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미디어세탁소] ‘대한민국’을 외치라 강요하는 미디어

국제스포츠경기 유치를 중심으로

상암 월드컵 경기장. 그곳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절절함’이 묻어 있는 상징이자 은유다. 2002년 한일월드컵으로 인해 이 땅은 온통 빨갛게 도배되었고, 경기장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사람들은 ‘짝짝~ 짝짝짝 대한민국’을 외치며 환호했다. 경기장을 뛰어다니는 이들은 ‘태극전사’였고, 너나 할 것 없이 핏대 높이며 소리치며 ‘대한민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보다 강고히 스스로를(혹은 분위기에 쓸려) 밀어 넣었다. 여하튼 2002년을 기점으로 상암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맴돌고 있는 대표적 공간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상암을 휩싸고 있는 ‘대한민국’은 결국 허상이고, 저열하다는 것은 2002년 당시에도 그리고 2007년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2년에는 월드컵 경기장 건설을 위해 삶의 터전을, 생계의 공간을 국가에게 빼앗긴 이들이 상암에서 울부짖었고, 2007년에는 존엄한 생존권과 노동의 기본권을 빼앗는 국가를 향해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상암에서 절박하게 몸부림쳤다.



스포츠와 미디어의 합창 “대한민국”


국가 대 국가, 대결구도가 형성되면 국가에 대한 감정이 최고조로 증폭된다. 참혹한 전쟁의 순간은 물론, 국가 간 분쟁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개별화 되어 있던 개인들은 ‘국가’를 향해 혹은 ‘민족’을 위해 단결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단결의 양상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계기는 다름 아닌 ‘스포츠’이다. 더더군다나 국제경기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인해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 스포츠와 미디어가 발산하는 ‘국가주의’는 강력하기 그지없다.


스포츠 국가주의는 경기 시작 전부터 그라운드를 지배한다. 축구나 야구 등 스포츠 경기를 가끔 관람하러 가면, 다른 것을 다 제치고 참기 어렵고 불편한 광경은 다름 아닌 ‘애국가 제창’이다. 많은 이들은 떠들고 웃고 움직이다가 ‘애국가’가 나오면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가슴에 손을 올린다. 학습된 반사반응은 그 시절 국기 하강식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흡사 파블로프의 학습원리를 보는 듯하다. 여하튼 애국가가 끝나면 많은 이들은 환호를 지르며 일단 경기에 열중한다. 의식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가슴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으로 참으로 불편하고 길기만한 시간이다. 가끔 주변에서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면 어색하기까지 하다. 물론 이와 같은 불편함은 ‘국가’대 ‘국가’의 대결구도로 짜인 그 순간 더욱 강렬하다.


사실상 스포츠는 국가를 향한 짜릿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자극적인 ‘쇼’ 가운데 최고다. 그래서 총체적 ‘쇼’에 늘 주목하거나 ‘쇼’에 들러리라도 서고 싶어 하는 욕망을 수많은 이들이 드러낸다. 그 가운데 미디어는 ‘쇼’를 전파하기 위한 적절한 도구이기 때문에 ‘쇼’의 중심에서 늘 빠지지 않는다. 결국 스포츠와 미디어는 뗄 수 없는 관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거나 서로를 활용한다. 따라서 미디어는 보다 적극적으로 ‘쇼’를 위해 후원을 하고, 그림을 만들어내기에 분주하다. 물론 ‘쇼’를 통해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이면의 효과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월드컵과 2006년 월드컵을 거치면서 너무도 선명하게 이와 같은 현실을 목격하고 말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개최되고, 온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에 휘청거리던 6월, 미디어는 신화(?)의 현장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계속적으로 부추겨 왔다. ‘태극전사’는 물론 온갖 공간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을 향해 ‘자랑스럽다’며 하나됨의 단결에 눈물겨워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2006년 월드컵은 기다렸다는 듯이 미디어는 오로지 ‘대한민국’을 연호하도록 만들었고, 월드컵으로 온갖 방송을 ‘도배’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신화(?)는 없었고, 슬픔에 목 놓았던 미디어는 “오늘 축구는 죽었다”며 괴이한 여론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난 7월 5일, 스포츠와 미디어, 그리고 국가주의의 합창을 또 다시 목격하였다. 2번의 도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운명의 시각(경향신문)’을 앞두고 언론매체는 촉각을 세웠다. “IOC가 평창을 택해야 하는 까닭(서울신문)”을 주장하기도 하고, “뉴욕타임즈 ‘님비현상 없는 평창이 돼야’(세계일보)”한다며 막판 여론몰이에 힘을 퍼부었다. 그러나 ‘YES 평창’이 실패로 돌아가자 언론매체는 “평창은 울지 않는다(문화일보)”, “‘아름다운 실패…자랑스러운 평창(동아일보)”, “아! 평창… 아쉽지만 잘 싸웠다(서울신문)”며 평창을 위로했다. 그리고는 다시 “평창의 꿈, 무산 아니라 연기됐을 뿐이다(문화일보)”, “평창의 꿈은 연기됐을 뿐이다(세계일보)”, “평창의 꿈은 이어져야 한다(서울신문)”, “평창, 좌절을 딛고 다시 힘을 내자(한국일보)”며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재도전을 암시하듯 주문하였다. 이처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시도를 둘러싸고 언론매체는 철저하게 ‘국가주의’를 위해 찬양했다. 국제 스포츠경기 유치가 이 땅의 자랑이며 세계를 놀라게 할 이벤트라는 것을 강조하며 ‘대한민국’으로 뭉쳐 힘을 과시하자고 선동하였다. 더더군다나 언론매체는 하계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이어 동계올림픽까지 유치하는 쾌거를 발휘하여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4대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개최하여 자랑스러운 국가가 되자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지역신문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지난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 현장실사가 있던 당시 <강원일보>는 1면 머리기사에 “평창 실사준비 ‘Very Good'”과 특별기고 “참좋은 그대, 2014 평창”의 제목과 본문 내용을 영문과 함께 게재하였다. <강원도민일보> 역시 머리기사 제목을 “Why Pyeong Chang/Expansion of winter sports across Asia”로 뽑고, 본문 기사를 국영문 혼용으로 편집하였다. 평창뿐이 아니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를 위해 대구 지역 언론 역시도 영문, 국영문 혼용 기사를 제공하는 등 세계스포츠행사를 유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국제스포츠경기 유치, 미디어의 짭짤한 수입


이쯤 되면 국제 스포츠경기 유치에 국가와 지역, 그리고 미디어가 안달하는 지 궁금하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실패하자 신문사들을 한 신문사 당 수억 원의 손해를 보고 말았다. 평창 올림픽 유치에 대비해 예약돼 있던 축하광고가 물거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미디어오늘> 기사에 따르면 동계 올림픽 유치지가 결정되던 날 “각 신문사에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스폰서를 맡았던 기업들의 축하 광고가 예정돼 있었다”고 한다.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평창 올림픽 유치에 나섰던 이건희 회장이 속한 삼성그룹, 박용성 회장이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을 맡은 두산중공업과 강원랜드 등의 축하광고가 깡그리 사라진 것이다. 실제로 한 신문사 광고국장은 “2014년 동계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업들이 해마다 각종 특집과 행사협찬 등에 투자할 광고비를 감안하면 올림픽 유치 성공이 신문사에 가져올 광고매출은 두 자릿수는 족히 넘었을 것”이라고 했으며, 큰 신문사의 광고책임자 역시도 “여름철 비수기를 맞아 숨통을 트여 줄 것으로 기대했던 광고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몇 억 원은 손해를 본 셈”이라고 말했다고 <미디어오늘>을 통해 밝히기도 하였다.


지난 2006년 월드컵에 열광했던 방송 매체의 경우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광고비로 주머니를 두둑하게 챙길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16강 진출이 확정된 것이 아니듯 게임의 앞뒤를 예측할 수 없었던 미디어의 손익계산서 역시 불안정했고, 결과는 월드컵 기간 지상파 방송 3사의 광고수익(순이익)에서 중계권료를 뺀 결과, KBS2는 마이너스 10억원, MBC는 83억 5000만원, SBS 58억 5000만원을 남겼다. 그러나 지난 2002년에 비해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이 대폭 증가한 것을 감안하여 많은 제작비를 사용했다고 가정하면, KBS의 적자는 말할 것도 없고, MBC와 SBS의 순이익도 대폭 줄어들게 된다.


결국 미디어에서 국제스포츠경기 유치에 혈안이 된 것은 국가주의와 손을 잡은 ‘자본의 노림수’에 다름 아니다. 국제스포츠를 유치할 시 벌어들일 광고비와 이미지 상승은 미디어에 꽤나 짭짤한 수입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하다. 중계권을 가지고 난투극을 벌이고, 저열한 투전판을 벌여도 일단 행사를 성사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뒤에서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는 미디어에게 국제스포츠경기 유치의 문제와 허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언론매체 스스로가 상업주의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을 어떻게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그들이 기득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말이다.



‘세계 속의 한국’으로 희생을 강요받는 민중


상황이 이러하니 국제스포츠경기 유치에 혈안이 된 것은 국가, 지방자치단체, 기업은 물론 미디어도 빠질 수 없다. 그리고 그 기반에 깔려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국가이데올로기’다. ‘세계 속의 한국’이 되기 위해서는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성장중심주의, 개발중심주의, 경제중심주의가 극도로 활개를 치는 시기를 맞게 된다.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를 맞이하기 위해 72만 명의 주민들이 강제퇴거를 당한 사실보다는 3000억원의 이익 창출이 부각된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경우도 유치 시 “부가가치까지 포함해 최대 22조 원의 경제파급 효과와 22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1) 그러나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부풀려 있는 경제수입은 허상에 불과하고 빚으로 되돌려 돌아온다는 것이 국제대회 유치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대구의 경우 2003유니버시아드 때 시민들에게 관광수입의 증가를 자랑스럽게 내세웠지만 실제 대구시 통계에 따르면 2001년 30만 명이던 외국인 관광객이 월드컵 경기를 유치한 2002년 24만, 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한 2003년에는 17만으로 줄었다. 부산의 경우에도 2002년에는 130만 명이었던 관광객이 이듬해 91만, 2006년에는 102만으로 줄었다.2) 관광수입이라는 것은 결국 거짓이다. 행사를 치룬 이후 지자체 등에서 허덕여야 하는 빚은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오기도 한다. 부산은 2002 아시안게임을 치른 후 시설유지에만 매년 30억~40억을 지출3)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피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경기장 건설, 그리고 주변 시설 조성을 위한 환경파괴는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더더군다나 국제스포츠경기 유치를 위해 지자체에서 앞장서서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 내의 환경파괴와 난개발은 당연한 결과로 드러난다. 특히 동계올림픽의 경우 경기 종목과 물리적 자연 환경에 의해 자연생태의 몸살은 더욱 심각하다.


국제스포츠경기가 주는 가장 극심한 폐해는 그 땅에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물리적인 공권력 행사와 ‘국가주의’를 앞세운 소수자에 대한 탄압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 당시 소수의 기득권을 지닌 이들이 민중의 공간과 생존의 터전을 빼앗아 갔으며, 빈민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행위가 정당화되었다. 도시빈민과 노숙인, 장애인에 대한 횡포는 극에 달했고, ‘국가’를 위해 이와 같은 현실은 당연시된다. 한창 올림픽 준비에 분주한 중국의 경우도 이미 125만 명의 주민들이 이주하였고, 추가로 25만 명이 강제 퇴거될 예정이다. 그리고 주민들이 강제 퇴거에 저항할 경우 협박과 폭행을 당한다. 2012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런던의 경우에도 430명의 주민들이 거주지에서 쫓겨날 처지이고, 9,000채의 새 집이 지어질 예정이다.4) 참으로 세련된 방식의 국가적 횡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매체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침묵한다. 아니 이러한 실체에 대해서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목소리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염원하고, 국가적인 행사에 앞장서서 ‘대한민국’을 외치라 주문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스포츠와 미디어, 기업, 국가의 만남이 국제대회로 승화되는 그 순간에는 강력한 힘의 ‘국가’를 현실로 마주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와 지자체 등은 국제 경기를 유치하기 위해 선전하고, 기업들은 스폰서 등을 통해 국제대회 유치에 국가와 함께 손을 잡는다. 미디어 역시 국제대회의 허상을 장밋 빛으로 포장하여 여론을 부축인다. 스포츠를 통해 국가 대 국가의 경기가 펼쳐지면 미디어는 최대한의 감정을 섞어 국가이데올로기를 조장한다. 경기가 끝나면 미디어와 기업은 한 몫 챙겨 빠지고, 국가는 ‘국가주의’를 앞장세워 사람들을 포섭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민중과 소수자, 사회적 약자는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한다. 그런데 평창은 실패를 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평창의 세 번째 동계올림픽 도전설이 모락모락 일고 있다. 지자체는 물론 언론매체에서도 불을 붙이는 분위기가 포착되고 있다. 이는 곧 침묵이 아니라 국제스포츠대회 유치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죽음의 현실과 한 판 붙어야할 시점이 멀지 않았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허나 멀리 가지 말고, 지금 이 시점에도 ‘국가’의 야만적 행위 속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언론매체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다.

덧붙이는 말

1) “평창동계올림픽, 일단 정지”, [정희준의 어퍼컷③] 진실을 감추는 ‘뻥튀기의 예술’, 정희준, <프레시안>, 2007년 4월 10일 2) 정희준, 앞의 글 3) 정희준, 앞의 글 4) “올림픽 좋아하는 나라, 올림픽으로 먹칠할라”, 프레시안, 2007년 7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