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누구를 위한 국익이고, 누구를 위한 동맹인가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을 통해 본 국가주의

2001년 9월 20일, 9.11 테러 이후 첫 번째 의회 연설에 나선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월11일의) 밤의 장막이 내릴 즈음, 우리들의 세계는 완전히 변했다. 자유가 공격당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결단해야 한다. 우리들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편에 설 것인가? 앞으로 테러리스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는 미국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국가주의


이 연설 이후, 미국의 부시행정부는 대외적, 대내적 ‘동원의 정치’를 단행했다. 대외적으로는 세계질서를 미국의 편과 미국의 적으로 새롭게 정렬시키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전 세계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국가적 결단’의 외피를 쓴 부시행정부의 전쟁행위에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 첫 번째 타격 목표가 된 것이 아프가니스탄이었다. 그 ‘국가’는 부시행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의 눈에는 통째로 절멸시켜 버려야 할 존재로 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라크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을 치르는 인간들은 그저 ‘부차적 비용’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2001년 9.11 테러의 대상이 된 미국의 세계무역센터 빌딩

뿐만 아니다. 미국은 국내적으로도 ‘국가안보’라는 이름 하에서 동원과 통제가 강화되었다. 그 정점은 ‘애국자법(Patriot Act)’의 제정이었다. 애국자법 제정 이후 미국 국내에서는 영장 없는 구속과 도청이 횡행하고, 이슬람계 미국 시민에 대한 감시,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불법 연행과 고문, 차별 조치가 ‘합법화’되고 있다. 이처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해야 할 ‘국가안보’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는 역설이 만연하게 된 것은 9.11 테러 이후 강화된 미국 ‘국가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해야 할 국가(혹은 국가안보)가 시민(혹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을 위협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동참한 한국사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국익’과 ‘동맹’의 이름으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에 대한 한국의 참전은 ‘대한민국 국방부’가 홈페이지에서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미국이 항구적 자유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시한 대테러전쟁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정신에 따른”, 즉 동맹정신에 입각한 미국의 대테러전쟁 지원이었다. 평화와 재건이라는 명분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본질적 성격은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침공에 대한 참전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도 핵심은 미국의 대테러전쟁 지원과 한미동맹이었다. 다만,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참전결정 과정에서는 특히, ‘국익(國益)’이 강조되었다. 미국이 이라크침략을 강행했던 당일(2003년 3월 20일),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한·미동맹관계의 중요성 등 제반 요소를 감안하여 미국의 노력을 지지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가장 부합된다.”라고 정부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아프간과 이라크에 대한 파병, 파병 연장과 반복되는 재연장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대테러전쟁 참전 과정은 ‘동맹’과 ‘국익’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재삼 확인시켜주는 과정에 불과했다.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오무전기 노동자들의 희생과 고(故) 김선일 씨의 희생을 치러야 했다. 특히 고(故) 윤장호 씨의 죽음과 23명의 인질사건을 불러온 아프간 파병은 국가안보와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동맹과 파병이 오히려 시민 개개인의 생명을 빼앗고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을 뿐이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미국의 ‘반공 동맹군’으로 참전해 숱한 희생을 불러온 베트남전쟁 참전과 매한가지일 뿐이다. 결국, 그들이 ‘국익’이라고 말할 때 이익은 보통 시민들의 이익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프간과 이라크 파병에서 내세웠던 ‘인도적 지원’과 ‘평화재건’이라는 구호는 허울뿐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지 오래다. 더 이상의 동맹의 논리와 국익론은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 스스로도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느니,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밖에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누구의 국익인지, 누구를 위한 국익인지’ 도무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말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침략행위에도 동참할 수 있다’는 부도덕한 명제를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우리 사회에 만연시키고 있다. “파병반대”는 속 편한 이상론자들의 수사에 불과하고, “파병결정”은 치열한 고민의 결과인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전사회적인 도덕 불감증을 부채질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동맹’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간 침략전쟁에의 참전을 요청 받았고, 전쟁 초기부터 파병을 하고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그 ‘동맹국’의 국민들이 살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테러세력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자국의 원칙만을 반복하고 있다. 미국의 ‘동맹’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에 의해 가려진 인간이라는 존재


“국가의 이익을 개인이나 다른 집단의 이익보다 절대적으로 우선시키는 사상원리나 정책”-국가주의(Statism)의 사전적 의미이다. 그러나 굳이 국가주의의 사전적 의미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우리는 ‘국가’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행동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 국가라는 존재는 익숙하기도 하고, 거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즉, ‘국가주의’는 특정 국가가 내부적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자국의 시민 개개인을 동원하는 사상이나 정책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국가를 중심에 두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경우, 우리는 ‘국가주의적’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무리가 아니다.

사진 | 참세상

앞서 언급했던, ‘9.11 테러’를 감행한 이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어떠한가? 그들의 사고 속에서 두 대의 비행기에 탄 수백 명의 승객들과 뉴욕 쌍둥이 빌딩에 근무하거나 거주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은 그저 ‘미국’이라는 존재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수백 명, 아니 수만 명의 목숨은 하나하나의 소중한 인간의 목숨이 아니라,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세계 제국’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수단이요 불가피한 희생으로 여길 수 있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23명의 한국인 민간인을 납치하고 2명을 살해한 ‘탈레반 무장세력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인식체계 속에서 23명의 자원봉사단은 23명의 사람들로 인식되기 이전에 미국의 침략전쟁에 동참한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일부로 인식된다. 아직도 아프가니스탄 국가권력의 정당한 집권세력으로서 자임하고 있는 탈레반의 입장에서 23명의 생명은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 개개인의 소중한 생명이 아니라, ‘미국’ 혹은 ‘한국’(혹은 동맹국가들)과의 협상과 대결의 결과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되는 국가와 국가 간 권력게임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한 납치행위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인 국제질서 속에서 벌어지는 생존투쟁의 일환으로 정당화된다. 그들 또한 국가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간’이 서 있는 자리는 너무도 초라해진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평화만들기


우리는 종종 ‘국가 대 국가’의 권력게임과 권력투쟁 양상에 사로잡혀 ‘사람’을 놓쳐버리는 일종의 ‘착시현상’에 빠지곤 한다. 그렇게 된다면, 외교관들의 악수와 미소 뒤편에 가려 있는 인간을 발견할 수가 없다. 평화 또한 국가와 국가, 그리고 각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안보엘리트들의 조정과 타협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된다. 물론, 국가라는 권력의 집약체가 현실에 존재하고 국제정치의 엄연한 주요 행위자로서 작동하는 현실에서 반국가적(혹은 비국가적) 기획만으로는 안전도 평화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의 권력게임의 산물로 ‘만들어지는’ 평화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평화의 과정이 자리 잡지 않는 한 끊임없는 위협과 위험에 노출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안전과 평화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보통의 사람들은 ‘평화’를 위한 희생을 요구받게 되곤 한다. 국가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인식론으로부터의 탈피와 국가에 의해 경계 지워진 틀을 넘어서는 평화만들기의 실천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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