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차별과 경계를지우는 미디어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

지난 4월 9일 제9회 서울여성영화제 “이주여성 특별전: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다”에서는 정말 특별한 작품이 상영되었다. 9명의 여성 결혼이민자들이 직접 제작한 이주여성 영상일기가 그것이다. 제작과정을 담은 영상과 함께 9개의 완소작들이 이어졌다. 상영 후 제작에 참여한 이주여성들이 무대 위로 오르고 관객과의 대화 중,

제9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사람들에게 <F2M(가제)>과 단체홍보를 하고 있는 김일란(좌), 홍지우(우) 활동가


“그 나라에도 이렇게 한과 그리움을 담은 노래가 있나요?”


관객은 <그리움 그리고 꿈>을 만든 웬 티 몽 디엔에게 물었다. <그리움 그리고 꿈>에서 디엔은 베트남에 있는 가족을 그리며 고국의 노래를 구슬프게(선율만으로도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불렀다. 그리움, 한, 슬픔, 외로움 등의 정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 아니던가. 딱히 질문자의 취지가 ‘당신들도 그런 감정이 있나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붙이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주홍글씨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성소수자적 맥락과 다양성에 주목하다


소수자들은 으레 대상화되어 왔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권리를 말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위계화 된 사회질서가 강하게 작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이하 연분홍치마)는 카메라를 들고 성적 소수자들의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진솔한 삶을 보기 위해. 성적소수자들이 직접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적소수자들의 생생한 육성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들은 소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연분홍치마가 말하는 성적 소수자란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이주민, 장애인 등 위계화 된 사회의 권력구조-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주의, 자본주의로부터 배재되어 다층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처음엔 성정체성 운동으로 시작했는데, 성정체성 운동의 한계를 느꼈어요. 성소수자 집단이 단일하게 묶이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도 생겼고…” 홍지우 활동가는 단일해 보이는 정체성 밖의 복잡한 성소수자적 맥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정체성을 넘어 성적 소수자의 다양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진실한 소통의 다큐멘터리


2004년 6월 연분홍치마를 만들고 내부적으로 ‘***성문화팀’, ‘반성매매팀’을 구성했다. ‘***성문화팀’은 청소년이나 10대로 통칭되어온 ***여성/***레즈비언/***남성/***게이와 같은 다양한 성적 소수자들이 처한 억압된 환경을 드러내고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을 목표로 했다. ‘반성매매팀’은 성매매를 불평등한 성문화에 기인한 성폭력으로 규정, 기지촌 반성매매운동을 시작했다. 기지촌 여성들을 만나면서 ‘그녀들이 스스로 자신을 삶을 말하는 것’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통의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다큐멘터리가 거론되었고, 당사자의 ‘동의’라는 촬영원칙 아래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연분홍치마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 <마마상, Remember me this way>이다. 마마상은 포주와 성매매 여성 사이의 중간포주를 일컫는 말로, 기지촌에서 실제 마마상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통해 그녀들의 고민과 사회적 위치를, 사회적 편견이나 잣대 없이 ‘사실대로’ 드러내고 있다. 성매매 여성들의 존재와 삶을 가린 위선의 막을 거둬내고, 그녀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 그것이 사회적 소수자들과의 연대의 시작일 것이다.


지금 준비 중인 두 번째 다큐멘터리 도 동일한 고민의 연장선에 있다. 2006년도에 진행 된 ‘성전환자 인권실태 조사’에 참여하면서 성전환자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로 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담론이 없는 우리사회에 3명의 성전환 남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새 화두를 던지는 셈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구조가 규범화, 제도화된 한국사회에서 그 규범에 비껴서 있는 성전환자들의 법적, 사회적, 문화적 위치는 어디쯤인가?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의미화 되어 왔는가? “당사자들의 삶과 목소리를 통해 사람들이 성전환자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봐요.” 김일란 활동가는 말한다. 은 여성감독이 만드는 다큐멘터리를 지원하는 서울여성영화제 옥랑상(賞)을 수상했다. 상금은 바로 제작비 지원. 다음 제10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만날 연분홍치마의 두 번째 다큐멘터리, 이 견고한 지배질서에 어떤 균열을 낼 수 있을까 기대된다.



사회적 경험으로 확장될 때 편견은 사라진다


연분홍치마는 영상(다큐)을 만들면서 동시에 영상제작 방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앞서의 이주여성 영상일기는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의 교육의 산물이다. 물론 주관은 서울여성영화제 집행위원회와 당진문화원, 주최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지만. 지난 1월 10일~27일까지 당진문화원에서 결혼이민자들과 함께 ‘이주여성이 만드는 여성영화제작 워크숍’을 진행했다. 캠코더 기기조작법과 영상을 찍고 그 영상을 컴퓨터로 로딩하는 방법, 그리고 편집까지. 이 과정을 통해 결혼이민자들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한국에 온 후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당당하게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을 찍고 다른 언어(자막, 영상편집)로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미디어 리터러시도 익힌다. 언론이나 기존의 매체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조명하고 왜곡시키는지 비판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영상이 상영되면서 성적소수자들의 경험은 사회적 경험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사회적 경험을 통해 우리는 거부감이나 편견을 줄여나갈 수 있다. 이것이 연분홍치마가 생각하는 미디어 운동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막연한 거부감이나 편견… “이해의 기반을 만들어 나가야한다고 생각해요. 감정적 이해가 필요한데 이미지를 사용하면 매우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했죠.” 김일란 활동가는 말한다. 아무래도 문자나 말보다는 영상, 미디어의 이미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키니까. 우리는 영상세대가 아니던가.

치마의 역동성을 표현한 연분홍치마의 로고가 재미있다.


미디어워크숍은 지난해부터 시작했다. 장애여성 공감과 함께 한 ‘장애여성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미디어워크숍’이 처음이다. 지난 해 6월~9월까지 3개월 동안 교육을 하면서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 “언어장애인들과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우리가 보통 언어장애를 가진 사람은 청각장애인이라고 여기잖아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생기더라구요. 사실 그 분들은 청각장애는 없는데 말예요.” 김일란 활동가는 익숙함의 문제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언어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언어장애=청각장애라는 오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어가 조금 어눌해도 익숙해지면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도, 우리는 말이 안 통할 거란 지레짐작으로 왜곡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연분홍치마는 왜곡과 편견에 메스가 아니라 미디어를 들이댄다. 재생되는 일상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차별과 위계를 들춰냄으로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바꿔낼 수 있는 미디어.



미디어운동의 딜레마


올 한 해 제작과 함께 미디어워크숍 일정이 빼곡하다. 5월에는 10대 여성, 6월에는 동대문 지역에 거주하는 이주여성과 함께하는 미디어워크숍이 예정되어 있다. 새로운 교육주체의 발굴과 함께 이전의 교육주체들과의 계속 작업도 고민 중이다. 무엇보다 당진문화원 같은 지역적인 거점을 만들어 많은 성적 소수자들이 이런 기회를 접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편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영화제작 워크숍을 당진문화원과 진행할 수 있었던 건 그 곳의 시설이나 장비 등 기자재가 좋았기 때문이다. 영상제작, 이름만으로도 최첨단의 기기들이 연상되지 않는가.-_-’;


그러나 다른 곳에 당진문화원과 같은 수준을 기대하기는 무리일 뿐더러 연분홍치마에서 교육을 위한 기자재를 모두 구비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재정이래야 프로젝트 사업비와 배지나 엽서 등 물품 판매가 전부다. 다른 단체에 얹혀(?) 지내다 반지하의 독립된 공간을 구한 것도 얼마 전. 당연 활동비는 없다. 오히려 활동가 5인이 작년까지 회비를 냈었다. 돈은 없지만 연분홍치마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우리 수석 디자이너(웃음)가 디자인한 건데요. 치마의 역동성을 표현한 거래요.” 김일란 활동가가 로고의 상징성을 설명한다. 어느 방향으로든 튈 수 있을 것 같은 다면체의 치마를 입은 스마일맨. 연분홍치마가 딱 이 느낌이라면 좀 과장일까.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고… 활동가들 사이의 신뢰와 친근감 때문이겠죠.” 늦게 합류한 한영희 활동가가 친분까지 과시한다.



이 역동적인 연분홍치마의 활동은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운동으로 거듭나는 것 같다. 성매매 여성인권운동은 <마마상>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성전환자 인권운동은 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연분홍색일까? 공주병 내지는 유아 아동코너를 도배한 성별분리의 상징 연분홍이 꽤나 거시기 했다. “단체명을 논하는데 ‘연분홍은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6색을 모두 초월하는 색’이라고 하더라구요. 또 ‘모든 것의 경계에 있는 색’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래서 연분홍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차별과 억압의 경계를 지우고 함께 나아가는 연분홍이라면 뭐~ 좋지 아니한가.

사진 강곤 |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