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세련됨, 우아함 속에 숨은 고도의 차별

중요한 것은 말의 합리성이 아니다

케이블 TV에서 방송되는 해외 프로 ‘내니 911’이나 그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등을 보고 있노라면 참 요즘 아이들 키우기가 만만치 않은 일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걸 보면서 1차적으로 느끼는 것은 단연 ‘절대 애 키우지 말아야지!’와 ‘저럴 거면서 애는 왜 낳아!’일 것이고, ‘대체 저 부모들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야?’라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심정까지도 마구 샘솟는다. 하지만 한편 뒤돌아 생각해보면,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직접 키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유야 어찌됐건 대화가 안 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 심리치료사들의 말을 빌면, 아동에 대한 심리치료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언어적 특성만으로 아이를 판단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어른들 만큼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사회적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말 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아이의 울음소리만으로 배가 고픈지 아픈지 등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뒤집어보면 결국 언어라는 것은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나 너무 슬퍼’라는 말 100마디 보다 처절하게 쏟아내는 눈물이 그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 언어나 말은 그냥 우리의 상태를 타인의 머릿속에 인지시켜주는 것 정도밖에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실질적인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서 말은 참 부족한 것이 많다.


말 안 통하는 아이들과 사는 부모들을 두둔하긴 했지만 그래도 말/언어에만 모든 것을 의존하는 것 역시도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산다. 너무 많이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말에 의존하고 산다. 특히 온라인 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참 피곤하기 짝이 없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육두문자들은 제외하고라도 문장마다, 단어마다 그 뉘앙스를 해석하는 방식의 차이들이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짚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건강한 토론과 논쟁이 긍정적인 합의나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는 어디선가 게시판 논쟁이 벌어지면 그걸 읽고 싶기 보다는 읽는 동안 몰려올 짜증 때문에 슬쩍 그 글들을 넘겨버리거나 하게 된다.



말, 어휘가 갖는 차별성


꽤나 옛날에 어디선가 본 기사의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미국의 기사를 단신으로 소개한 내용이었는데, 직업군별로 사용하는 평균 단어 개수가 몇 개나 되는지를 조사한 결과였다. 평균 사용 단어 개수는 직업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였는데, 기자나 언론인은 16,000~20,000개, 변호사 등 전문가 집단은 15,000개, 대졸자 이상은 12,000개 이상, 농민은 8,000개 정도였다. 말로 벌어먹고 사는 직종의 사람들이야 당연히 쓸 수 있는 단어가 많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 결과를 뒤집어보면 소위 ‘엘리트’들이 더 많은 단어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엘리트들이 대체 한 게 뭐가 있나?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보자면, 저 조사 대상들 중에서 뭔가를 ‘생산’하는 직업군은 사실상 농민 밖에는 없으며 나머지는 다 ‘말빨’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변호사, 언론인들이 작성한 문서나 글들을 볼 때면 그걸 읽기도 전에 그 문장들의 유려함과 그 안에 녹아있는 지식에 기가 눌린다. ‘얼마나 알아서 잘 썼을까’하는 생각을 하거나 ‘읽어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안들 때는 바짝 긴장하면서 글들을 읽어 내려간다. 무식함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잔뜩 아는 척을 해가며 해석도 해보고, 비판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결국 논쟁 후에 남는 것은 씁쓸한 뒷맛이고, 화장실에서 뒤처리 안한 것 같은 개운치 못한 느낌뿐이다.



말 그대로 ‘맨몸’으로 저항하는 사람들 앞에서


얼마 전 울산과학대 청소미화원 여성노동자들과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시청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노조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집단해고통보를 받았다. 자신들의 부당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그들은 최대한 세련된 방법을 택했다. 똑똑한 사람들이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낸 ‘법’에 따라 사용자 측과 교섭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구성한 초반에는 그 세련된 방법이 먹혀드는 것처럼 보였다.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시청비정규직 노조의 한 조합원은 노조 구성 직후 “반말하던 시청직원들과 용역업체 사람들의 대우가 달라졌다”고 하기도 했다. 정말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속담의 힘을 몸소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금방 역전됐다. 30년 전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이 노조활동과 노동3권 보장을 내걸며 옷을 벗어 시위를 했던 그때의 모습이 2007년 울산, 광주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무식하다는 이유로, ‘고작’ 청소나 한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면서도 그리고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노동을 해온 여성들이 합리적이고 세련된 방법을 선택해 ‘법’으로 보장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냥 해고만 당할 수 없어 옷을 벗고 버텼더니 이 세련되고 배워먹었다는 양반들은 무식하다고 조롱했던 그녀들에게 아주 더럽고 치사하며 더 무식한 방법으로 폭력과 성희롱 발언을 일삼으며 그녀들을 삶의 터전에서 내몰고 있다.



합리성에는 가치판단이 없다


‘합리성’이라는 말이 주는 매력은 대단하다. “합리적이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명쾌하고 정확한 답을 전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명쾌하고 정확한 답은 어떤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라던가 ‘어려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라는 전제 말이다. “합리적으로 해결하자”라거나 “법대로 하자”라는 말 앞에서 순간 움찔하게 되는 것은 그 뒤에 숨어있는 위와 같은 전제들 때문이다. 좀 덜 똑똑할지라도, 덜 합리적일지라도, 말을 잘 하지 못할지라도 진짜 중요한 것은 말이나 합리성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