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과연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미국의 쿠바에 대한 테러 행위와 다섯 명의 쿠바인들

작년 12월, 미국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은 약 8천 여 병력의 에티오피아 군대가 소말리아를 침공했던 거 모두들 기억하고 계시죠? 당시 그들이 내세웠던 침략의 명분은 수도인 모가디슈를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법정연합(United of Islamic Court)>이라는 ‘반군’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소말리아 ‘과도정부’를 보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만 옆길로 새보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갖다 붙이고, 그걸 언론이 그대로 받아쓰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부르는 이 ‘반군’과 ‘과도정부’라는 명칭상의 구분법은 소말리아의 경우엔 전혀 적합하지 않습니다. 1992년 내전이 본격화한 이후로 지난 16년 동안 소말리아는 유엔이 인정했듯이 ‘행정, 치안, 법을 집행할 주체가 완전히 부재한’ 말 그대로의 무정부 상태였거든요. 지역마다 부패한 군벌들이 난립했던 나라에서 16년 만에 처음으로 쓰레기 수거가 시작되고 범죄자를 단속하는 등 질서와 안정이 조금씩 찾아들기 시작한 것은 <이슬람법정연합>이 모가디슈를 장악한 작년부터였습니다. 물론 그동안 제대로 된 선거가 치러진 적 한번 없었구요. 그런 마당에 미국과 에티오피아가 일방적으로 임명한 (과거 반미였다가 지금은 친미로 돌아선) 군벌연합세력을 ‘과도정부’라 부르고, 그들의 반대편에 선 이들을 ‘반군’이라 부르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앞에 가면 도둑놈, 뒤에 가면 경찰”하는 것만큼이나 엉터리인 구분법일 뿐입니다.

쿠바에 친미정권이 무너지고 혁명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은 이를 뒤엎으려는 노력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쿠바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포스터. 출처 | 벤쿠버 쿠바 5인 양심수 석방 위원회 사이트 www.vancubasolidariy.com


백번 양보해서 테러와의 전쟁을 꼭 해야 한다면


아무튼 그렇게 에티오피아 군의 침공 직후인 올해 1월 8일, 이번엔 미군이 직접 소말리아 남부지역을 공습합니다. 그 이유는 알카에다와 연계된 테러리스트 두 명을 제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 두 명이 어떻게 됐는지, 아니 그들이 애초에 소말리아 남부에 있기나 한 건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미군 공습이 남긴 결과는 애꿎은 소말리아 주민 수백 명의 죽음과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린 마을들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테러조직원 두 명 잡겠다고 수백 명이 사는 마을을 폭격하는 행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만약 백만 배 천만 배 양보해서 ‘테러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가정한다면 미국 정부가 진작 폭격했어야 할 곳이 어디일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저의 정답은 바로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 있는 마이애미입니다.


1998년 9월 12일, 미국 플로리다의 연방수사국 FBI 요원들이 1994, 95년 사이에 마이애미로 건너온 5명의 쿠바인들의 집과 사무실을 급습해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제라르도 에르난데스(Gerardo Hernandez), 안토니오 게레로(Antonio Guerrero), 라몬 라바니뇨(Ramone Labanino), 르네 곤잘레스(Rene Gonzalez), 그리고 페르난도 곤잘레스(Fernando Gonzalez)였는데,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마자 미국 전역은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들의 혐의가 미국의 적국인 ‘쿠바 정부의 지시를 받고 마이애미에 잠입해 미국을 공격할 목적으로 행한 간첩행위’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애초의 호들갑과는 달리 정작 재판의 뚜껑을 열어보니 내용은 영 체포 당시에 알려진 것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즉,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기소한 총 26가지의 혐의 가운데 24가지는 가명을 사용했다거나 정식으로 외국 정보원 등록을 하지 않고 정보활동을 한 혐의와 같은 사소한 위반들에 불과했고, 나머지 2개의 혐의 또한 살인 예비 ‘음모’, 테러 예비 ‘음모’였던 거죠. 물론 직접적으로 살인이나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걸 계획하고 꾸민 것만으로도 충분히 범죄는 성립합니다. 다만, 문제는 119권에 달하는 재판 기록과 15권의 사전 심문 기록, 800여 점의 증거 물품, 두 명의 퇴역 미군 장성과 전 백악관 대통령 고문을 비롯한 70여 명이 넘는 증인들이 증언대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섯 명이 미국을 공격할 음모를 꾸몄다고 믿을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겁니다. 심지어 CIA가 확보했다는 그들과 쿠바 정부 간의 2만 페이지에 달하는 교신 기록을 봐도 미국을 테러하거나 공격한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 검찰은 기소된 다섯 명 중 안토니오 게레로가 미 해군 기지 보카치카 내의 철공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물고 늘어집니다. 군사정보를 빼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군 기지에 ‘잠입’했다는 거죠. 그러나 이것도 재판이 진행될수록 설득력을 잃어갑니다. 왜냐하면 그 기지는 관광객들이 활주로의 전투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전망대까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개방되어 있었고, 게레로가 수집한 정보라는 것이 관광객들과 함께 섞여서 하루에 비행기가 몇 번 뜨고 내리느냐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증언대에 섰던 전직 미군 고위 관리와 정보요원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됩니다. “보카치카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한 군사 정보는 전혀 없고, 쿠바 정부가 게레로를 시켜서 그런 정보를 얻게 한 것은 행여나 우리(미국)가 그들을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게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라고요.


그럼에도 2000년 9월에 나온 재판의 결과는 재판의 내용이나 증거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제라르도 에르난데스와 안토니오 게레로, 라몬 라바니뇨에게 종신형, 르네 곤잘레스와 페르난도 곤잘레스에게는 각각 징역 19년 형과 15년 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게 된 걸까요? 그것은 그 재판이 이뤄진 곳이 바로 마이애미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이는 그 다섯 명이 쿠바 정부의 지시에 따라 마이애미로 오게 된 이유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1959년 1월 1일, 피델 까스뜨로와 체 게바라 등이 이끄는 무장 게릴라 운동이 부패한 친미 바띠스따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때부터 오늘날까지 미국 정부는 쿠바 혁명정부를 뒤엎으려는 노력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동원한 방법이 첫 번째로는 경제봉쇄와 국제사회를 이용해 쿠바 정부와 국민들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쿠바에서 망명해온 쿠바계 미국인들을 통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안의 대표적인 경우가 까스뜨로가 사회주의 혁명 선언을 한 바로 다음 날인 1961년 4월 17일 미 CIA가 쿠바 망명객 1,500명을 모아 창설한 ‘2506 공격여단’의 피그만(The Bay of Pigs) 침공이었죠. 그러나 피그만 침공이 1백 여 명 사망과 1천 여 명 체포라는 엄청난 군사적 패배로 끝이 난 뒤부터 미국 정부는 테러 공격을 통한 사회 혼란과 경제난 가중, 혁명 지도부 암살로 방법을 전환하게 됩니다.



‘리틀 하바나’라 불리는 마이애미


이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들이 <알파 66(Alpha 66)>, <오메가7(Omega 7)>, <구원을 위한 형제단(Brothers to the Rescue)>, <쿠바-미국 전국재단(Cuba America National Foundation)> 같은 것들로, 이들은 한결같이 마이애미에 근거지를 두고 있습니다. 쿠바 혁명 이후 토지 개혁과 외국자본 국유화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탈출했던 쿠바 망명객들이 주로 정착한 곳이 바로 마이애미이기 때문이지요. 현재 마이애미에는 약 65만 명의 쿠바 망명객들과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신문사와 라디오, TV가 수십 개에 달할 정도로 마이애미는 반 까스뜨로 선전의 주요 발원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문의 국제면을 통해 간간히 접하는 쿠바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들, 이를테면 매매춘이 횡행하고 일반 국민들의 정부불신이 극에 달했더라 하는 등의 뉴스들이 실은 대부분 마이애미 발 기사들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미국 정부의 재정적 지원 또한 대단해서 반 까스뜨로 조직의 지도급 인물들은 상당한 재력가들로 알려져 있고, 그 대가로 이들은 지난 2000년 선거 때 공화당에 표를 몰아줘서 부시 현 대통령이 불과 몇 천 표 차이로 플로리다에서 승리해 대통령직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었죠.


“CIA는 우리에게 모든 걸 가르쳐 줬습니다”


그러는 동안 쿠바 국민들이 그들로 인해 입은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반쿠바 테러리스트들은 수시로 쿠바의 항구와 호텔, 식당 등을 상대로 한 폭탄 테러와 지역 공동체 지도자 납치 암살, 야간에 고속정을 이용한 해안 마을 습격 등을 저질렀는데, 이로 인해 지난 48년 간 사망한 쿠바 민간인들만 수천 명에 달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테러가 1976년 10월 6일, 쿠바나 항공 455편 민간 여객기에 폭탄을 설치해 카리브 해 상공에서 폭파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테러로 인해 팬아메리카 경기에 출전하고 돌아오던 쿠바 국가대표 펜싱 선수단 전원과 동유럽, 북한의 유학생, 기술자들 73명 전원이 사망했었죠.


이 쿠바나 민간 여객기 폭파 테러 사건은 여느 테러 사건과는 달리 범인이 누구인지 금방 밝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테러범들이 직접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당당히 떠벌리고 다녔거든요. 그들 중 범행을 주도한 두 명의 쿠바인들은 올란도 보쉬(Orlando Bosch)와 루이스 포사다 까리에스(Louis Posada Carriles)였습니다. 먼저 올란도 보쉬의 공식적인 직업은 소아과 의사였으나 실제로는 반 까스뜨로 테러조직의 지도자로 더 유명했습니다. 루이스 포사다는 바띠스따 정권 시절 비밀정보요원이었다가 미국 CIA의 눈에 띄어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사설탐정소를 운영하면서 CIA와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맺어온 인물이었습니다. 이 둘은 한 때 베네수엘라 당국에 체포돼 재판 없이 4년 넘게 수감되기도 했으나, 포사다는 1985년 8월 유유히 감옥 문을 열고 걸어서 ‘탈출’에 성공했고, 올란도 보쉬 역시 1988년에 마이애미로 돌아갔습니다.


미 법무부 차관 조 D. 휘틀리(Joe D. Whitley) 조차도 “희생자들의 국적과는 관계없이, 그는 폭력을 저지르고 인간 존엄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라고 말할 정도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던 보쉬는 그러나, 폴란드 화물선 폭파 혐의로 추방되기 직전에 조지 H.W. 부시(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에 의해 사면돼 지금도 마이애미에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이애미의 리틀 하바나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을 정도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죠. 참고로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은 1976년 쿠바 여객기 폭파 사건 당시 CIA 국장이었답니다.


포사다는 최근까지 보쉬보다도 더욱 왕성하게(?) 활동해왔습니다. 한 때 행방이 묘연했던 그가 다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쿠바 수도 하바나에서 한동안 잠잠하던 폭탄테러가 다시 잇따를 무렵인 1998년 미국의 스페인어 TV 채널인 CBS 텔레노티시아의 한 프로그램에서였습니다. 다음은 방송에 나온 인터뷰의 일부분입니다.



진행자 : 당신은 하바나에서의 폭탄테러와 관련이 있나요?
포사다 : 네, 모든 사건들이 다 전적으로 제 책임 하에 일어난 겁니다. 앞으로 벌어질 테러들도 마찬가지일 거구요.
진행자 : CIA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죠?
포사다 : CIA는 우리에게 모든 걸 가르쳐 줬습니다. 살인, 폭파, 태업 선동 등등 모든 것들을 훈련받았죠. 그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애국자라고 불렀어요.



그 뒤 포사다는 2000년 파나마에서 열린 남미 정상회담에 참석한 피델 까스뜨로를 살해하기 위해 C4 플라스틱 폭탄을 가지고 들어가다가 체포돼 8년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번에도 포사다는 그냥 사면을 받고 풀려나 2005년에 미국으로 들어간 후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는 기자회견을 엽니다. 그리고는 며칠 뒤 엘 파소의 구금 시설로 옮겨지는데 미 정부는 그를 시설에 수용한 이유가 이민법 위반 때문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포사다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 법원은 송환될 경우 고문당할 우려가 있다는 그의 변호인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송환을 거부해오고 있는 상태죠.


미국으로부터의 테러를 막기 위한 활동으로 수감중인 쿠바인의 석방을 미국 법원과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벤쿠버에서 열린 쿠바 양심수 석방 캠페인.


테러를 막기 위한 정보활동의 혹독한 대가


이제 다시 다섯 명의 쿠바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쿠바 정부가 그들을 마이애미로 보낸 이유가 바로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 때문입니다. 즉 마이애미에서 반쿠바 테러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테러조직에 잠입해 그들의 테러 정보를 미리 사전에 입수함으로써 쿠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그 다섯 명에게 주어진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임무를 훌륭히 잘 수행해 여러 건의 테러 시도를 막을 수 있었고요. 그 때문에 그들이 치르고 있는 대가는 너무나 혹독합니다. 체포 당시부터 지금까지 각각 멀리 떨어진 교도소의 24시간 귀청을 찢는 소음과 강한 불빛이 뿜어져 나오는 독방에서 추운 겨울에도 두꺼운 옷 한 벌 없이 수감되어 있습니다(관타나모 수용소와 거의 비슷한 방식의 고문이죠). 물론 법에 보장되어 있는 가족들과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으며, 변호인과의 극히 제한된 접견만 허용된다고 합니다.


참, 마이애미에서 유죄선고가 내려진 이후 항소심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짧게 말씀드려야겠네요. 변호인단이 마이애미 법원의 선고에 대해 항소를 하자, 사건은 애틀란타의 제11 순회항소법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세 명의 재판관들은 반 까스뜨로 정서가 가장 강한 마이애미에서, 그것도 배심장이 공공연히 까스뜨로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는 상황에서는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기 힘들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재심을 판결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미 법무부가 중간에 개입해 아주 이례적으로 항소법원의 11명 재판관 전원이 결정에 참여할 것을 요구해 결국 작년 8월 9일 재심 결정이 취소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현재로서는 미국 법원과 정부에 의해 그 다섯 명의 석방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 대신 유엔 인권위원회의 워킹 그룹이 그들의 체포와 수감이 자의적인 구금에 해당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석방을 촉구한 것을 비롯해 세계 90여 개 국가에서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이른바 “Free the Cuban 5” 단체들이 조직돼 왕성한 석방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위선과 인권탄압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대중적이고 전 세계적인 연대운동의 힘 밖에 없다고 봐야겠지요.


마지막으로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지금도 동분서주하시는 ‘그 분’께서 9.11이 일어난 지 9일 뒤, 미 의회에서 행한 연설의 일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칩니다.


“이제 세계 모든 지역의 모든 나라들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편에 설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테러리스트의 편에 설 것인가 말입니다.” - 조지 W. 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