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당신은 국가에 충성할 수 있나

왜 다시 ‘국기에 대한 맹세’인가




국가주의의 저주



한국군이 파병된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납치되었다. 나흘 뒤인 7월 24일 대한민국 국무회의는 새로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담은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 국기법이 시행되는 첫날, 비정규직 대량해고에 항의하며 또 다시 매장점거에 들어갔던 뉴코아-이랜드 조합원들은 국가공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끌려 나와야 했다.
이것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과거의 국가폭력 행위자이자 인권침해의 가해자였던 국가는 인권옹호의 탈을 뒤집어쓰고 더욱 지능적인 폭력을, 더욱 교묘한 통제와 억압을 일삼고 있다. 이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고, 법과 제도에 스며들며, TV 드라마에서까지 활개를 치는 국가주의의 문제를 이번 월간 <사람>에서 다뤘다.


당신은 국가에 충성할 수 있나
누구를 위한 국익이고, 누구를 위한 동맹인가
국가보안법의 변신, 악플과 만나다
병역의무에 기초한 ‘국민 됨’을 다시 생각하자
TV 속으로 들어온 국정원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지난 7월 27일부터 시행된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대통령령 제20204호) 제4조에 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다. 1970년대 학교를 다니면서 애국가와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열심히 외워야만 했던 이들이라면 뭐가 달라졌지 하고 의아심을 가질 만하다. 기본 틀이 유지되고, 몇 군데 문구만 바꾸었으니 그럴 만하다.

사진 |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야 안녕 블로그 http://blog.jinbo.net/byebye

행자부의 설명에 따르면 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은 “자랑스런”을 “자랑스러운”으로 바꾸었고, “조국과 민족”을 “대한민국”으로 바꾸었으며, 헌법 전문에서 보편적인 가치로 꼽고 있는 ‘자유’와 ‘정의’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기존 표현은 국가가 개인의 맹목적인 희생을 연상시킬 수 있어 삭제하고 ‘충성’은 사전적 의미가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인 만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국기인 태극기의 게양식 및 강하식과 행사에서 차렷 자세로 선 채로 “국기를 향하여 오른손을 펴서 왼편가슴에 대고 국기를 주목하거나 거수경례를 하는 방식”으로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시한다. 이로서 “국기에 대한 인식의 제고 및 존엄성의 수호를 통하여 애국정신을 고양함을 목적”으로 올 1월 제정된 ‘대한민국국기법’이 시행되는 것에 맞추어 이 시행령이 시행되고, 이전의 ‘대한민국 국기에 대한 규정’은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국기에 대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아주 훌륭하게 마치게 되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 서약의 역사


보통 국가에 대한 상징이 강화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보수주의 세력이 권력을 강화할 때였다. 나치의 열광적인 대중동원 방식에는 늘 국가에 대한 집단적인 의식이 동원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신격화된 국가와 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는 늘 따라 다녔다.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일제 강점기 어린이들이 강제로 외우고, 낭송해야 했던 황국신민서사다. 이런 것이 대한민국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위의 인용문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군인들의 맹세문을 학생들이 외치게 했던 ‘우리의 맹세’다.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던 것에서 반공 구호가 전면적으로 등장했다.


그 이후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72년 박정희 유신정권에서 국무총리의 지시로 학생들이 외우고 국기 게양식과 강하식에서 낭송하게 했다. 그 모태는 충청남도 교육청의 교육관료들이 만들어 학생들에게 외우게 했던 맹세문이라고 한다. 이러던 것이 1980년에는 전 국민이 이 맹세를 국기 앞에서 낭송하게 하였다. 결국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군부독재세력과 교육관료들이 결탁하여 국민에게 강요한 것이 된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천황에 대한 충성에서부터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변형되어 강화되었던 충성서약이 민주화에 따라 점차 시들해지더니 이제는 법령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국회에서 국기법을 제정할 때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삭제하기로 합의되었던 것이 모법의 시행수단인 시행령에 버젓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왜 자유주의 개혁세력이라고 평가되는 노무현 정부에서 독재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도 임기 말에 이와 같은 국가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법령을 제정하게 된 것일까? 이러고도 자유주의 개혁정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국기에 대한 맹세를 보면서 절로 드는 생각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보수 세력과 일체가 된 정부


지난 7월 17일, 20명도 채 안 되는 인권활동가들은 국회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요하는 대한민국에서 헌법 제1조는 죽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 시위에는 청소년/녀 활동가들도 함께 했다. 그 이전 6월 11일에는 80여개 시민사회단체들이 국기에 대한 맹세의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이들 단체들은 “진작 솎아냈어야 할 일제와 유신의 잔재이자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미래지향적으로 수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국기에 대한 경례 역시 이참에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기에 대한 경의나 애국은 국가가 법으로 강제하고 훈육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에 일침을 날린다는 인권운동사랑방 내부모임 '일침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를 비꼬며 상장을 수여했다.

이런 인권단체들, 시민단체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다수 언론들을 비롯한 보수 세력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존속하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폐지는 소수이고, 유지, 존속은 훨씬 더 많은 형국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국민이 국가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자, 자랑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국가가 나서서 국가(국기)에 대한 존엄성과 충성심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되살리려는 정부의 노력을 고무한다. 그러면서 “나라를 상징하는 태극기에 대한 존엄성을 비하시키려는 행위나 행동은 국가 정체성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 해석 할 수밖에 없다”며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폐지하자는 세력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각종 의식행사에서 태극기대신 한반도기를 게양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들”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내셔널리즘(Nationalism)으로 과잉 해석을 가한다는 것은 정체성을 훼손시키려는 좌파성 포퓰리즘적 사고라고 해석 할 수밖에 없다”고 전통적인 방식의 공격을 가한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면, 보수 세력들이 노무현의 개혁에 대해 바로 “좌파성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했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들- 미국의 침략전쟁기지로 한반도 남단을 내주는 주한미군재배치계획을 미국의 의도대로 추진하면서 그에 반대하는 평화세력을 탄압하고, 미국의 경제침략을 보장하는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진보세력에 대해 무차별적인 원천봉쇄와 강제진압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고 난 뒤로는 보수 세력과 노무현 정권의 차이는 사라졌다. 다만 북한에 대한 태도에서만 갈리고 있는데, 이것도 이 나라 보수 세력의 뿌리인 미국이 추진하는 한반도 프로세스 내의 문제이므로 곧 북한에 대한 보수 세력의 태도 또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정말로 노무현 대통령이 염원하던 보수대연합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 비틀어 보기


다시 국기에 대한 맹세로 돌아가자. 그 맹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국가여야 한다. 그래야 그런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 앞에서 자랑스럽게 맹세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국가의 탄생이 원시공산제 사회 이후에는 계급국가였음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상식이다. 계급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구상이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했던 이유에는 그들이 표방했던 이상에도 불구하고 국가 구성원들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 구성원들의 위에 군림하는 국가가 보장하는 자유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국가 구성원들의 희생 위에 서 있는 자본의 자유만이 있을 뿐이다.


한미FTA 반대 투쟁에 대해 집회와 시위를 원천봉쇄하고, 폭력적인 진압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 광고까지 못하게 막았던 사실에 대해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농민과 노동자들이 경찰폭력에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 나라에서 자유란 소수의 계급에게만 보장될 뿐이다.


정의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의 잔재도 청산하지 못하면서 친일파가 친미파가 되고, 기득권세력에 투항하여 지배계급이 된 자유주의세력이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나라에서 정의를 말하기에는 낯간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래도 자유와 정의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들만의 자유, 그들만의 정의일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미국에서도 한다는 말로 우리의 맹세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사실 미국에서는 이미 연방대법원의 위헌판결이 있음에도 정치세력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고, 따라서 미국의 개판인 정치구조를 문제 삼아야 할 일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일삼고 있는 미국의 본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일본이나 유럽들에서는 아예 이런 충성 맹세문이 없다는 점을 애써 숨기려 드는 것은 그들도 뭔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나 ‘애국가’ 제창과 같은 국가에 대한 상징에 대한 강요가 없는 게 상식이고, 일반적이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은 특수한 경우라는 점을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결코 자유롭고 정의롭지 못한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의 교과서가 왜곡된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 관료가 신사 참배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노한다. 그리고 또 기미가요 제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교사에 대한 징계 소식이 들리면 일본 사회가 우경화되고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다고 비판하고는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기립하세요. 노래하세요.>라는 방식은 교육행위가 아니다. 전쟁 기간 교육의 재현이다. 교사로서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이상하게 된다.” 도쿄도의 한 중학교 교사 네쓰 기미코가 2006년 학교 졸업식장에서 ‘국가제창’이란 방송이 나오자 일어서지 앉고 천천히 제자리에 앉으며 던진 이 말을, 이제 우리 사회와 교육계도 진지하게 곱씹고 고민해야 할 때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학교에서 기미가요 제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교사가 수백 명씩 중징계를 받아왔는데, 이 땅의 학교에서는 용기와 양심을 실천하는 교사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 6월 11일,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 폐지를 주장한 성명서 중에서



부천의 한 교사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한 것에 대해 3개월의 징계를 내리면서 한편에서는 일본의 우경화를 비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재일본 동포들에 대한 지문날인은 규탄하면서 정작 일본에서는 1990년 중반 이후 외국인에 대한 지문날인제도를 철폐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만 17세 이상은 무조건 열 손가락을 모두 날인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야 일본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색해진다. 허기야 나치 파시스트 음악가인 안익태가 동구의 민요를 표절해 만든 애국가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제창하는 나라이니 무엇을 더 바랄까.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의 이데올로기


이처럼 대한민국은 결코 자랑스럽지 못하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법령으로 만들어 강제하기 때문에 더욱더 자랑스러울 수 없다. 국가와 국민의 전도된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보고, 국민은 국가에 대해 충성을 해야 한다고 외치는 그 이면에서 대한민국은 늘 국민을 대상으로 감시와 검열의 눈을 번득여 왔다. 그리고 ‘IT강국’답게 첨단의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하여 이제는 인터넷과 휴대폰에 대한 상시적인 도감청을 이제는 법을 이용해서 하겠다고 한다. 뒤의 다른 글들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만, 이제 대한민국은 거대한 감시와 통제의 사회로 변하였다. 심지어는 선거 시기에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해야 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려면 자신이 누구인지 ‘민증을 까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란다. 우리 사회가 위험사회이니 범죄수사를 위해서는 국가 구성원들은 모두 예비범죄자로 대우받게 된다고 하는데도 이 나라는 충성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는 인권도 민주주의도 부정된다.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민중들은 당연히 저항하고, 그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폭력이 가해진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시대의 국가를 경찰국가로 사회학자들은 규정한다. 대한민국에서 집회?시위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는커녕 다시 공안기관들로 하여금 구속자를 양산하게 하는 데는 이런 신자유주의 국가의 억압적 본질이 숨어 있다. 국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국가이데올로기를 대체하고 있는 이때에 등장한 국기에 대한 맹세는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 맞는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변형인 것이다.


이런데도 이런 신자유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 앞에서 차렷 자세로 국민인 우리는 대한민국에 충성할 것을 맹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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