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병역의무에 기초한 ‘국민 됨’을 다시 생각하자

‘여성’의 입장에서 본 사회복무제 추진

최근 정부가 병역제도 개선안과 함께 사회복무제 시행계획을 발표했다. 본인이 희망할 경우 여성도 참여가능하고, 인센티브도 부여할 예정이란다. 사회복무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제도에 참여하면 인센티브까지 준다니 ‘선택권’을 넓혀준다며 환영해야 하나? 하지만 섣부른 환영은 금물이다. 정작 군사활동 이외의 다른 기회를 요구해왔던 병역거부자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지금까지 병역면제 대상이었던 ‘제2국민역’ 대다수가 사회복무라는 ‘새로운’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징집대상자를 확대하는 사회복무제 시행은 어떠한 사회적 결과를 낳는 것일까? 여기에 ‘원한다면 여성 또한 참여할 수 있다’니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군사화된 근대화 과정 속의 ‘국민 됨’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국가에 충성을 약속하는 ‘국민’ 만들기 과정이었다. ‘국민’은 권리의 주체이기 이전에 국가에 대한 의무의 주체였다. 남과 북의 적대적 대치와 과잉된 안보의식 속에서 국가의 발전은 곧 나의 발전이며, 국가의 이해(利害)는 곧 나의 이해로 설명되었다. 물론 이러한 ‘국민’ 만들기 과정은 철저히 성별화되었다. 그리고 징병제도의 시행은 성별화된 ‘국민’ 만들기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를 여성학의 시각에서 분석한 권인숙의 책

국가가 있어야 내가 존재하며, 국가 곧 나의 안위는 무력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군복무는 남성/국민의 ‘신성한’ 의무가 되었다. 남성들을 징병제도에 동원하는 과정에서 국민국가는 전사들의 목숨을 건 희생에 기초한 것으로 상상되었다. ‘적’에 맞서 군사활동을 담당하는 남성들은 ‘보호자’의 위치에 섰고, ‘국민’의 대표이자 ‘가족’의 대표가 되었다. 군복무 이행은 노동시장에서의 보상으로 이어져 남성은 곧 노동자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적대적인 이분법에 기초한 군사화 과정은 국경 밖에 ‘적’을 상정함과 동시에 ‘보호자’를 중심으로 국민국가 내부를 위계화시킨다. 안보국가에서 사회구성원은 ‘지키는 자’와 ‘지킴의 대상’으로 이분화되고, 지킴을 받는 ‘피보호자’는 ‘보호자’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치하, (성적)노동을 통한 위안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공식적 ‘의무’ 이행은 군사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여성이 담당한다는 이유로 비가시화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징병제도 운영은 병역의무와 노동권, 국민 됨의 연관에 기초한 남성중심의 국민정체성을 생산해왔다. 그 과정에서 성차별은 누적되고, 여성들은 ‘피보호자’이자 ‘재생산’ 담당자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공/사 영역 안과 밖에서의 노동을 착취당했다. 개인의 삶을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향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여성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평가는 병역이행과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군사활동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것’이 바로 ‘국민 됨’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병역이행의 ‘형평성’ 추구라는 함정


‘신성한’ 병역의무라는 이데올로기와 달리 대다수 남성들에게 징집은 ‘애국적 사명감’에 따른 자발적 충성행위로만 이해될 수 없는 복잡한 심리적 과정 속에 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출발한 징병제 속에서 남성들은 신체훼손에 대한 두려움, 생계의 어려움을 이유로 징집을 피하고자 했고, 이러한 시도들은 암암리에 장려돼왔다. 호적제도 미비와 주민등록의 전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에는 동사무소 정도를 통해서도 군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다반사였고, 특히 사회특권층의 경우에는 군 면제를 받거나 현역병에서 제외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독재 정권의 병영국가화 과정에서 ‘병역기피’와 병역거부에 대한 처벌수준은 한층 강화되었고, 사실상 중하위 계층의 남성들은 촘촘한 징집체제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징집의 역사 속에서 축적된 ‘어둠의 자식’의 ‘신의 아들’을 향한 분노는 민주화 이후에야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세금탈루, 강도, 강간, 아내폭력과 같은 범죄에 대한 분노와는 감히 견줄 수 없을 만큼 병역문제와 관련된 ‘분노’에는 강한 사회적 공감대가 자리한다. 일례로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은 대선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가수 유승준의 경우 국적 포기를 통해 자동적으로 병역면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입국금지 조치는 사회적 공감대를 이유로 들며 대법원조차 정당성을 인정하고 말았다.


이처럼 병역비리 또는 병역기피에 대응하는 사회적 분노와 민감성은 징병제도를 운영하는 정부가 ‘평등한 의무이행’이라는 ‘형평성’ 추구를 핵심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동시에 ‘평등한 이행’으로의 이러한 쏠림 현상은 남성들의 민감성에 반응하면서 정부에 의해 주조돼 온 측면이 크다.


하지만 ‘형평성’ 추구가 병역문제의 정답이 되는 상황에서 “생명을 앞에 두고 총을 들 수 없다”는 병역거부자의 외침도 자신의 신체를 훼손해가며 병역을 피하려는 행위도 모두 사소한 것으로 밀려난다. 병역이행의 ‘형평성’ 추구라는 대의는 징병제도를 둘러싼 남성집단 ‘내부’의 차이를 가리고, 군사활동에 기초한 남성됨과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에 기초한 국민됨을 정상화시킨다.


무엇을 위한 사회복무제인가?


정부는 사회복무제 시행을 통한 “예외 없는 병역이행”, 이를 통한 ‘형평성’ 증진을 핵심적이고 긍정적인 효과라고 이야기한다. 군 현대화와 군 복무기간 단축을 통해 양산되는 ‘잉여자원’ 활용이 사회복무제 추진의 현실적 이유인 것이다. 이처럼 사회복무제 시행의 목적은, 과잉된 군사영역의 우위를 돌아보거나 돌봄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여 사회복지 영역을 확장하는데 있지 않다.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이 제도는 결국 징병제도 운영의 효율성을 꾀하려는, 전혀 새롭지 못한 것이다. 특히나 이를 통한 형평성 추구는, 병역에서 배제된 ‘여성’을 제외한 남성집단 ‘내부’의 형평성이며, ‘총을 들 자격이 있는’ 남성을 정점에 둔 위계화된 ‘형평성’이다.


정부안에 따르면 현행 ‘신체사유’ 병역면제자 중 “손가락 장애나 인공수정체 등 신체일부에 결함이 있으나 사회활동이 가능한 자”, ‘자격사유’ 병역면제자 중에는 “중학중퇴자, 귀화자, 외관상 명백한 혼혈인”이 의무이행 대상으로 새롭게 포함된다. 이를 통한 아이러니는, 사회복지 혜택을 받아야할 사회적 약자에게 사회복지 서비스를 담당하라는데 있다. 사회적 차별시정 문제는 간과한 채 징집대상자의 확장만을 낳는 사회복무제 추진을 두고, ‘자신의 복지는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는 요구로 읽는다면 너무 큰 오해인가?

지난 2월 한명숙 당시 총리가 군복무기간 단축, 사회복무제 도입 등의 내용이 담긴 2030인적자원활용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국정홍보처

신체등위와 자격등위를 기준으로 서열화된 남성들은, (총을 들 수 있는) ‘정상성’을 입증해낸다면 군복무에 임해야 하며, 그 밖으로 밀려난 자들은 이제 사회복무를 담당해야 한다. 군사활동에 기초한 군복무와 사회복무 간의 위계 속에서 추진되는 이 제도를 통과하거나 제도 밖으로 밀려난 남성들은 여전히 학력, 장애, 가족력, 성정체성, 외모, 국적, 종교 등에 따라 질서지어진다. 동일한 의무이행이 평등권의 기초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애초 ‘동등한’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위계는 온존할 것이다.


물론 장애, ‘혼혈’, ‘성전환’, 성정체성 등을 이유로 ‘국민의 의무’에서 제외되었던 남성들로부터 자신들도 군복무 대상에 포함시켜달라는 요구가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애국심’을 발로라기보다는, 제대로 ‘국민’이 되어본 적이 없거나 ‘국민’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집단의 평등권에 대한 요구다. 무엇보다 병역이행 자격 요구를 통한 차별시정에 대한 기대는, 한국사회에서 군복무가 차지하는 과잉된 위상의 문제를 반증하는 것이다.



사회복무, 여성도 해야 한다?


군 가산점제 논란 때도 그랬고, 2002년 이화여대 홈페이지에서 벌어진 병역거부 논란 때도 그랬다. 사이버 상에서 여성은 의무를 다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는, 이기적이고 ‘애국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라고 비난받았다. 군대와 관련된 언급조차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취급됐다. 몇몇 여성들은 주어지지도 않은 의무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받을 바에 ‘차라리 군대 가겠다’고 토로했지만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차피 자격이 안 되니까 나오는 소리라며 공격이 이어졌다.


사회복무제 시행을 앞두고 한 남성 네티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회복무를 선택한 여성에게만 공직시험의 기회를 줘야 합니다! 그들은 그나마 나라를 생각하는 여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는 이기적인 여성’이라는 여성혐오 위에 놓여 있다. ‘나라를 생각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병역의무에서 면제되거나 배제되어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공적영역에서의 권리를 제한당해야 마땅한가? 누군가의 권리를 제한하자고 주장할 수 있는 권력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병역의무 이행이 그러한 권력의 근거라면, 군 가산점제 찬성이유로 주장되는 것처럼 군복무가 남성에게 마냥 ‘피해’이기만 한가? 병역의무가 다른 사회적 의무들보다 우선되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하나? 질문이 쏟아진다.


군복무를 ‘대체하는’ 사회복무는 분명 여성에게 부여된 의무가 아니다. 때문에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권리에 제한을 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으로 이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군복무가 아니기 때문에’ 병역이행자와 동등한 지위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렇지만 정부의 인센티브 부여방침은 사회복무든 군복무든 이를 이행하지 않은 이들에게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과 불이익을 낳을 것이 뻔하다. 의무가 아닌데, 선택이라고 하면서도 하지 않아 불이익을 받는다면 이는 강요인가, 선택권의 확장인가? 사회복무제 여성 참여 언급은,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다.


군복무든 사회복무든 ‘국가에 대한 의무’가 강화된다면 의무에서 제외된 구성원들의 지위는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군사영역의 우위에 기초한 안보국가에서 병역이행을 통한 평등권 추구는 다시금 군사영역의 우위를 가중시킬 뿐이다. ‘국가에 대한 의무’가 아닌 다양한 방식의 사회적 기여를 재평가하는 것, 사회적 돌봄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 차별을 완화하는 현실적 방법이다. 의무에 기초한 ‘국민 됨’에 질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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