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한상희의 쇳소리] 인권무지로소이다

하나를 희생시켜 다수를 위한다고 할 때, 언제나 희생되는 사람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위함을 받는 다수는 막연한 존재다.” 이병주는 그의 소설 『지리산』에서 증오로 가득 찬 좌익인사를 두고 이렇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 경구는 자신의 역할을 망각해버린 법무부의 인권의식에 그대로 투영된다.


최근 발표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은 인권의 의미조차 제대로 포착 못한 법무부와 이 정부의 무지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인권의 근본은 “다수”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권력과 폭력으로부터 “하나”를 보호함에 있다고 한다면 법무부의 이 NAP는 되려 다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하나”의 희생을 방치하거나 방관한다. 혹은 그 직무유기를 통해 지난 권위주의체제가 수여한 자신의 권력을 보전하고자 하는 음모까지도 드러낸다.


이 NAP는 2001년 유엔의 권고와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안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정작 그 핵심이었던 인권문제들-사형제폐지나 양심적 병역거부, 국가보안법 등-은 하나같이 외면된다. 고용차별, 시설생활인이나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문제 등 이 시대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에 강요한 인권문제 또한 누락되어 있다. 더구나 오늘날 인권은 어떤 의미로 인식되어야 하며 그 이념과 비전은 무엇인지 혹은 그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등 정녕 중요한 사항들은 아예 누락되어 있다. 그저 현재의 상태를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여 간략히 열거하고 그 임기응변식의 대응방안만 몇 가지 골라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이 NAP는 인권문제에 소극적이고 더러 적대적이기조차 하였던 법무부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혹은 ‘경제’와 ‘성장’이라는 명분으로 소수자들이 겪은 억압과 질곡의 현실들을 송두리 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NAP는 ‘하나’의 아픔을 감싸는 정의의 기관(department of justice)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다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의만을 강제하는 권력기관(the Department of Justice)으로 군림해 왔던 법무부의 편향된 시선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법무부 인권국에 있다. 인권보장을 위하여 설치된 인권국이 되려 인권에 방관적이거나 적대적인 조직이 될 수도 있다는 예후조차 읽혀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휴대폰감청이나 통신자료보관제도는 물론 법무부가 추진하고 있는 형사사법통합망 등의 사업은 그 자체 가장 반인권적인 것이다. 하지만 인권국은 자기 조직 안에서 진행되는 이딴 식의 국가폭력 하나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다. 되려 국가인권위원회의 NAP 권고안조차도 제대로 새겨내지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시민사회의 인권요청들을 국가정책이나 국가계획으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차단하는 방벽이 되어 있을 뿐이다.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우리 인권레짐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법무부 인권국이 정작 걸러내어야 할 것은 방관하고, 진정 수용하여야 할 것은 배척하는 역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이 NAP를 두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인권보호에 앞서 나간다”고 하였다는 언론보도는 소름끼칠 정도로 경악스럽다. 인권국을 내세워, 계획을 현실로 대체하고 인권의 요청을 권력의 논리로 환원해 버리는 이 법무부의 소행을 두고 “법무부가 인권보호기관으로 자리매김 되었다”고 말하는 지경 앞에서는, 그저 우리는 “인권무지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