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함께 가는 희망한국?

비전 2030과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장마 기간이다. 예전에는 비가 내리는데 우산이 없으면 맘 편하게 그냥 맞고 걷는 걸 택했다. 흠뻑 젖어 보는 게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도 그런 기분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비를 맞을 수가 없다. 왜? 가방 속에 핸드폰이며 MP3며 모셔야 할 상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비를 맞아도 그것들을 젖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년 전에 발표된 ‘비전 2030(아래 ‘비전’)’을 가지고 왜 이제 와서 월간 <사람>이 비판 글을 써달라고 하는 걸까 궁시렁거리며 ‘비전’을 살펴봤다. “함께 가는 희망한국”을 위한 것이라는 비전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이런 것이다. 결국 ‘비’를 맞을 수 없다는 얘기네.



복지도 하면 된다?


언제나 파이를 크게 만들면(즉 경제 성장을 하면) 복지가 향상될 것이란 얘기를 들어왔다. 그런데 ‘비전’은 약간 비틀어 달리 말한다.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동반성장 전략”, “복지는 소비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복지도 경제처럼 하면 된다’는 소리로 들린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함께 맞을 수 있는 비가 아니라 가방 속에 든 상전(경제성장) 때문에 피해가야 할 비가 복지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이런 나의 느낌과는 달리, ‘비전’은 복지의 확충을 소리 높여 얘기하고 있다. 솔직한 현실 진단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집 문제.사교육비에 시달리고, 애 낳기 겁나고, 노후도 불안”, “가족 중 한사람이 아프면 집안전체가 빈곤층으로 추락”, “패자부활의 기회가 사라져 가난이 대물림 될 가능성”이 ‘비전’이 바라본 한국의 현실이다. 이에 비전은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나 “국민의 삶의 질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라 자탄한다. 그러기에 이제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동반성장 전략이 필요”하며 성장전략은 “시장주도”, 복지전략에선 “정부의 역할을 제고”함으로써 희망을 가지는 “기회의 나라”로 나아가자는 것이 ‘비전’의 요점이다. 여기서 “어느 정도의 복지수준을 얼마만큼의 국민 부담으로 추진할지”에 대해선 “국민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겨두고 있다.



비전이 ‘비전’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실 진단 부분이다. 정부는 집 문제, 사교육비, 질병, 저출산, 고령화 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런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며, 대다수 국민이 체감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런 현상이 드러난 원인에 대한 진단은 없는 것 같다.
왜 집 문제, 사교육비, 질병이 문제가 되는가? 필수공공서비스로서의 성격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비전’은 교육, 의료 등에 대해 산업적 접근을 통한 서비스업 위주의 개편을 말한다. 그리고 서비스업의 경쟁력 강화를 덧붙인다. 비즈니스와 경쟁력의 도마에 오를 때 공공서비스의 성격은 불안한 것이며, 결국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부담확대로 귀결될 우려가 있다.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을 위해 자유무역협정(FTA), 경제자유구역, 혁신도시 등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비전’의 핵심계획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자리 확충이란 비정규직 등 불안정 노동의 확산이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미명하에 근로기준법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노동조건의 악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와 반발의 목소리는 고려되지 않는다. 비정규직의 차별을 해소하고 비정규직 관련 입법을 마무리 하는 것이 ‘비전’의 목표라 하나 현 정부가 추진한 비정규직 관련 입법은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곳곳에서 해고 파동을 부르고 있다. ‘비전’에서 선제적 투자라 언급한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대”는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의 확대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비전’이 ‘비전’의 대접을 받으려면 현재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비전’이 탈출하고 싶어 하는 조건에 처한 사람들이 오늘 외치고 있는 내용들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원인은 진단하지 않고 현상을 나열한 ‘비전’의 한계가 아닐까 한다.


노동기본권과 사회보장권은 현대적 인권의 주축을 이루는 생존권적 기본권이다.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을 때에는 노동기본권을 통해, 그럴 수 없을 때에는 사회보장권을 통해 생존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제1의 사회보장 원칙은 일하려는 의지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존엄성 있는 일자리(decent work)’를 제공하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해결해야 하는 세상 속에서 일자리를 위협하는 원인을 제공하면서 사회복지를 확충하겠다는 것은 구멍을 크게 파면서 메우겠다고 달려드는 격이다. ‘존엄성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복지 이전의 복지다.



비효율적으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비전2030


‘사회복지 선진화’ 항목에서 거슬리는 것은 ‘근로유인 강화’와 공적연금, 건강보험, 의료급여 등 개별 복지 프로그램의 ‘효율성을 제고’한다는 부분이다.


물론 ‘효율성’을 얘기한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국제적 사회보장 기준의 큰집 구실을 하는 국제노동기구(ILO)도 효율성을 얘기하고, 좌파나 우파나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북구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효율성을 얘기한다. 문제는 어떤 맥락에서 효율성을 얘기했느냐이다. ‘사회보장이 생산성을 강화한다’거나 ‘사람에 대한 투자’라는 말은 ‘소득안전, 건강보호, 사회적 서비스’의 ‘보편적 제공’을 뒷심으로 해서 나온 것이다. 이런 뒷심을 가능케 했던 것은 ‘노사화합’이나 ‘사회 통합’을 입에만 걸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적 연대’를 통해 구체적 실천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기를 안 갖추고 복지에서 효율성이나 투자가치를 찾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물에서 숭늉 찾기요 비효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전’의 시행계획은 이런 기본기를 갖추려는 것일까?
사진 | 참세상


‘근로유인 강화’나 ‘효율성 제고’는 사회보장을 누려야할 사람의 권리측면에서의 접근은 아니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이전 시대의 구빈이나 자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구빈 차원의 사회부조에서는 수급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베풀어준다는 은혜성과 그에 따른 굴욕적 조건을 달았다면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은 다르다. 생활 곤궁이나 불능 상태를 개인의 잘잘못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세계인권선언 22조에서의 표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상황이란 것을 전제로 사회보장의 권리가 인권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권리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에 수급자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국가의 공적 부담에 의해 이뤄지는 게 그 성질상 당연하다. 적절한 자원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필요에 기반을 두어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회보장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과 포괄적인 의료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그 주 내용이다. 이런 ‘보편성’과는 거리가 먼 한국의 복지현실은 기본기를 갖춘 후에 근로유인강화나 효율성 제고를 해도 늦지 않으리라 본다.



국가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인가


다음은 국가의 역할 부분이다. ‘비전’은 “미래 준비는 국가의 책임, 미래를 설계하는 정부, 책임지는 정부로서의 역할을 다할 필요”를 말하며 비전 제시자로서의 국가를 말한다. 갑갑한 현실 속에서 ‘비전’을 제시해준다니 환영할 이들도 많겠지만, 그보다는 사회보장에 있어서의 국가 책임성을 확실히 인정하는 말 한마디가 더 아쉽다.


사회보장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한참 모자란 한국 사회 현실에서 ‘비전’에 끼어든 ‘사회적 자본’, ‘가족, 시민, 지역 등 공동체 등 자발적 복지체제 구축’ 등의 언급은 생뚱맞다. 이런 부분들은 국가가 강조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연대를 자각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말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책임들이다. 국가가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찾아 그곳을 책임지는 민간의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이런 활동에 정작 장애가 되는 것은 국가 책임성의 부재이다. 보편적 서비스의 제공 속에서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이 기능하는 것과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의 기능은 아주 다르다.


혹자는 국가의 역할 강화가 오히려 폐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간의 자발적인 노력을 주축으로 하고 국가는 이를 보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국가가 모든 것을 주무르려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러나 책임지는 것과 주무르려는 것은 분명 다르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인간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시혜를 이유로 여타 인권에 대한 국가 개입을 맘대로 강화한다든지, 자유의 제한과 교환하자는 식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이행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의의 원칙에 부합해야 하며, 국가의 적극적 활동이 여타의 기본권 침해를 합리화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사회보장의 이행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국가 개입의 강화가 여타 인권에 대한 침해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는 방패막이는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자유의 강화이다.


앞서 말했지만 현재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우려와 항의를 고려치 않은 원인진단과 처방은 이런 기본적 자유를 무시한 비전 제공이요, 정작 보편적인 사회서비스의 확립과 강화에서 요구되는 국가책임성에 물타기가 아닌가 우려된다.



사회보장권은 사회적 연대와 정의의 권리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연대의 강화전략이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비전’ 발표 후 ‘복지 타령만 한다’, ‘재정확보 방안이 없다’는 비판이 주를 이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의 비판에는 복지에 대한 불만, 경제성장을 우선.중시하는 입장이 자리하고, 후자의 비판은 과연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는가’를 묻는 듯하다. 전자에 대해서는 ‘복지도 투자’란 말로 대응한 것 같은데 후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복지수준을 얼마만큼의 국민 부담으로 추진할지에 대해선 국민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미루고 있다.


정작 토론해야 할 내용은 한국 사회가 ‘사회적 연대’의 철학을 갖고 있는지, 그런 철학을 강화할 전략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비전’을 둘러싸고 오고 간 주요 이야기 중엔 ‘세금을 올리느냐, 복지 기대를 낮추느냐’가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지만 그 밑바탕이 되는 사회적 연대의 차원에 깊이 들어간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인간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서로 연대해야 한다. 인간이 이러한 인간의 결사로부터 물질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사실’로서의 연대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에 대해서는 채무자이다. 각자의 능력과 활동의 자유로운 발전은 동시대의 다른 인간들의 능력 및 활동을 결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의 발전단계는 과거 인간의 능력과 활동의 축적된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에 대해 지는 채무로부터 ‘의무’로서의 연대 개념을 도출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이나 교육을 통해 과거의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향유하면서 사회에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이 있는 한편, 상속재산도 교육도 자본도 없어서 더 적게 받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 ‘정의’가 요구되고 이런 연대와 정의를 권리로 표현한 것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연대를 이해하는 방식과 실천하는 방식은 사회마다 아주 다르다. ‘비전’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참여정부의 홍보물로 끝날 수 있겠지만, 코앞에 다가온 대선에선 이와 유사한 사회보장 전략과 공약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에 대한 실천적 잣대는 어떤 식으로 사회적 연대를 추구할 것인가로 볼 수 있다. 그렇게들 좋아하는 생산력이 됐든 아니면 기본적 인권이 됐든 사회보장은 사회적 연대에 기반을 두어야 자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