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 안의 법, 인권 밖의 법] 판결문에서 사라진 피해자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의 피해자 관점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한 가지, 1993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이 사건은 직장 내 성희롱을 규제하기 위한 법·제도를 마련하고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나가게 되는 큰 계기였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6년여에 걸친 법정 싸움, 여성·시민사회단체 등의 지원활동, 직장 내 성희롱 실태조사, 관련 법 제정을 위한 입법 활동 등이 전개되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지난 1999년 직장 내 성희롱은 피해자의 인권과 노동권을 침해하는 고용상의 성차별 행위로 남녀고용평등법1)과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2005년 6월부터 국가인권위원회로 이관)2)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다. 법제화뿐만 아니라 이 과정을 거쳐 그동안 단지 ‘불쾌한 어떤 것’으로 불리던 것을 ‘직장 내 성희롱’으로 개념화하고 사회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었다.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된 법들이 만들어지면서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최소한의 법적 판단기준이 마련되기는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무엇이 직장 내 성희롱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법 마련 이후 근 10여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례접수 및 시정과정에서의 노력 등을 통해 직장 내 성희롱의 개념, 그 판단기준에 대해서 일정정도 합의에 이르렀다.

사진 | 한국여성단체연합

그런데 소위 ‘회식자리에서의 술 따르기 강요’에 대한 일련의 사법부 판결은 그동안의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합의수준을 무시하는 판결로 매우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남녀고용평등법 등에서 회식자리 등에서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행위는 직장 내 성희롱이라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술 따르기 강요가 성희롱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자체도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을 내린 근거, 즉 직장 내 성희롱을 판단하는 기준과 관련하여 그동안의 논의와 사회적 합의를 후퇴시킨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가 있다.



판결문에 나타난 판단기준


먼저 이 글에서 ‘회식자리에서의 술 따르기 강요’ 사건이라고 칭하는 사건의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문제의 사건은 지난 2002년 안동에 있는 한 초등학교로 새로 부임한 교감이 3학년 교사 전체 회식에서 여성교사들을 상대로 교장에게 술을 따르라고 강요한 데서 시작되었다. 회식자리에서 교감은 회식자리에 함께 한 교사들이 교장에게 술을 따를 것을 몇 차례에 걸쳐 말하고 여성교사들이 술을 따르지 않자 재차에 걸쳐 술을 따르라고 말했다. 회식이 끝난 후 여성교사 3인 중 1인은 다른 동료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성교사들에게 두 번이나 교장에게 술을 따르라는 말을 하여 불쾌감을 느꼈음을 밝혔다. 이에 A는 ‘교감이 회식에 참석한 여자교사 3인에게 2회에 걸쳐 교장에게 술을 따르라는 취지의 말을 한 후 특히 자신을 지목하여 말하고, 교장은 교감의 행위를 제지하지 아니하고 묵시적으로 동조한 채 여자교사들이 따르는 술을 받아 마시는 행위를 하여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내용을 취지로 당시 여성부에 시정신청을 하였다.


당시 여성부는 이 사건에서 교감의 위의 행동은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에서 금지하고 있는 성희롱에 해당하고, 교장의 경우는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대해서는 “향후 교직원들의 회식문화를 개선하고, 전 교직원을 대상으로 재발방지를 위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교감은 이에 불복하여 여성부 결정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과적으로 1심 행정법원에서 본 사건이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고(2004년 2월), 이후 2심 고등법원(2005년 8월), 마지막으로 대법원(2007년 6월) 모두 1심 판결의 내용을 근거로 교감의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1심부터 대법원까지 판결의 주요 요지는 “… (교감이) 교장에게 술을 따라야 한다는 성적 의도를 가지고 이 사건 언행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회식장소에서 부하직원이 상사로부터 술을 받았으면 답례로 상사에게 술을 권하여야 한다는 차원에서 … (A를 제외하고) 다른 여자교사들은 (교감의 언행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성적인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등 … 원고(교감)의 이 사건 언행이 우리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용인될 수 없는,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문제 삼고자 하는 바는 사법부가 성희롱 여부를 판단할 때 주요한 기준으로 삼았던 ‘교감(가해자3))의 성적 의도’와 ‘상식과 관행에 비춘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질서’이다.



판단기준으로서 ‘피해자 관점’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무엇이 성희롱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많은 논란이 되어 왔다. 많은 경우 가해자는 성희롱을 할 의도가 없었고, 친근감의 표현이었으며 혹은 술김에 나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변명하곤 한다. 그러나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 역시 성에 대한 이해, 성문화 등은 성별(Gender)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어 있고, 특히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령 남성이 성적인 의도 없이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읽혀지는 맥락이나 두 당사자 간의 관계, 행위가 이루어진 맥락에 따라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이런 판단 하에서 성희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피해당사자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즉 가해자의 성적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가해자의 행동이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행동이었는지 피해자의 경험에 입각하여 판단해야 하며, 여기에서의 피해자 경험은 역사적으로 구성되어진 피해자 집단의 경험에 의해 합리성이 판단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기준은 이미 세계적으로 합의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성희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규정되어 있다. 남녀고용평등법 시행규칙 별표 규정에서 보면, “성희롱 여부의 판단은 피해자의 주관적 사정을 고려하되,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사람이 피해자의 입장이라면 문제가 되는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판단하고 대응하였을 것인가를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고 하여 피해자의 관점에서 성희롱을 판단해야 함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사건을 두고 여성부(현 여성가족부)는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으나 사법부는 "상식과 관행에 비춘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질서"에 속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사진 | 여성가족부

그러나 술 따르기 강요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은 성희롱 판단기준의 주요 원칙인 ‘피해자 관점’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가해자가 성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과 피해자를 제외한 다른 여성교사들은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성적인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을 주요한 판단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여성교사들이 가해자의 행동에 대해서 성적인 굴욕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피해자가 성적인 굴욕감을 느꼈는지를 판단하는 데 전혀 고려할 여지가 없는 것임에도 말이다. 설령 다른 여교사들이 술 따르기 강요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은 했으나 성적인 수치심을 갖게 한 행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정작 피해자가 성적인 굴욕감과 혐오감을 느꼈다면 이는 분명 인정되어야 한다.


이번 판결은 성희롱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합의를 이루어왔고 하나의 원칙이 된 기준, 즉 해당 행위가 성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행위자의 의도가 아니라 그 행위가 상대방이 원하는 행위였는가, 원하지 않은 행위였는가 하는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원칙은 성희롱 판단에 있어 주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회식(음주)문화와 성희롱


이번 사건에 대해 사법부는 교장에게 술을 따르도록 여자교사들에게 강요한 행위를 회식장소에서 “부하직원이 상사로부터 술을 받았으면 답례로 상사에게 술을 권하여야 한다는 차원에서의 언행”으로 보았고, 이는 선량한 풍속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술자리에서 술을 주고받는 행위가 ‘선량한 풍속’이 되려면 자발적이고 서로의 의사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당사자는 꺼리고 원하지 않는데, 풍속이라는 이름으로 술을 따르게 한다면 이는 다름 아닌 강요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직장의 상사인 교감이 평교사에게 술을 따르도록 재차 이야기를 하게 되면 직장 내 지위, 위계에 의한 강요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


더구나 술을 따르라는 ‘권유’가 여성을 향해 행해질 경우 해당 여성은 성적인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판결문에서는 ‘부하직원이 상사에게’라는 표현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술을 따르는 행위임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이 사건의 경우 남성상사인 교감이 여성평교사에게 남성상사인 교장에게 술을 따르도록 한 행위는 직장 내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성적인 역할’이 전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흔히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지’, ‘여자가 옆에 앉아야지’하는 등의 이야기로 남성들 사이에 여성들을 끼여 앉히거나 여성이 술을 따를 것을 요구하곤 한다. 이러한 문화는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임에도 여성에게는 소위 ‘여성적인 역할’, ‘성적인 서비스’ 등을 요구하는 것으로 성적인 불쾌감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사건의 경우처럼 회식자리에서 ‘성을 전제로 한 낯 뜨거운 대화를 나누고’ 그런 분위기에서 술 따르기를 강요했다면(이러한 사실은 사법부 판단에서 주요하게 인정되지 않았다), 이는 여성교사들에게 ‘여성이기 때문에’ 술을 따르라는 요구로 이해되고 따라서 성적인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사에게 술 따르기는 ‘선량한 풍속’, ‘예우 차원’이 아니라 여성에게는 굴욕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풍속,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가리는 것은 진정한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또 회식자리에서 성희롱 발생이 빈번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남녀고용평등법에서는 회식자리 등에서 끼여 앉히기, 술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 등을 모두 성희롱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법부의 판단은 여성과 남성,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그것을 둘러싼 여러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은 모두 떼어버리고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성희롱 여부를 판단하고 더 나아가 풍속이라는 이름으로 문제적인 문화, 인식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덧붙이는 말

1) 남녀고용평등법 제2조(정의) 2항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2. “직장 내 성희롱”이라 함은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그 밖의 요구 등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고용에 있어서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2) 이 사건이 발생한 2002년 당시는 직장 내 성희롱 관련하여 여성부(현 여성가족부)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별 시정업무의 일원화를 목적으로 여성부 업무의 일부가 국가인권위원회로 이관되면서 2005년에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은 폐지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직장 내 성희롱을 규제하고 있다. 3) 2002년 여성부가 본 사건에 대해 성희롱 결정을 내리고 이에 대해서 불복한 교감이 행정소송을 하면서 가해자인 교감은 원고가 된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교감의 행동이 성희롱이라는 입장에서 ‘가해자’로 지칭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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