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그들’만의 가족

정상가족이 가족을 해체시킬 것이다




정상가족따위는 휴지통에 넣어라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왜냐고? 아마도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이 있기 때문이지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가정의 달’이기에 그 날들이 5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가정, 가족에 어버이와 어린이는 필수요소다. 이를 정상가족이라 하든 건강가족이라 하든 말이다.
정상(건강)가족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이러한 가족 개념과 형태는 가족(가정)을 억압의 공간이자 차별의 온상으로 만들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또한 가족은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한 방편으로서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며 사회의 복지를 상당부분 감당케 했다.
세계인권선언은 누구든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가족 구성권을 넘어 가족의 선택권, 가족 개념의 재구성을 이야기 하고 싶다. 개인과 개인의 친밀성에 기초한 다양한 공동체로서 가족을 재구성하는 것. 이것이 월간 <사람>이 ‘가정의 달’ 5월에 던지는 제안이다.


‘그들’만의 가족
가족의 위기? 가족의 진화!
보편적 수혜원칙에 입각한 가족정책이 필요하다
가족의 탄생, 구성할 권리 그리고 해체할 권리
30대 남성 활동가, ‘가족’을 말하다




가족이라! 가족이라 했을 때 떠오르는 가족은 한 없이 따뜻하고, 지친 몸을 끌고 돌아가도 포근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끝없는 사랑을 제공해 줄 것 같은 믿음의 서식지 같다. 어머니처럼 친숙하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처럼 그렇게…. 하지만 가족은 막상 가족에 대해 말하려고 생각하면 막막하고, 낯설기 그지없다. 전자의 가족은 내 머릿속에 심어진 이상적인 가족이고, 후자의 내가 말하고 싶은 가족은 현실의 폭폭함을 담고 있는 문제투성이 가족이다. 가족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의 최상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갖는 어떤 것으로 기억하고 그 기억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가족을 새롭게 구성하고 선택하고 싶은 사람들은 가족이 운명이라는 그 기억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애써온 기억을 망각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건강가정기본법은 가족의 다양성을 수용하기 보다는 특정 가족형태를 '건강가정'으로 내세워 특권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건강가정' 바깥은 결함이고 일탈이고 열등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나는 점자를 읽지 못한다. 한 글자도. 점자가 쓰인 명함을 받아들었다. 아무리 눈으로 점자를 보고 반복학습을 하고 손으로 느껴보려 해도 한 글자도 읽지 못했다. 내가 점자를 모름으로 인해 조금의 불편이라도 겪지 않고서는 나는 영원히 점자를 눈은커녕 손가락으로 읽지 못할 것이다. 체감되지 않는 문제, 불편함, 고통들은 아마도 그러한 맥락일 것이다. 기존의 가족에 대해 문제를 느끼고 가족에 대해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가족에 대해 체감하는 문제와 불편함, 고통을 말하고 있다. 가족에 대해 뽀사시한 이상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ideal)이 이런 말들 때문에 위협받는다고 말하며 자신들과 다른 이들의 논리를 부정한다. 금을 확실하게 그어 자신들의 가족을 지키려는 이들의 전략은 정상적이고 정치적 올바름으로 읽힌다. 다른 말로 하면 가족에 대해 한 번도 심사숙고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을 효과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은 내 운명?


‘가족’하면 떠오르는 것의 반대지점에는 바람난 여자들이 있다. 일에 바람이 나고 다른 여자에 바람이 나는 것 말이다. 일 때문에 가족 구성을 미루거나 영원히 하지 않기도 하며, 돌보아야할 아이가 있어도 일을 하는 것을 더 원하고, 혼자 살거나 여자들끼리 사는 것을 택하는 사람들 말이다. 왜냐하면 ‘가족’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모두 ‘여자’들이 해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혼률이 높아지거나 한부모 가족이 증가하고 어린자녀가 있는 어머니들의 취업이 증가하고 출산률이 떨어지고 입양이나 동성혼 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위기’이고, 해체이며, 누군가에게는 ‘변화’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사실 앞서 말한 것만큼 가족에 대해 쿨(cool)하게 거리두기가 가능한 사람은 드물 수밖에 없다. 인권운동가이건, 페미니스트이건 말이다. 오히려 이들이 더 모호함과 난감함에 허우적거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가족에 대해 수많은 논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적 특수성까지도 보인다. 가족이 무엇인지, 가족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고 서로 다른 집단들 사이의 불일치가 일어나며 그만큼 정치적인 특징을 명백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항상 보수적인 결정으로 회귀하곤 한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담론장에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으며, 보수적인 가족을 지켜내고자 하는 지배담론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파워가 사회, 문화 정책, 제도 그 모두에 켜켜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누가 가족이 위기라고 말하는가? 가족의 위기 논쟁은 지배세력이 널리 전파하려는 ‘그들만의 가족’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또 다른 표현일 뿐이며, 따라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형성된 가족 정책은 ‘그들만의 가족’을 지켜내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족의 변화라는 탈근대적 현상에 대해 비판적 성찰 없이 표피의 도덕성 상실과 가족 위기를 우려하는 것은 가족을 둘러싼 정치성과 억압적 권력의 본질을 외면하는 또 하나의 허위의식이거나 단순한 무지일 뿐1)이다.



다양한 가족은 필요 없다


가족은 그 태생부터 차별적이고 비정상적이었다. 과거의 틀로 현재를 보려하지 말자. 가족은 근대의 산물이며, 근대와 함께 등장한 잘못된 성별분업을 자연화하며 합법적인 것으로 공공연하게 가르쳐온 학교이다. 가족은 성차별적인 위계구조를 바탕으로 구분되어 있는 성역할을 강화하고 학습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차별적이다. 우리사회는 결혼 내 출산만을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으로 강화하고 있으며, 그 외 나머지의 경우, 즉 혼인이 성립하지 않거나, 결혼 밖에서 출산하거나 혹은 결혼 내에서 출산하지 않거나 결혼이 깨지거나 재결합하는 등의 경우는 정상적이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하다는 통념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가족은 천국이나 온화함의 온상이 아니라 뼛속부터 차별적이다. 가족 안에는 갈등, 폭력, 성차별적 성역할분리, 성폭력, 불평등한 성적계약, 책임의 불평등한 분배, 지배, 종속, 배려라는 이름의 간섭 등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헌법에서 보장한 평등권과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혼인 여부, 가족 상황, 소득수준과 취업여부에 따른 사회적 신분, 성적 지향, 그리고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적 요소가 있다.


현재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는 한계적이며, 그래서 차별적이다. 정상 가족을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가는 이데올로기이며, 그것에 권한을 부여하고 그것을 다른 것과 구분시킴으로 인해 그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으며, 다른 여타의 권력의 작동방식과 다르지 않고, 뿐만 아니라 차별을 비가시화 시키며, 편견의 작동방식과 많이 닮아 있다. 이러한 한계적 ‘가족’ 개념은 말하면 할수록 더 한계적이 되어 갈 뿐이다. 중심이 자신을 설명하는 것을 보았는가? 다양한 가족을 포함하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그냥 가족이라는 것이다.



정상가족은 정상인가?


정상 : 의학적 용어로 정상의 반대는 비정상2)



가족 : 법적으로 인정하는 혼인관계를 통해 구성된 가족


이데올로기 : 다분히 정치적인 개념으로 병폐나 문제점들을 효과적으로 가리기 위해 신성시하는 것(신화화)을 주요한 전략으로 사용하며 이를 통해 이득을 얻는 집단을 만들어 내고 이득을 얻는 집단조차도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또는 그에 작동하는 것


정상가족 : 남성생계부양자인 남성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여성 어머니가 결혼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고, 그 후 둘 중 한명이라도 불임(특히 여성의 경우)이어서는 안되며, 아이가 없어서도 안 되고 반드시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함께 중류층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이혼이나 사별하지 않으며, 사고로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지 않으며 다른 아이를 입양하지 않고 사는 가족을 말한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하여야 한다. 위의 언급 중 하나라도 빠질 경우 정상 가족이 아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란 법적으로 인정되는 혼인과 이를 통해 구성된 가족, 그리고 그 안에서의 출산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남성 생계 부양자와 여성 전업주부이면서 아이의 출산과 양육을 책임지는 상황(setting)을 일반화하고, 소위 정상적3)이며, 규범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얼마나 비정상적인가!



가족은 법에서 인정한 혼인과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법적 혼인 여부가 가족이냐 아니냐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기혼과 미혼, 법적인 혼인관계 여부, 이혼 등 혼인 여부 등을 이유로 특정한 혼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배제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가족은 소위 ‘정상’ 가족이 아니다. 가족은 법적으로 인정하는 혼인을 한계적이고 정치적인 보수성을 가지고 사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 구성행위의 자유를 제한하고 금하고 있는 것이다. 이혼, 사별로 인한 한부모 가족, 비혼 동거 가족, 법적 혼인을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애 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을 통해 효과적으로 정상가족을 지켜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적 혼인 여부는 가족상황과 관련하여 ‘합리적 이유’ 없이 가족의 형태나 가족 구성 방식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불리하게 대우하는데 핵심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부부 중심의 이성애적 가족을 정상가족으로 간주하는 것을 통해, 그 외의 가족은 모든 사회제도와 법에서 제외된다. 사회 구성원은 모두 그들이 원하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한부모 가족, 비혼 동거가족, 동성애 가족, 비혈연 공동체 가족 등 새롭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모든 사회에 있어 출산 그 자체는 사회 존속을 위한 필수적인 요구이지만 그 요구의 방향과 강도는 사회적 조건 및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혼인, 자녀, 가족의 중요성과 그 의미의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국가적 기획으로서의 출산 장려는 출산 행위자의 개개인 상황별 출산 수준의 차이, 사회경제적 변화가 출산에 미치는 영향, 가족제도 및 규범의 영향, 혼인에 대한 사회적 태도 등의 다각적인 방식을 고려하여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쉬운 방식’의 해결책만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쉬운 방식’이라는 것은 결국 ‘변화’의 과정으로 적응하기 보다는 기존의 출산과 관련한 사회적 제 상황(setting)들을 정상화 시키는 소위 ‘정상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기존의 관념과 가족제도, 혼인 문화, 출산 지형 등을 더 ‘건강’하게(어찌나 ‘건강’하신지) 만듦으로 회귀하는 방식인 것이다. 즉 소위 정상적인 가족, 출산, 성역할 등을 강화하는 방식이며 이를 통해 구성된 가족, 출산, 성역할이 ‘정상’적이고 ‘건강’하다는 규범을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현행 건강가정기본법을 보더라도 가족의 다양성과 가족의 변화를 수용하고 있기보다 특정 가족형태 만을 지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족 해체’라는 용어를 법조문에 명시하여 가족변화 현상에 대해 위기론적 진단을 내리고 있으며, ‘건강 가정’을 내세워 특정 가족을 지지 특권화하며 전체 사회체계와 각 하위체계간의 기능적 유기성을 제공하는 기능주의적인 가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 가족’이 특권적 위치를 점하면 점할수록 지배적 각본 바깥의 가족은 결함, 일탈, 열등함, 혐오스러움, 무책임한 것4)이 된다. 여전히 새로운 법안이나 정책들은 이성애 중산층 법률혼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혈통주의와 생물학적 어머니의 양육을 그 골조로 성차별적인 성역할분리를 강화 유지하여 소위 정상가족을 지켜내고 있다.



고정관념은 더 이상 사회를 유지시키지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5)으로 나뉘는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이분법이 우리의 인식론을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의 상상력은 희망적이지 않다. sex/gender/sexuality에 대한 사고가 바뀌지 않는 한 그 상상력은 고갈될 수밖에 없으며, 한계적이고 변화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수는 진보의 반대가 아니라 바뀌지 않으려는 것이다. 가족은 gender6)관계의 변화와 섹슈얼리티 지형 변화, 그 중심에 있으면서, 이러한 변화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변화하지 못하게 하는 보수의 온상으로 기능하고 있다. 질문과 의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의 경우, 가족 개념과 형태가 소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식이어서 혼인 밖에서의 출산은 여전히 낙태로 이어지고, 이혼이나 재혼의 경우 역시 자녀가 걸림돌이 되거나 입양의 제한이나, 혈연 중심으로 인한 불임가족 지원이나, 동성가족을 인정하지 않거나 동거 커플에 대한 법적 권리가 없거나 등의 상당히 단일한 가족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혼인관계 내 출산율은 통계적으로 안정적이다. 왜 그러한가? 불평등한 성적 계약인 혼인은 그냥 하나의 통과절차나 의식이 아니라 메커니즘이다. 불평등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아주 강력하고 체계적 역사적으로 구축되어온 메커니즘이다.


가족 개념과 형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가족은 낭만적이기 보다는 억압적일 것이고 차별의 온상이 될 것이다. 게다가 출산과 양육의 전담자였던 여성, 그리고 그러한 여성으로서의 가족 내 지위가 일과 출산·양육을 겸해야 하는 것으로 변화되면서 일·가정 양립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부담을 갖는 경우, 출산을 지연하거나 기피하게 되고, 출산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이는 결혼에 거는 기대와 희망, 바램 등 혼인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결혼과 출산 보다 직장 생활이 훨씬 더 선택하기에 매력적인 것이 될 것이며, 정상 가족의 짐은 과부하가 걸리고 다른 형태의 가족들은 정상가족에 밀려 건강하지 못한, 바람직하지 못한 가족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말

1 다이애너 기틴스(1985), 가족은 없다, 안호용, 김홍주, 배선희 옮김, 일신사, 1997. 역자 후기 중. 2 비정상이라는 것은 생명력이 없으며, 정상이 되도록 처치를 하거나 치료하여야만 존재가치가 있다는 의학적 진단과 무관하지 않다. 3 법적으로 인정되는 혼인과 이를 통해 구성된 가족 안에서 출산이 이루어지며, 남성 생계 부양자와 여성 전업주부이면서 아이의 출산과 양육을 책임지는 상황(setting)을 일반화하고 규범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보이게 한다. 4 Scanzoni,2001;695 5 A와 not A로 나뉘는 방식은 항상 그렇다. 6 성인지적인 것과 성중립적인 것은 다르다. 인권적인 것과 차별적이지 않는 것 또한 다르다. 여성부가 왜 여성가족부가 되었으며, 가족이 왜 여성의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