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무지한 언론매체의 은밀한 폭력

“‘에이즈 요리사’ 호텔서 일해”, 뉴스보도를 중심으로

미디어는 본질적으로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한 복잡한 의미작용이라고 볼 때 지난 3월 전파를 통해 전달된 “에이즈”와 관련된 뉴스는 공포와 위험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을 증폭시키는데 일조했는지 입증한 사건이다. 지난 3월 13일 SBS <나이트 라인>에서 방송된 “에이즈 요리사 호텔에서 일해”라는 제목의 뉴스는 그 대표적인 예로, 대중의 시선을 끌어내는 것에만 혈안이 된 방송의 천박무쌍(?)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무지한 협박의 전형적 공식 :
에이즈를 보는 언론매체의 ABC



앵커 : 지난 8년 동안 특급호텔 요리사로 일하던 한 외국인이 에이즈에 걸린 사실이 드러나자 몰래 출국했습니다. 당국은 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감염됐는지 그리고 그동안 누구와 접촉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명호텔의 외국인 요리사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이 ‘뉴스 꺼리’인지는 거론치 않기로 하자. 언론 매체의 역할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헌법에 보장된 민주주의의 가치에 입각하여 직업 선택의 보편적 권리가 차별의 기제로 작동되는가를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매체는 그동안 ‘에이즈’에 관해서는 ‘공포의 질병’으로 낙인찍고, “에이즈에 걸리면 (무조건)죽으며, 걸릴만한 마땅한(!) … 까닭이 있으리라” ‘겁주는’ 방식으로 일관해왔다. 예컨대, ‘에이즈’를 대하는 기자의 시선은 굶주린 하이에나를 동경하고,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공격적 선정성을 용감함이라 여기는 매체 환경에서 ‘먹잇감’ 이상의 의미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국내 유명 호텔 요리사로 일하던 외국인이 에이즈에 걸린 사실은 훌륭한 ‘이슈’가 된 것이다.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흉기’로 판단하는 언론매체는 이들을 보다 철저하게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공식인양 이해한다. 언제, 왜 질병이 나타났게 되었으며, 질병을 지닌 누군가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지에 대해 시시콜콜 기록하는 것을 넘어 공공의 안주거리로 만드는 행위를 자행하는 것이다.



기자 : 서울의 한 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프랑스인 요리사 A씨가 지난달 갑자기 출국했습니다. 온몸에 붉은색 반점이 나서 한 달 전 병원을 찾은 뒤였습니다. 혈액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프랑스 요리사는 지난 8년 동안 국내 특급호텔 3곳에서 주방장을 지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A씨를 고용한 호텔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호텔 간부 : 충격적이에요. 저도 몰랐으니까, 에이즈 란에는 기록이 안 돼 있고.




또한 과잉된 호들갑은 시청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양념이 된다. 기자 스스로 ‘충격’을 받았던 것인가? 기자들이 받은 ‘충격’은 고스란히 시청자에게도 ‘충격’으로 이어진다. 설득을 위해서 누군가의 입을 빌리기도 한다.


공적 언어의 함의는 의심을 경계한다. 언어는 발화자가 의도하는 가치와 의미, 그리고 상황에 대한 판단을 작동케 하는 무의식적 인식으로 반영 선택된다. 알다시피 사회적 문제를 단순히 따라가며 해설을 할 수밖에 없는 방송뉴스는 짧은 시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강렬한 하나의 단어로 상황을 정리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혈액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는 기자의 선택은 이후 호텔 간부의 ‘충격’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시청자들에게 ‘충격적이지 않은가?’라 물으며 동의를 구하는 헤어나기 어려운 회로를 따라 자연스레 ‘에이즈’에 대한 기자의 본질적 무지를 은폐하며 ‘에이즈’에 대한 익숙한 편견을 따라 흐른다.


물론, 에이즈라는 질병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혐오인 상황에서, 에이즈 감염인을 당연한 혐오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기자와 언론매체의 태도를 비과학적이며 반인권적이라 독해하는 입장은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대화만큼이나 이질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진다. 사건을 다시 한 번 재구성해보자. 호텔 간부는 요리사의 에이즈 감염 사실에 대해 몰랐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아무 이유 없이’ 피해를 받거나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98%의 상식에 합의할 수 있다면 질병기록을 고용주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이것을 알자고 하는 것이 적반하장이다.


그러나 SBS는 ‘까맣게’ 모르고 에이즈 감염인을 고용한 호텔이 그저 안쓰럽다. 누구도 자신의 질병기록을 공개하거나 알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에이즈 감염 역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에이즈 감염 사실이 공개되었을 경우 발생할 사회적 위협이 (어쩔 수 없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현행 에이즈예방법에서도 ‘비밀누설 금지’ 조항을 명문화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가 될 소지는 기자가 어떤 경로로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냈는가 하는 것이며 기자 자신이 업무상 알게 된 타인에 대한 병력정보를 누설해서는 안 되는 기본적인 의무를 ‘선정성’과 뒤바꾼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기자 : 전문가들은 일단 A씨가 요리 과정에서 에이즈를 전염시킬 가능성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의사 : 실제로 조리과정에서 소량의 혈액이 노출이 되었다 하더라도 직접 입으로 먹었을 때 감염될 가능성은 거의 없고요.



기자의 최소한의 염치가 드러났다. 에이즈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감염되지 않는다. 이는 SBS조차 전문가를 통해서 입증하였다. 에이즈는 감염되는 순간부터 절망이자 죽음이라고 낙인찍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며 에이즈 감염인을 사회적으로 격리시키도록 부추겨왔던 언론매체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문가의 발언은 그 동안 공론화되지 못했던 에이즈에 대한 사실인 것이다.


2006년 9월 열린 에이즈 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증언대회. 이날 증언자들은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원인으로 정부 예방정책과 함께 언론보도를 꼽았다. 사진 | 에이즈예방법공대위


질병이 발견되면 가설들이 난무한 상황에서 질병에 대한 공포는 극대화된다. 따라서 질병이 발견된 초기 보건당국은 물론, 언론매체 역시 분주하다. 확인되지 않은 비과학적 논의들이 사람들의 인식에 뼛속 깊이 박히게 되고, 그 역할을 자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언론매체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면 에이즈는 ‘죽음’, ‘동성애’, ‘빨간 반점’, ‘섹스’ 등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병이라는 편견을 떨쳐버린 건 오래 되지 않았다. 에이즈 질병을 가진 자와의 접촉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격리’는 적절한 수순이라는 무의식적 판단을 내려왔던 것도 사실이다. 에이즈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에이즈를 두려워했고, 북한군은 잔혹한 ‘늑대’라는 <똘이 장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왔던 경험처럼 에이즈 역시 ‘빨간 반점의 동성애자’로 규정했으며 그로 인해 에이즈는 물론 동성애자들에 대한 무지한 편견이 지금까지도 사회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기자 : 문제는 A씨의 국내 행적입니다. 현행법으로는 A씨가 어떻게 감염됐는지 그리고 누구를 만났는지 전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일부 외국인 취업자의 경우 입국할 때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하지만 하지만 요리사는 검사 대상이 아닙니다. 질병관리본부는 A씨에 대해 5년 동안 입국을 금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기자는 에이즈에 대한 ‘충격’을 설득하기 위해서 에이즈 감염인과 주변인들을 침묵하게 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활시위를 놓지 않는다. 기자는 에이즈 요리사의 ‘행적’에 주목하며 에이즈가 걸린 요리사가 어떻게 감시와 관리 없이 한국 땅을 돌아다니게 했는지 정부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았다. 요리사의 행적은, 에이즈를 걸렸기 때문에 당연히 정부에서 감시를 해야 한다는 기자의 섣부르면서 무지한 판단은 금방 뉴스보도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 중요한 것은 에이즈는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병이지 범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매체는 에이즈 감염인을 범죄자로 단정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사회가 안전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식의 보도를 한 것이다.


더군다나 SBS는 ‘외국인’ 에이즈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대상의 타자 화법으로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심어간다. 동성애자, 외국인, 성매매여성들은 에이즈 감염 가능성이 높은 그룹으로 규정하고, 치료에 대한 접근권보다는 위험인물로 낙인찍는 방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일부 외국인 취업자의 경우 입국할 때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하지만 요리사는 검사 대상이 아닙니다.”라며 현행법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현행 출입국관리법상 체류 중인 외국인이 에이즈에 감염되었을 경우 모두 강제 퇴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외국인에게 내국인과 차별적인 에이즈 예방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또한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은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을 ‘그 나라의 국민과 평등하게 처우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아, 생명의 유지와 회복하기 어려운 건강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긴급하게 필요한 의료를 받을 권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프랑스 국가에이즈위원회도 ‘시민권이 있든 없든, 모든 환자들에게 의료 접근권과 의료 이용을 위한 체류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HIV 유행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1) 언론매체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본적 권리가 박탈되거나 빼앗기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언론매체는 주류와 기득권 질서에서 한 치의 오차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득권의 줄이 비뚤어지는 것에 예민하고 날카롭게 반응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회적 약자를 발견하고 집단화시키면서 타자화시키는 방식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공포의 여론, 그 여론의 폭력


‘Hubert et al. 1998 : 365’ 자료에 따르면 ‘에이즈 환자는 격리시켜야 한다.’ 라는 질문에 벨기에는 1993년에 4.7%, 프랑스는 1992년에 5.6%가 ‘그렇다’는 응답을 보였다. 반면 한국의 경우는 프랑스나 벨기에에 비해 10년이 훌쩍 지난 2005년에 같은 설문에서 무려 40.2%가 에이즈 환자는 격리시켜야 한다고 답했다. 설문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에이즈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인식 수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질병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질병을 가진 이에 대한 사회적 태도와 개인적 태도를 규정하게 되고, 이로 인한 차별이 공공연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끔찍하다. 한국 사회 안에서 에이즈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후지다. 후진 인식은 차별로 드러나고, 사회적 폭력으로 표현된다.



누누이 지적했듯, 비과학적인 판단과 편견은 반인권적 행위로 드러난다. 지금은 한센병이라 불리는 문둥병을 기억해보자. 한센병은 활동성 양성인 경우만 전염이 되며 양성인 경우도 약을 복용하면 음성으로 전환되기에 전염률은 희박하다. 그리고 1941년 특효약 DDS가 발명되면서 완치가 가능해졌으면, 초기발견 시 쉽게 치료가 된다. 그러나 1916년 조선인 한센인 6천여 명이 소록도에 강제 수용되었고, 당시 갱생원 치료방법은 ‘강제노역’,‘정관수술’,‘낙태’,‘손발절단’ 등이었다. 특효약 발명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한센인들을 상대로 한 학살과 거짓이 이어졌다. 이처럼 엄청난 살인과 폭력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여론’의 크나큰 힘이었고, 이와 같은 여론이 생성될 수 있는 있었던 것은 언론매체의 무지에서 비롯된다. 사회적 살인이다. 모두가 공범자이다. 한센병 환자를 죽이고 학살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격리시킨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다. 또한 비과학적이며 무지한 정보로 공포의 여론을 만들어낸 언론매체도 공범이다. 그러나 언론매체는 이와 같은 무지함을 견제하지 않고, 호들갑을 떨거나 혹은 철저하게 침묵하는 방식으로 질병과 환자들을 타자화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매체는 사회적 살인을 용인하고, 오히려 부추긴다.


한국 사회 안에서 질병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저 질병을 가진 이들에 대해 화살을 날리고, 원망하려 든다. 예방책을 만들어야하는 정부는 ‘반인권’적 태도로 그들을 경멸하고 기피한다. 치료제를 만들어야 하는 제약회사는 계산기만 두드리면서 삶과 죽음,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잇속을 챙기려 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되는 계층에 대해 차별적 요인들을 감시해야 하는 언론매체는 그저 경거망동,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 주변인들에 대한 편견의 여론을 조장하고 있다.


‘한센병’의 전철을 이제라도 밟지 않기 위해서 에이즈에 대한 언론매체의 인식과 보도태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 지, 언론매체는 이제는 답을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