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의료보장의 대개혁을 요구하자

무상의료, 필요에 따라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권리




건강권, 무상의료의 꿈


현실에서 건강은 오로지 한 개인과 그 가족의 몫이며 결국 돈의 문제로 귀결된다. ‘무상의료’라는 말이 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히 선언적인 구호로 권리 당사자에게 가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건강권의 실재인 것이다. 더군다나 ‘한미FTA’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최소한의 의료 공공성마저 허물어질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월간 <사람>은 다시금 ‘무상의료’의 꿈을 꾸자고 제안한다. 구체적으로 사회환경적인 요소가 우리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살펴보고, 무상 의료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쿠바에 다녀온 얘기도 담았다. 또한 성인지적 관점에서의 건강 문제도 짚어본다.


의료보장의 대개혁을 요구하자
쿠바에서 의료의 진면목을 보다
도시와 환경성 질환 그리고 <아픈 아이들의 세대>
한미FTA, 죽거나 혹은 아프거나
성인지 관점에서 본 여성건강
환자권리 찾기, 첫 발을 내딛다






무상의료’라는 말은 지금까지 진보진영에서 제기해왔던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선거 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하곤 한다. 지금 시기 ‘무상의료’를 다시 꺼내들어 점검하고자 하는 것 또한 올해가 대통령선거가 있는 정치의 계절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무상의료’라는 말은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백기완 후보가 전면적으로 제기했던 슬로건이며 8, 90년대 한국사회 변혁운동을 했던 세력들이 즐겨 사용했던 공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선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무상의료를 향한 진보진영의 경험


물론 아직도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던 계기는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이를 다시 꺼내들면서 만들어졌다. 당시 민노당에게는 ‘부유세’와 함께 ‘무상의료’가 핵심적 공약으로 국민들에게 이해되었다. 민노당은 2002년 대선 이후에도 이를 보다 진전시키는 노력을 했다. ‘무상의료로 가는 로드맵’을 개발하여 추진하는 등 방법을 구체화하기 위한 고민을 계속했던 것이다. 지난해 영유아의 예방접종을 무상으로 제공하기 위해 현애자 의원이 발의하여 국회를 통과했던 「전염병예방법」 역시 ‘무상의료’를 위한 민주노동당 계획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전염병예방법」이 국회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된 예산이 모두 삭감되어 올해 영유아의 무상 예방접종은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민노당은 이외에도 무상의료 실현을 위하여 「의료법」, 「국민건강보험법」, 「의료급여법」, 「모자보건법」, 「공공보건의료법」, 「지역보건법」 등 관련 법률안의 개정을 시도했다. 물론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성과를 나타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민노당의 시도와는 다른 시각에서 ‘무상의료’에 대한 슬로건이 제기된 바도 있다. 이는 2004년 말 건강보험 재정흑자가 1조 5천억 원을 넘는 수준이 되자 정부와 건강보험 가입자, 의약계가 2005년에 건강보험 보장성 개선에 1조 5천억 원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흑자는 국민들이 납부한 보험료이므로 이를 건강보험 보장성 개선을 통해 국민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조 5천억 원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사용처와 방법이 구체적으로 준비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할 때 건강세상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들이 ‘암부터 무상의료’라는 슬로건을 제기했다. 이는 대만에서와 같이 고액 중증질환자에게 건강보험 급여혜택을 집중시키자는 ‘중대상병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당시 이들은 1조 5천억 원을 암과 같은 고액중증질환에 집중 지원하여 보장수준을 높이는 것을 의도했다. 이로써 국민들에게는 ‘건강보험’의 필요성과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동시에 민간의료보험 활성화에 대한 근본적 대책으로 여겼던 것이다. 또한 암 뿐만 아니라 다른 질환으로 확대되는 계기와 동력을 확보하여 향후 지속적인 건강보험 보장성 개선운동의 동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결국 2005년 제기되었던 ‘암부터 무상의료’라는 슬로건은 민노당의 시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당시 건강보험 재정흑자라는 상황을 타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전술적 슬로건’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를 제기했던 시민단체는 이와 같은 전술을 통해 건강보험 보장성 개선을 위한 국민적 동력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평가해 본다면 민노당과 시민단체의 이와 같은 시도는 목적했던 바에 비하자면 아쉬움이 있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를 현실에서 드러냈다. 민노당의 활동을 통해 무상의료를 향한 지향이 법률적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고, 시민단체의 활동을 통해서는 암 등 중증질환의 건강보험 보장수준이 다소 개선되는 성과를 냈던 것이다.


사진|참세상


그런데 이 둘의 접근법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달랐다는 점을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민노당과 건강세상네트워크가 ‘무상의료’를 이해하는 방식은 달랐다. 민노당은 이를 현실적 목표로 설정하고 추진했다면, 건강세상네트워크는 ‘건강보험 보장성의 획기적 개선’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즉 건강세상은 ‘암부터 무상의료’라는 슬로건을 통해 건강보험 보장성 개선을 위한 ‘과정’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이 목적을 향해 가는 접근법도 다소 차이가 있었다. 민노당은 법률적 차원의 검토와 개선에 집중했다면, 건강세상은 암 등 고액중증질환자들의 본인부담을 최소화하는 ‘중대상병제 도입’을 주장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결국 ‘무상의료’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각자 현실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방식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무상의료는 ‘공짜’ 그 이상의 무엇


사실 개념적으로 보자면 ‘무상의료’는 ‘공짜의료’라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상의료’에 담긴 의미는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권리의 보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권리가 있으며, 이를 가로막는 어떤 조건 - 지불능력, 인종, 성, 질병 및 장애, 지역, 종교 등 - 도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무상의료’는 ‘건강할 권리에 대한 보장’을 위한 하나의 과제인 셈이다.


이와 같은 무상의료를 실현하는 것은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미 현존하고 있다. 국가적 의료체계를 NHS(National Health Service)와 같은 방식으로 취하는 나라들, 즉 영국, 호주, 뉴질랜드, 스웨덴, 쿠바 등과 같은 나라들이 이미 ‘무상의료’를 실현하고 있다. 대만과 같은 나라에서는 암, 심혈관질환, 뇌혈관질환, 희귀난치질환 등 고액중증환자에 대하여 ‘중대상병제’라는 제도를 통해 ‘무상의료’를 실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상의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공공보건의료 제공체계가 확실해야 하고 또한 전 국민의 의료이용을 보장하기 위한 재원을 ‘조세’로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이를 실현하는 일은 쉽다거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한국에서 ‘무상의료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도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상의료’가 표현하는 가치지향이 현실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 의미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보건의료서비스의 시장화.산업화의 경향을 막아내야 한다. 노무현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보건의료서비스를 산업화의 동력으로 삼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권 초기부터 경제특구 안에 유수한 병원을 세워 외국 환자를 유치해 돈을 벌겠다는 구상을 하는가 하면, 이제는 「의료법」을 바꾸어 아예 국내 병원도 일정한 영리활동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고자 하고 있으며, 국민건강보험을 일정한 수준으로 묶어 정부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를 위한 여지를 두는 등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노무현 정부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양극화가 발생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건강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다는 최근의 잇따른 보고에도 불구하고 ‘의료산업화’와 ‘양극화 해소’는 서로 관련 없는 별개의 문제로 이해하는 독특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니 ‘의료산업화’의 결과로 건강불평등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불행히도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미FTA에서 쟁점으로 남아있는 ‘의약품 분야’는 FTA 타결이라는 지상목표 아래 주고받기식의 대상이 될 지경이며,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저소득층을 공짜의료라고 마구 의료를 이용해 재정을 갉아먹는 부도덕한 사람들로 몰아 본인부담을 부과하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02년 이후 진보진영에서는 ‘무상의료’를 제기하며 시민사회의 실천과 함께 그 의미를 구체화해 나가는 시점에서 자본과 정부는 보건의료를 시장화.상업화하기 위해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이 이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전개하고 있지만 자본의 거대한 힘에 밀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점점 건강과 의료를 개인적 책임과 돈과 결부시켜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이것이 무상의료의 현실적 가능성을 낮추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이다.


이제 보다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무상의료’는 선거공약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무상의료’를 주창하던 진보정당이 보건의료의 산업화를 막기 위한 활동을 ‘보건의료운동의 과제’로만 이해하는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무상의료’는 법률을 바꾸기 위한 국회 안의 활동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보건의료와 건강의 가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담론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침 올해는 건강보험 30주년이 되는 해이며,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하다. 이런 시점에서 “의료보장의 대개혁”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과정에서 의료서비스 산업화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올바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를 펼쳐가야 한다. 그 안에서 의료보장 대개혁의 방향은 당연히 “모든 국민의 건강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모든 국민들은 필요에 따라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무상의료의 꿈은 그 안에서 길을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