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우월주의적 생각을 버려라”

허세욱 씨 분신에 담긴 메시지를 듣지 못하는 언론

4월 2일, 노무현은 한미FTA 협상 타결에 대한 대국민담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대하신 분들의 주장이 우리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그렇게 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4월 1일, 허세욱 씨는 한미FTA 협상을 폐기하라 외치며 분신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유서를 남겼다.


“망국적 한미FTA 폐지하라. 굴욕, 졸속, 반민주적 협상을 중지하라. … 토론을 강조하면서 실제로 평택기지 이전, 한미FTA 토론한 적 없다. 숭고한 민중을 우롱하지 마라. … 언론을 호도하고 국민을 우롱하지 마라.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은 싫다. … ”


그리고 4월 15일 허세욱 씨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걱정되시지요?” “자신이 없나요?” 능청스럽게 민중들을 희롱하며 브레이크 없이 민중의 삶을 벼랑으로 밀어버린 노무현이다. 그런 그가 한미FTA 타결 이후 발표한 대국민담화에 더욱 부화가 치밀어온다. 그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한미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협상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고, 전략적으로 그렇게 한 사람들도 있을 거라며 ‘감사’하다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는 열사가 되어버린 허세욱 씨의 ‘분신’이 노무현에게는 ‘감사’할 일이었던가. 민중의 삶을 고통 속으로, 그리고 화염 속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 머리 숙여 사죄는 못할망정 ‘감사’하다니, 기가 차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속보와 이모저모, 선전의 도구로 전락한 ‘분신’


초국적 자본의 흐름 속에서 공공의 가치는 허물어지고, 민중의 삶은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놓여진다. 한미FTA가 그러하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한미FTA는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마저 자본의 주판 속으로 밀어 넣는 죽음의 거래밖에 될 수 없다. 노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각층에서 한미FTA의 문제에 대해 폭로하고, 반대했다. 때로는 공권력을 앞세우고, 때로는 장밋빛 선전으로 죽음의 코러스를 부르고자 했던 정부의 오만과 불량한 양심을 향해 저항하였다. 그러나 언론매체는 한미FTA를 반대하는 의견에 대한 그 논리적 타당성보다는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들을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라 통칭하며 “집회를 개최하였다”, “반대가 거세지고 있다.”라며 한미FTA의 실상에 전혀 다가가지 못한 채 ‘행보’에만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다 집회라도 있는 날에는 경찰과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는지, ‘폭력’을 가하지는 않는지, ‘교통체증’을 유발시키지는 않는지 관찰하기 바쁘다.


협상 시한을 앞두고 언론매체는 매우 초조하게 협상 타결을 기다렸다. 협상 시간 48시간 연장을 기다릴 수 없는지 ‘협상 타결’이라는 오보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협상장 앞에서 허세욱 씨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며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분신’ 소식에 언론매체는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협상장 근처에서 ‘분신’이라니, 언론매체는 앞 다투어 ‘속보’를 제공하였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진보 언론사’라 자임하는 <민중의 소리>와 개혁언론이라 불리는 <한겨레>가 허세욱 씨의 분신당시의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전형적인 옐로저널리즘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민중의 소리>는 “‘한미FTA 폐기하라’ 50대 노동자 분신”이라는 기사에서 허세욱 씨의 분신 현장 동영상에 최소한의 처리도 없이 게재하였다. 독자들의 ‘불편함’과 ‘허세욱 씨의 인격적 보호’에 대한 논란의 댓글이 올라왔다. 인간의 삶에 대한 고통과 아픔, 참혹한 현실을 선전화의 도구로써 사용하고자 한 <민중의 소리>의 의도가 드러난 것에 대해 독자들은 항의하였다. 이는 명백한 반인권적인 언론행태이며, ‘특종중심’, ‘선전’, ‘과열경쟁’의 저열한 주류언론매체의 질서 안에 ‘진보 언론’을 자임하는 <민중의 소리>가 스스로 발을 담근 꼴이 아닐 수 없다.


‘속보’와 ‘과열경쟁’으로 허세욱 씨가 던진 메시지를 잡아내지 못한 언론매체들은 다시금 허세욱 씨의 분신을 협상장 ‘이모저모’로 취급하며 소개하기도 하였다[<한미FTA> 연장협상 이모저모(연합뉴스), 물샐틈없는 경비/협상장 이모저모(MBC), 한미FTA 협상시한 연장, 숨 가빴던 주말(매일경제), ‘운명의 48시간’ 어떤 일이 벌어졌나(머니투데이), <한·미 FTA 협상> 협상장 이모저모(서울경제) 등]. 더더군다나 mbn의 경우 “한미FTA, 숨 가쁜 하루… 긴장 고조”라는 보도에서 분신 ‘소동’이라며 허세욱 씨의 외침과 한미FTA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사람들이 놀라거나 흥분하여 시끄럽게 법석거리고 떠들어 대는 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데일리안>의 경우는 “일부 과격한 시위대는 분신을 하거나 집시법 위반혐의로 경찰에 연행되는 사태까지 이어지고 있어 이미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다”며, 한미FTA를 막아내고자 했던 허세욱 씨의 절박한 몸짓에 대해 ‘과격’하다는 평가로 ‘분신’의 의미와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깡그리 외면하면서 단지 노무현이 시민단체로부터 고립되고 있다는 정치적 해설만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렇게 4월 1일 한미FTA 폐기를 외치며 분신한 허세욱 씨에 대한 언론매체의 보도행태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한 ‘속보’를 중심으로 그리고 협상장의 이모저모로 치부되고 말았다.


4월 2일, 협상이 타결되기 전후로 국회중심의 기자회견과 입장발표가 줄을 이었다. 그 가운데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에서 ‘전여옥’은 막말 발언을 과시하였다. 전여옥은 “반FTA쪽에서 나오는 거의 공포영화 수준의 표현, 또 전혀 그 내용과는 반대되는 섬뜩한 시나리오 같은 것은 절대로 입에 내서는 안 될 것이다.”라며 한미FTA 반대의 목소리를 폄하하면서, “한미FTA의 물꼬는 노무현대통령이 텄지만 국회 비준까지 그 완성은 한나라당이 노무현대통령을 도와주면서 격려하면서 결국 주체는 한나라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며 웃지 못 할 코미디 같은 발언을 술술 풀어 놓았다. 그리고는 허세욱 씨의 분신에 대해서 “왜 이렇게 막장인생 15년, 벼랑 끝 인생인 분이 몸을 던져야하나?”란 말도 했다. 전여옥이 허세욱 씨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좌파’에 대한 공격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좌파’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급급했던 전여옥은 결국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막장 인생’, ‘벼랑 끝 인생’이라는 표현으로 허세욱 씨 삶을 비하하고 말았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막장’으로 표현하는 전여옥의 오만함과 당당함이 그저 안쓰럽다. 더더군다나 ‘지도부’를 운운했던 전여옥의 발언에서 ‘막장인생’이라는 것은 비주체적인 무지한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이는 곧 실천적으로 살아가고 학습했던 허세욱 씨의 삶에 대한 모독에 다름 아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막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매체에서는 전여옥의 오만한 발언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레디앙>이 “허세욱 씨가 막장인생이라고?”이라는 기사를 통해 ‘전여옥 최고위원의 비열하고 잔인한 인격살인’이라 평했지만, 이도 전여옥의 반론 게재와 기자의 실수 인정이라는 해프닝을 겪고 말았다. 전여옥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기사에서 재인용한 것이라 반론을 했지만, 당일 전여옥의 말을 꼼꼼히 살펴 들어도 그건 변명에 불과하다. 이처럼 ‘막말 정치인’의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매체 하나 없다니,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민중과 사회적 약자를 오히려 폄하하고 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 정치인을 눈뜨고 보고 있는 언론매체의 현실이 그저 암담하다.

고 허세욱 열사 장례식. 사진 | 참세상


의식세계를 점령하는 장치, 언론매체의 욕망


협상 타결 발표 이후부터 조중동문과 경제지를 중심으로 한미FTA 타결에 대한 전망이 쏟아져 나왔다. 협상 ‘난항’을 걱정했던 언론매체는 “한미FTA 체결 이후 포드 SUV를 타고 출퇴근하며 값싼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을 수 있으나, TV에서는 농민들의 시위가 계속된다. 씁쓸하다”(미리 가 본 2009년… 김 과장의 하루, <이데일리>, 4월 2일)라는 가상 시나리오를 적어내는가 하면, “난산(難産) 끝의 옥동자였다”(시한 연장 또 연장… 진통 거듭, <헤럴드경제>, 4월 2일)며 한미FTA 체결에 환호했고, 노무현에 대한 애정을 듬뿍 과시하였다. 여기에 한미FTA체결지원위원회는 한미FTA 타결 이후인 4월 3일과 4일 전국·지방일간지 60여 개 사에 10억 원 이상 광고비를 집행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아니겠는가.


이런 가운데 허세욱 씨의 분신은 4월 1일 ‘속보’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집회 ‘등’으로 분류된 이후 주류언론매체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협상단의 숨 막히는 1년 4개월의 행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한미FTA의 위협성과 문제에 대해서 발언했던 이들의 궤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매체는 너 나 할 것 없이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도전하며 잘살아 보자라며 주문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불길로 막아내려 했던 허세욱 씨의 실천에서 주류매체가 꼬집어낸 것은 ‘드세졌던 한미FTA 시위’에 불과하였고, 그저 궁금했던 것은 허세욱 씨의 건강상태였다. 또한 <데일리안>의 경우는 4월 4일 “‘반FTA’ 분신 허세욱 씨 ‘자살방조’ 의혹 제기”라는 기사를 통해 허세욱 씨의 분신을 민주노총이 방조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전형적인 언론매체의 ‘특종’만을 지향하고자 하는 저열한 저널리즘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난 4월 15일 허세욱 씨는 분신한 지 보름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꽤나 침묵하던 언론매체는 또다시 앞 다투어 허세욱 씨의 ‘죽음’을 알려댔다. 그리고 매체는 ‘가족장’을 고수하며 사망 24시간 내에 허세욱 씨를 화장한 가족들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유대를 맺어온 많은 활동가와 단체들이 요구한 ‘사회장’에 대한 갈등 관계만 초점을 맞춰 보도하였다. 지상파 TV는 허세욱 씨의 죽음을 ‘단신’으로 처리하였고, 허세욱 씨가 분신을 통해 사회에 발언하고자 했던 진실한 목소리에는 귀를 닫아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그간 언론매체가 조장해왔던 소위 ‘빨갱이’라 대변되는 ‘민주노총’, ‘민주노동당’과 함께 활동한 허세욱 씨의 죽음은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람이 한미FTA에 대해 무엇을 알고 극단적인 행동을 벌였겠느냐?”라고 혹은 입에 담기 어려운 정도의 댓글들을 만들어 내는 데 큰 힘 들이지 않고 성공하였다. ‘서울의 택시운전사 허세욱 씨’라는 칼럼을 통해 홍세화 씨는 “’‘20’이 부·지위·권력만 장악하고 있는 게 아니다. ‘80’의 의식세계를 점령하는 장치를 온통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허세욱 씨는 마침내 알아냈다. 서민대중을 스스로 배반하도록 하는 지배 헤게모니가 어떻게 작동되고 관철되는지를. … 사회 구성원은 정보의 주체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 채 그것을 자기 의식세계 안에 집어넣고 그것을 고집한다. 사회 구성원의 의식은 바뀌지 않고 20 대 80의 사회는 견고해진다.”라 밝혔다. ‘80의 의식세계를 점령하는 장치’ 가운데 상당부분 언론매체가 그 역할을 자임하고 있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그리고 사회의 기본적 권리를 위해 기득권을 향해 저항했던 민중들의 목소리를 왜곡하여 왔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인격적 예의마저도 기득권이 원하는 음흉한 댓글로 발현되고 말았다.



진실은 “우월주의적 생각을 버려라”


그러나 진실은 이러하다. 허세욱 씨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재편되는 초국적 자본의 흐름에 반대하며 분신하였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 준수’를 부르짖으며 분신하였다. 살인적 노동 강도와 저임금 등의 고통 속에서 살았던 1970년의 전태일과 공공의 가치가 붕괴되고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고통 속에서 살았던 2007년의 허세욱 씨는 참 많이 흡사하다. 그래서이다. 전태일 열사가 이후 노동운동과 노동환경 변화에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처럼 허세욱 씨의 외침과 분신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참혹한 상황과 한미FTA가 예고하는 민중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참담함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언론매체는 ‘특종’과 ‘침묵’의 경계 속에서,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랑곳없이 한미FTA 협상을 진행한 노무현과 경제관료, 초국적 자본과 돈에 눈먼 정치인들과 한배를 탄 채 민중에 대한 사회적 죽음에 대해 최소한의 비판과 책임의식을 버리고 말았다. 몇몇 매체를 제외한 모든 매체가 그리고 경제지들이 주판알을 튕기며 허세욱 씨의 죽음을 관망한 것이 사실로 남은 것이다.


언론매체는 소수자, 사회적 약자,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삶을 구성하는 민중을 박대한다. 권력을 꿈꾸며 기득권을 쟁취하기 위해 여론을 왜곡한다. 그러나 허세욱 씨는 초국적 괴물을 향해 대항하고, 오만한 노무현과 불량한 정치인들, 그리고 자본에 굽실거리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던져버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나팔수를 자처한 언론매체를 향해 외쳤다. “우월주의적 생각을 버려라 … 나는 이 나라의 민중을 구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허세욱 씨의 사회적 죽음에 대한 책임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남겨졌다.


그리고 허세욱 열사가 차별과 억압 없는 세상, 호혜와 평등의 공간에서 잠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