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꿈꾸기를 멈춰야 할 까닭이 없다

『거기 마을 하나 있었다』를 엮은 송경동 시인

별음자리표란 이름의 가수가 “차라리 봄이 오지 말았으면 말았으면 말았으면”하고 노래했던 그 봄이 속절없이 왔다가고 또 봄이다. 그 사이 대추리 담벼락에 시가 쓰이고 노래가 지어지고 그림이 그려졌다가 이내 모두 허물어졌다.
어느 누가 노래하나 시 한 편이 중무장한 전경과 용역을, 포클레인 굉음과 낮게 뜬 헬기가 일으키는 흙먼지를 막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인가. 그럼에도 문화예술인들이 이웃집 들리듯 찾아와 애써 짓고 그린 작품들을 이제 종이 위에 옮겨 책으로 묶어낸 이가 있다.





대추리로 모인 마음을 엮어 책을 만든 이



대추리에서 마지막 촛불문화제가 있은 지 며칠 안 되었을 무렵, 다산인권센터에서 라디오 방송에 쓴다며 대추리 도두리 헌정 시산문집인 『거기 마을 하나 있었다』(도서출판 사람생각)를 엮고 출간하는데 실무를 도맡았던 송경동 시인의 인터뷰를 부탁해왔다.



“작품들 하나하나를 다시 모아 읽으면서 이렇게 대추리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게 가슴이 아프고, 그 마음을 다시 읽어낸다는 게 참 어려웠죠. 다른 것 보다 수십 년을 살아왔던, 맨 손으로 그 갯벌을 개간을 했던, 그리고 그 큰 공권력과 미국이란 세력에 맞서 3년여 동안 보기 힘든 싸움을 했던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또 쫓겨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모아졌던 마음들, 평화의 지대가 한반도에서 더 넓어지기를 바랐던 사람들의 바람이 무산되었다는 게 참 아프고 착잡하고 분노가 생기는데 다행스러운 건 마지막 촛불집회를 다녀와서 끝난 게 아니다, 패배는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억울하고 분하지만 최선을 다해 싸워왔다는 것, 그 과정에 대한 자긍심이 있는 거죠. 이게 새로운 평화운동의 출현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지난한 길이었고 좀 긴 길인 거 같아요. 대추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열망, 꿈, 희망, 분출되었던 그런 마음들을 잃지 않고 우리가 세워나가야 할 것이 어떤 것들인지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그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격월간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로 뜸을 들이고 있는데 “제 이력이 복잡하죠. 현장 노동자 출신에 소년원도 살고 나왔고 배 골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버님이 도박에 빠져들면서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뭐 이런 이야기 하자는 거 아닌가요?”하고 선수를 친다. 이처럼 그이는 인터뷰 내내 문학 소년의 풋풋함을 보이다가도 아차 하는 순간 저 삶의 밑바닥 냄새가 묻어나는 노회함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이는 ‘벌교에서 주먹자랑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말고, 순천에서는 인물자랑 말라’는 말에 등장하는 그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벌교가 사람이 좀 드세죠. 소금 서 말을 맨입으로 주워 먹고 뻘밭으로 십리 길을 기어가는 독종들이 벌교 사람이란 말도 있어요. 바닷가여서 그런지 그런 기질들이 있죠. 조정래의 「태백산맥」으로 건달의 도시에서 현대사의 무대로 화려하게 복권이 됐지만.
소년원에 왜 갔냐고요? 자취를 했는데 돈은 없지, 칼은 있지. (웃음) 그때는 위악적이었죠. 아버님은 장터에서 이런 저런 물건을 파는 분이셨죠. 도박에 빠진 아버지가 구타가 그리 심했어요. 밤마다 형제가 넷인데도 막을 수가 없었죠. 이년 저년 쌍욕을 하면서. 지금 같으면 당장 경찰에 신고를 했을 거예요. 요즘도 형제들이 만나면 감정적으로 흥분되고 그래요. 아직도 상처가 남아들 있으니까. 어렸을 때는 어떻게 호적을 파낼 수 없을까, 읍사무소 가서 알아보기도 했거든요. 오히려 나 혼자면 편하겠다 싶고 이런 가족을 아예 끊어버리고 싶어서. 그런데 부모님 동의가 필요하다네요. (웃음)
소년원에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실감했죠. 그때 변호사 선임을 하면 그 선임료를 서로들 나눠먹으니까 100만 원이면 나갈 수 있다 그랬는데…. 부모님 원망 많이 했죠. 아무리 먹고사는 게 힘들어도 자식이 이런데 들어와 있는데, 나가기만 해봐, 그냥 부모도 뭐고 없이…. (웃음) 안에서는 많이 싸웠죠. 찌그러지면 더 맞으니까. 전주소년원으로 갔는데 전주 월드컵파, 나이키파, 이리(지금의 익산)의 배차장파 이런 애들이 쫙 있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 안에서 서로 좀 편해보겠다고…. 열세 살, 열네 살짜리도 많았죠. 출생신고도 안 되어있는 애들이 들어와서 소년원 주소로 호적을 만들면 본적이 소년원으로 되는 거죠. 거기서는 교도관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그 인간들도 만만치 않았죠.”


그를 시로 이끈 무수한 아버지들



소년원을 나와 서울로 온 그가 찾은 곳은 ‘도시의 뒷골목’이었다. 어느새 우리도 그 시절 뒷골목 분위기 나는 <삶이 보이는 창> 근처 조그만 치킨집에 소주병을 두고 마주 앉았다.


“빠찡꼬, 삐끼집, 여자 장사하는 데도 있었죠. 얼마 전 ‘바다 이야기’가 양성화 됐다가 깨진 거잖아요. 그때도 사설 빠찡꼬가 양성화 되어 종로에 엄청 들어섰어요. 빠찡꼬에 나이는 어리지만 지배인이었죠. 삐끼집이라고 룸살롱보다 소규모로 호객행위 하는 삐끼들을 고용해서 술손님 데리고 가면 몇십만 원 바가지 씌우고, 항의하면 주먹으로 협박하고. 나는 삐끼를 했던 건 아니고 삐끼 관리자였죠. 유난히 광주에서 올라와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망가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거기서 보게 되는 망가지고 비틀어진 삶의 모습들. 외롭고 그런 거죠. 또 그 생활 자체가 미래가 없잖아요. 반건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내가 건달 길로 나갈 생각도 없고. 그러니 견디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면 길이 딱 하나잖아요, 노동자가 되는 거. 선택이라기보다는 운명이었죠. 목수, 배관공, 용접공. 울산의 석유화학단지로 광양의 제철소로 건설일용 노동자 생활이 시작됐죠.
노동자가 돼서 보니까 나이 먹고 그런 분은 다 아버지 같이 사신 분들인 거야. 그분들과 있으면서 아버지와 화해를 했다고 할까. 벌교에서 밤도망 쳐서 순천에서 조그만 상점 하고 있을 때 집에 갔는데, 나더러 찬장을 하나 짜 달래요. 해거름 판에 골목에서 그걸 짜고 있는데 아버지가 조수 노릇 했죠. 내가 못 좀 달라며 나도 모르게 ‘어이, 형님 거 못 좀 주쇼’ 해버린 거예요. 지랄 맞은 아버지지만 그래도 아버지인데. 어, 내가 지금 아버지에게 뭐라 그랬지? 얼굴이 뻘게졌죠. 경제적인 걸 떠나서 아버지가 참 가난한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들고 그 때부터 이해는 하게 된 거 같아요. 지금도 화는 나지만.”



그런 무수한 아버지들과 부대끼다보니 노동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 고민은 마침내 그이에게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힘들고 외롭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늘 벼랑 끝이고. 열심히 벌지만 넉넉한 삶이 가능치 않다는 것도 깨닫고. 또 이런 삶은 왜 잘 드러나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삶의 얘기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을 쓴다고 형편이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 희망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어찌됐든 종이 하나 펜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91년에 글을 쓰려고 서울로 올라왔죠. 그때 돈 3만 원 들고 왔어요. 서산종합화학단지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를 내서 그동안 벌어놓았던 돈 다 날리고 월급은 나오지 않고 서울은 가야겠고. 그래서 아버지한테 2만 원만 꿔달라고 했죠. 서울 가는 기차표가 2만 원이었거든. 그런데 이 인간이 정말로 딱 2만 원만 주는 거예요. 아무래도 서울 도착해서 만원은 더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문밖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다시 들어가서 만원 더 꿔갖고 나왔죠. (웃음)”



“민중과 노동자가 나를 선동했다”



빈털터리로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한 것이 91년 무렵.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함바를 전전하며 서울의 지하철 공사장을 돌았다. 그 가운데 그이가 찾은 곳은 구로노동자문학회였다.


“나랑 맞고 비슷한 데가 아닐까 해서 자발적으로 찾아왔죠. 격동기였던 80년대에는 노동현장에는 있었지만 말 그대로 노동자였지 어떤 의식은 없어요. 그렇지만 일용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저를 지탱해주는 힘인 거 같아요. 그 때가 90년대 초반이니까 주변에서 ‘노동문학 이제 끝난 거 아니야’, ‘이제 와서 거기 왜 가?’ 하는 사람들 많았죠. 이런 저런 회의가 든다, 이건 아니지 않냐, 이제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 이런 이야기 틈에서 활동과 글쓰기를 시작한 거죠. 하지만 내가 쭉 경험해 왔던 삶에 대한 진전이 없는데 꿈꾸기를 멈춰야 할 까닭이 없었죠. 구체적으로 구로노동자문학회가 했던 일. 공단으로 들어가서 책 빌려주고 같이 읽고 공부하는 거, 지금은 동네마다 도서대여점이 들어와 있잖아요. 물론 삶의 양식이 되는 책을 빌려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비디오 상영, 몇 년 지나니까 비디오 방 생겼잖아요. 상업 자본에 먹혔다고 볼 수도 있고 내용과 질의 차이도 있지만 그런 형식과 공간이 필요했고 지금도 필요하다는 건 증명된 셈이라고 생각해요.
97년인가 지역 노동자문학회 하는 이들과 노동자 생활 글쓰기를 위한 잡지가 하나 있어야 하지 않냐 하며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었죠. 다들 몇 달이나 가나 보자, 그랬어요. 길어야 1~2년 그랬죠. 그게 벌써 10년이네요. 이제는 잡지사로 또 출판사로 자리를 잡은 거 같아요. 또 노동자 생활문예운동이나 르뽀강좌, 이런 걸 하면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는 거 같고.”



그는 얼마 전까지 <삶이 보이는 창> 대표로, 편집인으로 활동해오다 그만두고 작년부터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문예운동가에 가까운, 시인으로 불리길 달가워하지 않는 시인이자, 행사시 전문 시인으로 각종 집회에서 행사시와 추모시를 도맡아오며 현장과 거리를 지켜왔다. 그 와중에 지난해 하중근 열사 추모집회에서 그가 낭송한 추모시가 문제가 되었다.


“남들 보통 세 번 받는다는 출두요구서를 다섯 번이나 받았어요. 그 건으로 해서 고소 고발했던 사람들이 다 정리하고 나만 남았다나 봐요. 그래서 경찰에서 정리를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식의 정리는 아닌 것 같아서 버텼죠. 출두해야 할 까닭을 못 찾겠다, 만약에 정리를 해야 한다면 경위서 정도는 써서 팩스로 줄 수는 있다, 그러니 처음에는 민주노총도 다 왔다갔는데 왜 그러냐 하더니 나중에는 그것만이라도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고 그 후로는 연락이 없네요.
농담으로 다른 문인들처럼 국가보안법도 아니고 폭력시위 선동이 뭐냐, 그런 말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영광이죠. 되도 않는 시를 갖고 그런 분들에게 선동했다고 하니 경찰이 어떤 문학평론가보다 내 시를 극찬을 한 거죠. 내가 뭘 선동할 수 있겠어요? 거기에 가서 시 하나 보탰다고 그 분들이 움직였겠어요?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그 분들의 삶이 저를 선도하고 선동한 거고.
지금도 마음이 좋지 않아요. 하중근 열사의 경우 명백한 공권력에 의한 죽음이잖아요? 또 노무현 정권은 노동운동이 비정규직을 챙기지 않는다고 매도했었는데 그 비정규직 노동자가 투쟁 과정에서, 이 사회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 근로기준법 정도를 지켜달라는 요구를 하다가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산 자들이 경찰과 그렇게 정리를 한다는 게 아닌 거 같은 거죠. 그래서 하중근 열사에게 미안해요. 혼자만 하는 싸움이 아니어서 사유서를 보내기는 했지만 동의는 안 되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대추리와 구로, 그가 딛고 선 현장



“문인들 사이에서 전 비주류예요. 그래서 위원장 하랄 때 좀 의아했죠. 나 같은 사람이 적으니 외롭고 쓸쓸하고 좀 억울하기도 하고 그렇죠. 또 그런 활동 자체를 뒤쳐진 일, 낡은 것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 있고 길이 있으니까. 그전에는 안타깝기도 하고 좀 더 많은 이들이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이 길만이 옳다거나 이 길이 전형적인 길이다 이런 것은 아니고. 오히려 외롭기야 개인의 방에서 고립되어서 도시인으로서 혼자 고민하고 글 쓰는 사람이 더 외롭겠죠.
대추리는 그런 의미에서 10여 년 만에 문인들을 구체적인 전선에 서게 해준 공간이었다고 봐요. 주민과 함께 연대하고 호흡하면서 그들과 함께 문화예술을 실행해 보고, 나름대로 행복한 공간이었고 역사적인 공간이었죠. 또 타 장르의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었고, 잘 갈무리가 되어서 앞으로를 잘 전망하고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요.”



이야기가 대추리로 돌아오는 사이 술병이 늘었다. 또 이야기는 대추리를 출발해 비정규직 차별철폐 노동문화예술전, 문화예술인 창작농활과 FTA반대 농민문화예술전 등으로 전국을 돌다 구로 지역으로 와서는 전태일 열사 이후 최초로 구로지역에서 분신을 했던 노동자, 박영진 열사의 20주기 추모식과 해방 후 최초의 노동자 동맹파업이었던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사업, 그리고 기륭전자를 비롯한 구로의 장기투쟁 사업장까지. 숨이 가쁠 만도 하고 술이 취할 만도 하건만 그이는 지친 기색이 없다.


“새로운 사회운동과 노동문학을 매체를 중심으로 고민하고 있어요. 흔히 87년 체제니 뭐니 하며 팔아먹고 있는데 제가 볼 때는 87년 6월로부터 쭉 이어져 나왔던 노동자 대투쟁의 맥락과 꿈이 무엇이었냐, 이게 중요한 거죠.
또 나무처럼 사람도 구체적으로 한 공간에서 뿌리를 박고 살다보면 향기가 나고 결국 만나는 거 같아요. 생긴 만큼의 꽃이나 열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노동운동이냐 인권운동이냐 문화운동이냐 뭐 이런 거는 다 해결되지 않을까요?
바닥에서 소년원에서 도시 뒷골목에서 비정규 노동자 생활하면서 배우고 느꼈던 것, 인식들이 활동하면서 과학적으로 정리를 한 것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때 느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요. 사회를 인식하는 거, 그리 어렵지 않아요. 피해가고 비켜갈려고 하니까 자꾸 복잡한 논리가 필요한 거죠.”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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