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이에요, 당연하지] 좋은 게 좋은 것은 아니다

친밀함이 주는 두려움

대학교 때 친구 중 하나는, 상당히 키가 작고 아담한(보통은 왜소하다고 표현하는) 체형의 소유자였다. 물론 그 체형에 걸맞게 얼굴도 꽤나 동안이었다. 어려보이는 얼굴과 작은 체형 때문에, 종종 어린아이 취급을 받곤 했던 친구는 가끔 등교할 때 타는 마을버스에서 기사아저씨가 초등학생 요금을 받았다며 ‘오늘도 차비 아꼈다~’라고 재미있어 하곤 했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던 그런 상황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그 친구를 따라 같이 웃어넘겼다. 가끔은 어린아이 쓰다듬듯 그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에피소드들이 참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 친구에게 늘 그렇게 재미있는 일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어려보이는 외모 탓에 그녀는 어딜 가나 어린아이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가면 늘 신분증을 제시해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서 일을 할 때는 아직 덜 자란 사람 취급을 받았으며, 종종 그 때문에 그녀는 ‘모든 일에서 미숙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편견에 맞서느라 모든 상황에서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다. ‘금발이 너무해’라는 헐리웃 영화에서 꼬집었던 ‘금발 미녀는 머리가 나쁘다’라는 편견처럼, 어려보이는 외모는 ‘미숙하다’라는 편견과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어린애인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똑똑하네?


그러나 그 친구에 대한 편견은 외모를 통해서만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말해줬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어려보이는 외모였고, 또 하나는 그에 어울리지 않게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가수 이모씨를 연상시키던, 약간 비음이 섞인 목소리는 그녀의 외모와 결합되면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게 다만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면 좋았겠지만,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어린아이 같은 외모와 그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칭찬이 아닌 ‘귀엽다’는 말로 표현되었던 그 친구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때론 ‘어린아이의 장기’처럼 받아들여졌다. 딱 부러지는 명쾌한 의견을 낼 때도 ‘어린애인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똑똑하네.’라는 놀림이 되돌아오는가 하면, 가끔은 화를 내며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조차 그 목소리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안 어울린다’는 거였다. 어느 날, 예의 그 목소리로 심각하게 그녀가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친구들은 다들 웃지 못했다. 목소리와 외모에 대해 오래도록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말에 매일같이 그 둘을 가지고 놀려대던 사람들이 차마 웃을 수 있었겠는가.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며 영원히 신뢰를 주고받을 것 같던 친구들은, 결국 “너나 가라, 하와이”라는 말로 끝이 났다. (영화 ‘친구’에서) 미안한 것 없는 친구사이였다지만 ‘시다바리’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은 참지 못했나보다. 사람들은 보통 관계의 시작이나 끝만을 기억하지만, 관계를 어떻게 유지시켜왔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물 흐르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도 잘 익어 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상대방에 대한 인식을 언제, 어떻게, 왜 그렇게 고정시켜버렸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내 친구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원래 잘 웃는 사람이어서, 원래 그렇게 생겨서, 원래 유쾌한 사람이어서, 원래 착하고 부탁을 거절 못하는 사람이어서….



친밀감으로 포장된 폭력들


심리학자 Reis & Shaver(1998)의 친밀감 모형에 따르면 친밀감이란 1. 자신의 이야기를 얼마나 털어놓는가, 2. 상대방이 얼마나 내게 속마음을 이야기한다고 느끼는가, 3. 내 이야기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가(공감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정의될 수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삶의 과정들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들을 얼마나 많이 공유하고 공감하는가에 따라 친밀감이 결정된다는 것일 게다. 평상시의 80~90%의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원래’의 모습과 비슷하다 해도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영원한 관계를 위해서는 영원한 노력도 같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고정관념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이제는 누구나 폭력으로 인지하고 있는 데이트 강간, 가정폭력의 경우는 친밀감으로 포장된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녀가 머뭇대는 것 같아서 제가 좀 강하게 밀어붙인 것일 뿐이에요’, ‘때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때렸겠죠. 그쪽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그 정도도 이해 못하면 어떻게 삽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요.’, 이런 이야기들의 화자는 이 말의 청자들에게 더 이상 친한 관계로 이해될 수 없다. 단순히 신체에 위해를 가했다는 문제가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나의 속마음을 드러내면서 상대방에게 주었던 신뢰감을 폭력으로 되받았다는 것이다.


앞서 들었던 나와 내 친구의 이야기처럼, 친한 친구 사이는 서로의 허물이나 잘못된 점을 마구 들춰내어도 괜찮은 사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신뢰를 더해주는 사이어야 한다. ‘우리 친구 아이가?’라며 끝이 살짝 올라가는 말을 들을 때 기분이 과히 좋지 않은 것은, 화자가 자신을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말 들어라~ 응?’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서일 것이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이나 불합리함도 참아줘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친구’의 사전적 의미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다. 진짜 가깝고도 오래 사귀기 위해서는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넘겨짚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좋은 게 좋은 것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까운 거리일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린 친하니까’는 ‘우리 사이에 이런 대우쯤이야’와 같은 말이 아니다. 재미있자고, 웃자고 하는 말 속에 관계를 끝장내는 칼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한번 쯤 되새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