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이에요, 당연하지] 40대에는 뭐 하고 놀까?

편향된 유흥문화의 지겨움

택시를 탔다. 늘 그렇듯이 나보다 평균 15살 이상은 많으실 것 같은 아저씨 기사님이 계시고 대개는 라디오나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게 된다. 트로트가 흘러나오는 테이프는 거의 필수인 것으로 보인다.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 라디오를 들으시는 기사님들의 카오디오를 흘끗 훔쳐보면 십중팔구 테이프 하나가 꽂혀있다. 요즘엔 TV 수신기나 동영상 재생이 가능한 네비게이션을 단 택시를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덕에 생전 처음 나훈아를 비롯한 여러 트로트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몰아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특정집단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문화 코드


어쨌든, 운전기사들의 문화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트로트 테이프다.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트로트, 뽕짝 메들리 50!’ 따위의 테이프는 없으면 뭔가 이상하고 허전한 기분까지 들게 한다. 이렇게 어떤 특정 집단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연상 작용이 떠오르는 문화 코드가 있게 마련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생각하면 왠지 종로의 탑골공원이 떠오르고, 직장인 남성들을 떠올리면 넥타이를 머리에 질끈 매고 노래방을 뛰어다닐 거라는 상상을 한다거나, 20대 여성들은 화장품과 옷가게, 젊은 사람들은 홍대 공연장이나 콘서트,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7080세대 가수의 디너쇼…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지난번 월간 <사람>의 특집 기사 중 하나인 ‘저 노래는 많이 들어서 좋아진 걸까?’에서 ‘거울 뉴런’이라는 말을 처음 봤다.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이를 따라 하는 사람의 뇌의 특정부위에서 활성화되는 것으로 밝혀진 뉴런’이라는데, 아마도 특정한 문화상품이나 경향이 유행을 타는 것에 대해서는 문화시장의 독점과 거울 뉴런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어렵게 얘기하지 않아도 나는 이 문제의식에 바로 수긍할 수 있다. 거의 20여년 가까이 전래동요처럼 전해지는 CM송들만 봐도 그렇지 않나? (손이 가요♬ 손이가~ XXX에 손이 가요♪~) 한 번 입에 붙으면 하루 종일 도대체 떨어지지 않는 것들은 대부분 철지난 유행가이거나 오래된 CM송처럼 반복학습의 결과를 통해 머리와 입에 완전히 각인된 것들이다.


그래도, 이런 반복학습의 태풍을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다. 내가 너무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여사님(어머니~)은 올해 나이 59세. 우리 여사님이 38세일 때, 집안 제사 때마다 숙모님들이 즐겨보시던 나훈아, 패티김 콘서트에 질려하시며 마이클 잭슨의 새 음반을 사오라고 내게 바가지를 긁으셨고,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지면 눈에 잘 들어오는 원색을 좋아하게 된다는 생물학적 특성까지도 무시하시면서 아직도 빨간색 등의 원색이라면 질색을 하시는데다가, 케이블 TV의 자막이 잘 안보여서 화를 내시면서도 나랑 똑같이 30대 싱글 여성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미국 드라마를 보며 정신없이 그녀들의 패션을 품평하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나야 이런 어머니와 친구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문제는 나와 우리 어머니가 항상 같이 놀 수는 없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동네 친구 분이나 동창들을 만나고 오시면, 대체 뭘 하고 놀았는지 너무 재미없다고 푸념을 하시는 거다. 식사하고 카페를 가는 것 이외에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맘 편하게 쉬면서 놀 수 있는 곳이 거의 없고, 잘해야 등산을 하거나 좀 더 적극적인 분들이라면 성인 콜라텍(건전하거나 아니거나는 논외로!), 노래방 말고 뭐 할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재미가 없으시단다. 물론 미술관도 있고, 공연장도 있고, 극장도 있지만, 그런 문화생활은 사실 사전지식이 없으면 쉽게 접근하기도 어렵고, 눈 나쁜 사람(시각, 청각 장애인들도 포함해서)에게 극장이라는 곳은 마냥 즐거운 문화공간은 아니다. 결국, 우리 여사님의 선택지는 기존의 문화권에 흡수되어 트로트와 화려한 원색의 옷을 고르고 성인 콜라텍, 단란주점을 선택하시든가, 아니면 재미없음을 감수하고 어쩔 수 없이 지겨운 시간을 보낼 각오를 하시든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닫힌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폭력


이는 우리 어머니만의 문제는 아니다. 청소녀/청소년들도 그렇고, 문화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고 있다는 20대 역시도 선택지가 별로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기야, 뭘 선택하게 되건 간에 그것이 그 세대에 걸맞는 특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손가락질 당하기 십상이다. 더운 한여름에도 남성정장이 반팔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는 공식과 정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닫힌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폭력이다.


물론 대중문화가 원래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것을 고려한다고 하면, 기성품이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울며 겨자먹기’로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나 혼자 특별한 것을 갖고 싶다고 떼를 써봐야 자본가들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면 당연히 만들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문화상품은 그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사용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고, 문화 상품을 통해 얻는 것은 물리적인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화를 향유하거나 취향을 공유하는 집단들과의 공감대이다. 다분히 정서적인 측면의 이점을 얻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형태의 시장이 형성된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은 인간의 생존(너무 거창한가?)에 꼭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정서나 감정, 느낌들을 모두 14.8㎝ × 6.8㎝의 직사각형 종이에 그려진 세종대왕님의 초상화 몇 장으로 정확하게 등가 교환할 수 있도록 계량화 할 수는 없다.


미술교과서에 항상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회화 작품인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는 새로운 상상력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 인류의 조상이 왜 다리가 8개인 소를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진화하기 전 소의 다리가 8개였을 리는 없을 것이고). 그냥 그 조상은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을 것이다. 문화도,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을 상품으로 살 수 없다면, 내가 만들어서 놀 수 있는 상황이라도 됐으면 한다. 대체 왜, 소위 ‘다양성’과 ‘개성’을 표현하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자신의 다양성을 표현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획일화와 무개성으로 정리되어 버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