이 갖는 공공적 성격의 발현은 “교육실천의 사회화/교육에 대한 특정 계급의 패권적 전유”라는 긴장관계 속에서 힘의 관계의 역동에 따라 억제되거나 왜곡될 소지가 크다. 공식적, 비공식적 기제에 의거해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교육은 지배계급의 특권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자본주의 근본모순과 힘의 관계가 야기하는 교육 공공성의 왜곡은 실천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다.


교육 공공성은 인간 특히, 노동자 민중이 주요 주체로서 집단적 ‘실천’을 통해 추구하고 실현해야 하는 개념이다. 시장적 원리가 대안이 아님은 십 수년 간의 경험으로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