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이슈] 87년 6월, 복종에서 불복종으로

항쟁이 일깨운 불복종 운동의 의미

6월 항쟁과 불복종 운동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에 응한 후, 이를 후회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글을 쓰려고 내용꺼리를 찾던 중 ‘난 87년 6월에 뭐 했나’ 하고 생각해보니, 당시의 나는 1977년에 태어나 우리 나이로 11살, 초딩 4학년에 불과했던 때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87년 6월 항쟁’이라는 말을 워낙 많이 듣고 접하다보니 그 단어가 익숙할 뿐이었지, 그 과정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거나 항쟁의 결과로 인한 사회적 변화를 체감할 만큼의 나이는 못 되어 글을 풀어갈 만한 소재를 거의 갖고 있지 않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었다.


사진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등학교 4학년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이런 글을 청탁했나.’ 하는 그 분(?)에 대한 원망이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40대 미만의 연령대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위안을 하며 글을 써 가보려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6월 항쟁과 내가 아예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80년대 어느 풍경



#1 1985년 밤 9시 어느 가정
저녁을 먹고 TV 앞에 옹기종기 모인 식구들.


9시 시보를 알리기 직전, TV에서는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라는 방송이 나오고 아이들은 최면에 빠진 양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9시를 알리는 “땡~” 소리와 함께 뉴스 아나운서의 멘트가 시작된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



#2 1987년 대전 ○○국민학교
시험 기간이 아님에도, 학생들은 누런 갱지에 인쇄된 시험지를 갑작스레 받아든다. 가만히 보니, 그 시험의 내용은 이미 한 달 전에 치렀던 것이었다. 그 중 몇 명은 예전에 본 시험이라고 이야기하였지만, 선생님은 그냥 풀라고만 하신다.
그 시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다음 빈 칸에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1. □□□ 대통령 □□
2. 이순자 □□□ □□



앞의 장면은 1980년대 밤 9시가 되면 어느 가정에서나 있었을 만한 풍경을 가상으로 재현해 본 것이다. 비록 가상이기는 하나 당시의 10대라면 어린이 조기취침 캠페인과 함께 잠자리에 들은 기억, 그 이상의 연배이시라면 9시 “땡” 소리에 이어 곧바로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으로 이어진 ‘땡전뉴스’를 시청한 경험과 기억을 아마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두 번째 장면은 결코 상상으로 만든 사례가 아니다.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실제 경험했던 것으로서, 이러한 시험을 전국에서 다 보았는지, 아니면 대전 지역 또는 내가 나온 학교에서만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의 이름과 그 부인에 대한 호칭을 묻는 어이없는 내용의 시험이 실제로 치러졌다.



정권의 정치적 무뇌아 시도를 무산시킨 6월 항쟁


1980년대를 관통했던 여러 사건들, 즉 전두환 일당이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12.12라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서울의 봄’이라는 사회 민주화 분위기를 억압했던 일, 민주화를 간절히 갈망했던 광주민중들을 총칼로 학살하고 정권에 반대했던 이들을 강제구금.고문.살인을 저질렀던 사건들만으로도 당시 군사독재정권이 얼마나 부도덕했고 비열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하지만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단지 국민들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방법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여론의 매개체인 언론을 통폐합하고, 3S(스포츠, 섹스, 스크린) 정책으로 국민들을 현혹시키며, 교육을 통해 어린 학생마저 세뇌시키는 식의 온건한 방법 또한 동원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방식은 온건했을지 모르나, 이것이 실제 의미하는 바는 그리 온건하지 않다. 언론 통폐합은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고 자신들의 이야기만을 일방적으로 선전한 것이며, 3S 정책은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즐거움을 만들어 놓고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실에 눈감도록 유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앞선 땡전뉴스의 사례는 그날 일어난 어떤 중요한 사건보다 대통령이 어디에 갔으며,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단순 동정 기사를 먼저 알도록 강요하고, 대통령 이름 맞추기 시험을 본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들을 지배하는 대통령과 그 가족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그 이름, 호칭을 반복하여 외우도록 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국민의 사고를 마비시킴으로써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마저 지배하고자 했던 그들의 시꺼먼 의도를 알게 하는 사례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1987년 6월 항쟁은 무자비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에 머물지 않는다. 일방적인 선전, 이성의 마비, 교육을 통한 세뇌를 통해 국민들을 정치적 무뇌아로 만들려고 했던 그들의 시도가 무의미했음을 뜻함과 동시에, 국민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섰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국민들이 국가의 명령에 순종적인 성실한 신민(臣民)에서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市民)으로 성장하였고, 국가의 틀 역시 권위주의 독재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1987년 6월 항쟁에 따른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그 의미는 불복종 운동이 갖는 그것과 정확히 맞닿는다. 우선 근대국가가 형성된 배경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구체제의 귀족 계급을 몰락시킨 근대 혁명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불복종 운동은 현행 대의제 민주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좀 더 설명하자면, 헌법 제1조 제2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되어 있듯이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라면 어디나 국민주권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하는 직접민주제가 아닌,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대의제를 따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대의제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주권을 가진 국민들과 그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자들 간에 의견이 반드시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써, 국민들은 어떤 법을 제정하거나 정책을 시행하기 원하더라도, 대표자인 국회의원들이나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이를 강제할 방법이 거의 전무한 사례가 바로 그렇다.
이 때 권력은 국민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닌 대표자들의 수중에 있다고 할 것이며, 대의제는 민주주의 정치 제도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합법적인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진정한 주권자인 국민이 자신의 권한을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불복종 운동이다. 이러한 면에서 권력 획득의 정당성마저 존재하지 않는 독재정권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것을 본래의 주권자가 되찾아 간 사건이 바로 87년 6월 항쟁이다.

6월항쟁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들어간 정권에서 한미FTA가 체결되고 평택 미군기지가 확장디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이들은 불법시위자가 되었다. 참된 항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난 3월 한미FTA 협상장인 하얏트 호텔 앞에서 인권단체 기자회견. 사진 | 강곤


기념 이벤트를 넘어 진정한 민주주의로


다시 서두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6월 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에 나는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하였지만,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6월 항쟁으로 인해 더 이상 ‘땡전뉴스’를 보지 않아도 되었고, 빈칸을 채워가며 “전두환 대통령 각하, 이순자 영부인 여사”를 되뇌지 않아도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커서는 말 한마디 잘 못할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갑자기 어딘가로 끌려가 고문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무엇보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6월 항쟁으로 인한 이러한 변화는 나 개인 또는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만이 아닌,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는 민주화와 인권의 수준이 한 단계 성숙해졌으며, 그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항쟁 20주년은 다함께 기뻐하며 기념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의 지금 현실을 살피면, 과연 기뻐하고 기념해야 하는 일이 맞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된 6월 항쟁의 정신이 무엇인지 살피고 이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은 채, 하나의 이벤트로 이용하려는 행태만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항쟁이 있은 후로부터 20년, 그리고 현 시점의 정치 상황을 되돌아보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1987년에 머문 것이 아닌지 하는 불길함을 갖게 한다. 특히 6월 항쟁에 참여했다는 인사들이 정권을 장악한 후 벌어진, 한미FTA 체결 및 평택 미군기지 건설과 같은 여러 비민주적 행태들은 이 불길함을 현실로 여기게 한다.


6월 항쟁이 일어난 그 때, 난 비록 11살에 불과했지만 다음 세 가지만큼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6월 항쟁을 과거에 일어났던 커다란 사건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항쟁의 의미를 퇴색, 아니 아예 없애버리는 일이라고. 항쟁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시민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불의를 타파하기 위해 당당히 행동한 것에 있다고. 그리고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6월 항쟁, 그리고 불복종 운동의 정신을 계속 이어나가고 행동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