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걸으며 당찬 전복을 꿈꾸기

브르통의 <걷기예찬>을 보면 걷는 사람은 부자다. 걷는 자는 나무그늘에 몸을 눕힐 여유가 있기에 그는 시간의 부자이며, 추위와 더위, 해질녘의 행복과 고통, 길 옆 먼지의 떨림까지도 몸으로 느끼기에 그는 모든 감각의 경험자가 된다. 평범한 가치들이 새로운 의미로 와 닿는 것도 이 지점이다. 목표를 향해 일직선의 진행만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도저히 목도하지 못하는 그 ‘세계의 감각적 두께’를 터벅거리는 걸음에서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신의 시대에는 이런 경구조차도 어색해진다. 중국이 쫓아오니까 잽싸게 달아나야 하고, 일본이 저 멀리 내뺄까 봐 더 많은 박차를 가해야 한다.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으니 한미FTA에 목매달며 짧은 가랑이를 이리저리 찢는다. 사람의 시야는 그 속도에 반비례한다는 말은 과속 운전자의 치기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오직 ‘역사의 평가’로만 핑계 대며 수많은 전제조건들이 동시에 충족되어야만 가능할 장밋빛 전망 하나를 향해 외곬의 질주를 감행하는 위정자의 시야는 아예 레이저광선처럼 옆으로 산란될 줄을 모른다.


한미FAT의 피해 어민이 7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이 하찮아지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NAFTA에서 투자자-국가제소제로 인해 그동안 3,000만 달러에 달하는 돈이 초국적 자본들에 넘어갔음도 간단한 코웃음 하나로 스쳐가 버린다. 아! 이 얼마나 찬란한 미래인가. 그 당찬 미래의 약속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이렇게 ‘그 정도야’로 내팽개쳐 버린다. 또는 이보다 규모가 커지게 되면 ‘어차피’ 타령이 나타나 그 휘황한 미래의 역사를 가공한다. 어차피 중국 때문에라도 초토화될 농업부문이라면, 어차피 경쟁력이 없어 구조조정되어야 할 정밀화학과 정밀기계부분이라면, 어차피 우리 자체적으로라도 혁신해야 했을 서비스시장이라면….


그 끝없는 ‘그 정도야’와 ‘어차피’의 연속에서 줄곧 피폐해지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천문학적 규모로 휘황찬란한 보상과 지원의 계획도 이를 감당하지 못 한다. 피폐해지는 농업이야 어찌 보상되겠지만, ‘그냥 저 논밭떼기나 대충 갈아서 밥 해먹고 도회지 나간 자식들 배추나 좀 보내면 되지’라는 체념 속에 시나브로 스러져 버릴 우리 농촌 공동체는 어떻게 보전할 방법이 없다. 가혹한 구조조정으로 문 닫는 중소기업이야 정부가 얼기설기 감당하겠지만, 길거리로 내 몰리게 될 노동자들의 삶은 감당할 방법이 없다. 소비자후생 운운 하면서 풍성한 시장바구니의 전망이야 현란하지만, 광우병이니 유전자조작식품이니 혹은 대기 가득한 배기가스의 악취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은 개발과 성장의 속도를 앞세우는 경주자의 시야에는 가닿지 않는다. 되레 그를 걱정하는 우리를 두고 “발처럼 어리석다”는 프랑스식 비아냥거림으로 일관한다. 가마를 탈 지위도, 말을 탈 권력도, 자동차를 탈 재산도 갖지 못한 우리들을 두고 ‘휘, 물렀거라’ 하며 내쳐 버린다.


그러나 두 개의 발로 일어서는 순간 인간이라는 종은 탄생할 수 있었다. 자본만이, 혹은 그 위임을 받은 권력만이 활개 치는 종로거리 옆에는 그 두 발로 느직느직 어깨걸음이라도 할 수 있는 피맛골도 있다. 도저히 속도를 탐할 수 없는 그 골목에서 속 시원한 막걸리와 더불어 당찬 전복을 꿈꾸기. 질주하는 그들을 향해 그 ‘세계의 감각적 두께’가 실린 함성이라도 한번 질러보자. “우리가 사람이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