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인권적 재구성이 시급하다

개발지상주의에 짓밟히는 환경문제들




환경권, 개발과 불평등을 넘어


“새만금에서 펼쳐지는 락(樂) 페스티벌. 국내 정상급 가수와 연예인들이 한여름 밤을 뜨겁게 달군다.”
어느 여행사의 관광상품 홍보 글귀입니다. 하지만 새만금 지킴이는 새만금에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으며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에 사과하는 길은 지금이라도 당장 방조제를 트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개발지상주의에 짓밟히고 능욕당하는 환경문제들은 너무나 식상한 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월간 <사람>은 과연 환경권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지, 빈곤과 환경의 문제는 어떠한지를 살피려 합니다. 또한 인간중심적 틀에 갇힌 권리담론을 넘어 환경권과 인권의 관계맺음을 고민하고 환경운동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인간의 오만과 이기심의 벽은 참으로 높지만 그 벽을 허물 자그마한 틈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권적 재구성이 시급하다
빈곤과 환경, 그리고 환경불평등
환경과 인권, 그 관계맺음에 대하여
환경운동을 성찰한다
새만금 갯벌이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의 조짐들






환경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개발’에 맞선다는 것만큼 상투적인 말이 또 있을까?


공해가 환경문제를 일컫는 표현이던 70년대와 달리 90년대 이후 환경문제는 대부분 광범위한 ‘국토개발’과 동의어였고, 이는 70년대 ‘국토개발’은 ‘사회발전’이라는 전통적인 등식과 부딪히면서 우리사회의 새로운 가치로써 환경문제를 중심으로 한 생태주의를 확산하기에 이르렀다.


선거 때마다 나오는 지역개발공약과 새만금간척사업, 천성산 고속철도건설사업, 핵폐기장 건설 등 최근 모두 추진키로 결론 난 환경운동의 오랜 과제들까지 2007년 현재 우리 사회는 ‘개발’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활동가의 입장에서 보면 ‘개발지상주의’와 이를 적극 추진하고 있는 ‘토건국가’의 역할을 비판하는 것은 뭔지 모를 부족함을 느낀다. 과연 개발지상주의는 국가와 자본의 계획추진만으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지역개발에 환호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이며 실제로 이익을 보는 이들은 누구인가? ‘지역개발’의 포화 속에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환경운동의 단면과 89.5%라는 경이로운 지지율로 ‘3000억+알파’의 방폐장 지원금을 향해 표를 던진 경주의 모습들은 우리사회 ‘개발지상주의’가 보이는 또 다른 단면이다.

새만금에서 그레질을 하고 있는 주민들. 사진 | 참세상


‘개발지상주의’는 계속 된다


얼마 전 강원도 평창이 동계올림픽 선정에서 탈락했을 때, 그 순간을 대형스크린으로 지켜보고 있던 평창초등학교 학생 한 명이 “(동계올림픽 탈락으로) 희망이 사라졌어요.”라며 울먹이는 TV 인터뷰가 생중계 된 적이 있다.


이를 보면서 지역개발을 둘러싼 어른들의 감정이 어린이를 통해 투영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장면 앞에서 동계올림픽 유치와 초등학생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사회간접자본의 투자, 직접적인 개발이익 발생, 건설업 등 지역경기의 활성화와 같은 구체적인 이익을 생각한 가운데 초등학생이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수언론과 지역토호세력, 그리고 정치인들의 ‘개발에 대한 환상’을 민중들이 바라보면서도 똑같은 상황이지 않을까? 각종 이익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당하면서도 ‘개발에 대한 환상’을 가장 크게 품고 동원되며, 이것이 좌절되었을 때 누구보다 크게 실망하는 많은 이들의 모습에서 평창 초등학생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개발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개발’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보다 면밀한 분석이 있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지역개발을 선동하고 이끌어가고 있는 세력과 이에 저항해 싸우는 민중들만의 모습으로 이분된 분석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개발로 인해 실질적인 이익을 보는 세력과 피해를 보는 세력 중간에는 직접적 이해관계에 속해 있지 않지만 개발을 옹호하고 사회 이데올로기로서 ‘개발지상주의’를 엄호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마치 군사독재정권시절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한쪽 편에 각종 스포츠에 열광했던 우리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이제는 ‘환경문제에 대한 높은 관심’과 ‘웰빙 열풍’에도 각종 국책사업과 혁신도시, 지역개발사업에 열광하고 있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숨어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보수언론과 일부정치인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생태주의’를 수용하지 못한 채-웰빙 열풍에서 보듯-‘자신의 건강과 안위’만을 챙기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은 분명하다.



‘개발환상’에 속고 ‘환경피해’는 이어지는 현실



“처음에는 보상금 준다고 모두 도장 찍었는데, 이제는 (피해의 규모가 너무 커서) 동의할 수 없다는 거야!”


“처음부터 반대를 해 왔는데 그 피해의 정도가 처음 이야기했던 거보다 더 많잖아!”



새만금을 비롯한 각종 국책사업이 진행되는 지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간척사업으로 인한 어업권의 문제, 터널 공사로 인한 지하수 고갈, 핵발전소로 인한 온배수 문제 등 다양한 환경 피해에 대해 지역주민들에게 정작 필요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다. 수조원의 경제적 이익, 지역경제 활성화, 고용창출 같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건설공사로 인한 피해정도와 건설이후 달라질 지역주민들의 삶의 문제는 정보제공은 차단된 상태에서 ‘도장부터 찍는’ 관행이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6~70년대 박정희식 개발정책이 지역주민들의 기본의사를 묻는 절차도 없이 일단 진행부터 하는 방식이었다면 2000년대 노무현식 개발정책은 형식적으로는 지역주민절차와 보상절차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는 모른 채 결정부터 하는 앞뒤가 뒤바뀐 형식적 민주주의의 폐해를 보여주고 있다. 국민의 알권리, 자기 결정권, 행복추구권 등 인권의 기본적인 내용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추후 문제제기 할 통로조차-과거 동의했거나 보상을 받았다는 이유로-배제되는 일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개발환상’을 뛰어넘는 진보적 대안
- 환경문제의 총체적 재구성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모두 ‘개발의 환상’을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풀리지 않는 숙제에 대해 필자는 ‘개발’을 뛰어넘는 ‘진보적 대안’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6~70년대 좋든 싫든 박정희식 개발은 많은 이들에게 환상을 불어넣어 주었고, 이는 최근 대선에서 이명박과 박근혜의 인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과거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되었던 ‘개발’은 이제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더 잘 살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희망’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발지상주의’가 대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적절한 대안일까? ‘개발’의 가치보다 ‘환경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호소하는 것이 적절한 방식일까? 오히려 이러한 방식보다 ‘개발환상’ 뒤에 숨어 있는 맹점을 알려내고 ‘개발’이 아닌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들은 2000년대 환경운동가들 사이에 조금씩 진전되고 있는 듯하다.


‘반대’에서 ‘대안’으로, ‘환경운동의 재구성’과 같은 표현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자칫 운동의 연성화나 개량화로 빠질 수 있는 소지는 다분히 있다. 그러나 환경운동이 총체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개발지상주의의 환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 운동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 조금씩 언급되고 있는 ‘환경권’에 대한 접근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유용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환경을 보존하는 차원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으로서 환경문제를 바라보고 환경사안을 결정하는 방식과 그 속에서 다양한 권리들을 찾는 시도들은 사안 중심적이고 단기적인 접근으로 한계에 봉착해 있는 환경운동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이러한 논의들은 최종적인 목적-진보적 사회구성의 대안 마련으로까지 이어져야 할 것이다. 각종 개발 사업에 치이고, 화려한 홍보와 돈 잔치에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는 많은 환경운동가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무기는 ‘개발’을 뛰어넘는 새로운 대안 마련이기 때문이다.


‘개발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 과거 궁핍한 시절로 돌아가자는 말처럼 들리고, 환경운동이 아직도 ‘배부른 자의 투정’처럼 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환경문제의 재구성, 인권적 접근은 환경운동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다.

고리 1호기 수명연장과 인권침해
핵발전소를 30년간 끌어안고 살아온 주민들
1970년대 초 고리 핵발전소 1호기가 건설될 당시, 공청회와 주민설명회는 없었다. 지역주민들이 어업권 보상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이는 건설과정 상에서의 문제였지 건설에 대한 거부는 아니었다. 온배수, 초고압송전탑문제, 해수면 매립으로 인한 조류 변화 등은 설명되지도 않았고, 그것을 알 방법도 없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고리 1호기의 설계 수명이 끝나게 되었다.


그 사이 고리 인근은 4기의 발전소가 가동 중이고 4개가 건설 중인 핵발전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1호기 수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정부의 계획에 대해 지역주민들의 의사타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0년의 세월이 지나 민주화정도가 바뀌었지만 안전성에 대한 기본 보고서는 모두 ‘영업상 비밀’과 ‘심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정보공개가 금지되었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인근주민의 61.9%가 수명연장에 반대하고, 69.2%가 발전소에 대한 정보공개가 투명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단 지금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30년 동안 반복되어 온 고리 지역주민들의 문제이다.



발전소 인근 주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핵발전소의 안전성은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한다. 특히 발전소와 인접해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에게 안전성은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안전성에 대한 검토는 발전사업자와 정부의 폐쇄적인 검증절차에만 달려있고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지역주민들에게는 검증절차 참여가 아니라 검증 결과 통보만이 있을 뿐이다.


핵발전소 설계수명을 관장하는 원자력법이나 국가의 일반적 정보공개절차를 규정하는 정보공개청구법으로는 고리 1호기 인근주민들의 기본권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다. 사회 민주화의 정도가 높아졌다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아직 환경문제를 둘러싼 각종 현안지역에서는 정보를 공개하라는 구시대적인 요구가 끊이지 않는 것도 각종 기본권은 물론 환경권에 대한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발전소 인근에서 평생을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대대로 살아가야 하는 지역주민들은 지금도 ‘수명연장 반대’, ‘안전성 검토요구’ 등을 위해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방폐장 주민투표 이후의 경주
89.5%의 찬성률, 그러나 이후 이어진 문제들
20년 숙원사업이라던 핵폐기장 문제가 경주지역 주민들의 89.5% 찬성이라는 경이로운 결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공무원의 개입, 금권선거 의혹 등 지역단체와 환경단체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89.5%라는 경이로운 수치는 단지 금권-관권선거로만 설명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3000억원+알파’라는 천문학적인 지원금과 국가의 각종 지원약속은 지역주민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고, 이러한 금전적 약속은 주민투표가 끝난 이후 새로운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방사능폐기물저장고(방폐장) 주민투표 이후 방폐장 건설의 약속사항이었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문제는 본사의 위치를 어디로 할 것인가를 두고 시내지역과 핵폐기장이 들어설 동경주 지역의 분쟁으로 이어져 점거시위, 방화, 할복 등 강력한 시위가 이어졌다. 심지어 과거 방폐장 유치 운동을 했던 조직들까지 나서 ‘한수원 본사가 자신의 지역으로 이전되지 않으면 이제는 반대운동에 나서겠다’는 엄포 아닌 엄포까지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주민투표 기간 내내 방폐장 건설로 인한 환경적 피해가 쟁점이 되어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주민투표 이후에도 주요 관심사는 한수원 본사이전 등 금전적 이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쟁점은 처음 4조5천억원에 달했던 중앙정부의 지원 약속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주민투표가 끝난 지 1년 반이 넘는 최근까지도 계속 진행되었던 중앙정부의 지원 약속 이행문제는 경주시의회에서 특위까지 만들어가면서 결국 3조2천억원 수준에서 종결되어졌지만, 정작 중요한 방폐장 안전문제와 이후 관리 문제는 관심 밖으로 물러나 있다.



기본권 주장은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경주 방폐장 문제


“안전성, 적합성은 물론이고 어떻게 핵폐기물을 처분할 것인지도 정하지 않고 부지부터 선정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를 방폐장 주민투표 내내 지역주민들과 언론을 만나며 이야기해 왔다. 결국 방폐장의 처분방식, 설계, 안전성 검토 등은 89.5%의 찬성을 확인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방폐장을 관리할 주체와 기금 운영에 대한 것은 주민투표 2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입법이 완료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의 알권리, 행복추구권, 환경권 주장은-최소한 경주에서는-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지역지원금의 허상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추진하면 된다’는 식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경주에서 환경권에 대한 논의는 보다 구체적일 때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경주 방폐장처럼 국가의 정책을 지원금과 돈으로 결정해버리고 마는 악습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각도에서의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