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운동 길찾기] 보편성은 또 하나의 교리인가

비상식 인권론 ⑤

지난 호에는 연재를 쉬고 조효제 교수와 특별대담 순서를 가졌다. 이 연재는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인권 논의들을 재검토하기 위한 기획이다. 이를 통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인권 논의를 심화해 보겠다는 의도를 갖고 출발했다. 지금까지 네 번 나갔는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 반론은 없다. 앞으로 연재되는 내용들에 대한 반론을 기대해본다.



인권이 대전제로서 보편성


‘보편성’은 인권의 출발점이자 귀환점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의 내용이다. 공식 번역문인 이 문장에서 인권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지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번역문에서 눈에 거슬리는 대목은 “형제의 정신”이다.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인 것 같은데, 영어의 “a spirit of brotherhood”를 그대로 번역한 표현이다. 영어 표현 자체도 형제로 되어 있으므로 사실 원문이 문제다.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던 때에 채택하였던 흔적이 이런 데서 드러난다.


아무튼 세계인권선언이든 어떤 인권조약이든 이와 같이 인간이 존엄하고,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정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현실에서 대면하는 각종 차이를 지닌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조건만 충족되면, 그는 인간으로서 권리의 주체로 인정된다. 물론 그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표현을 두고도 딴지를 걸 수는 있다. 인간의 생명권을 다룰 때는 그렇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권리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각자의 주장대로 가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도록 하자.


무슨 얘기를 하려는가 궁금하겠지만, 이렇게 인간이면 어떤 차이에도 불구하고 차별하지 말아야 하고, 차별 없이 권리의 주체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이 전제를 현실에 비추어 뜯어볼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인권의 보편성을 승인하고 있다. 상식이다. 인권의 보편성을 승인하기 때문에 인권에는 도덕적 권위가 생긴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도 인권을 쉽게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도전은 인권의 탄생 때부터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논의에 대해서는 『인권: 이론과 실천』(마이클 프리먼 저, 김철효 역, 아르케, 서울) 제6장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마이클 프리먼은 문화상대주의, 소수민 권리, 선주민, 자기결정권,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제기된 보편성 원리에 대한 문제제기를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일독할 것을 권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금까지 보편성 논의를 다시 정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는 보편성이라는 표현으로 가려지는 진실은 없는가에 대해서, 또 보편성을 주장하다보니 구체적인 현실에서 인권의 주장이 진보적인 빛을 잃고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추상적이고, 애매한 주장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보편성 원리의 급진성



지금까지의 보편성 논의는 존재의 특수성에 기초하여 제기되었다. 세계의 문화는 다양한데 기독교 문화에서 탄생한 인권이란 가치를 전 세계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문화제국주의라는 주장이었다. 또 소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추어서 인권을 논하였기 때문에 소수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들에 대한 권리조약이 별도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지점을 공격했다. 이런 지점은 선주민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성의 입장에서는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이 가부장제적인 질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입장에서는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들이댔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나올 수 있는 주장들이었고, 이를 통해 국제사회는 인권의 보편성 원칙에 대해 진지한 논의들을 진행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잘 방어해왔으며, 그를 통해 오히려 보편성이란 원칙은 더욱 강고해진 측면이 있다. 그만큼 보편성이라는 원칙이 무너지면 인권의 논의는 한 발짝도 떼기가 어렵다.


인권이 보편적이라는 대전제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고, 족쇄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노동자가 “우리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차별하지 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는 인권의 보편성은 노동자를 인간 이하로 대하는 자본가와 동등한 위치로 대우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더 발전되면, 임노동 관계 자체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를 가능하게 하므로 평등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임노동관계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남성과 등등하다고 주장할 때도 이와 같은 논리는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들은 분명 현실에서 불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평생을 수족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줄 것을 국가와 사회에 요구하게 된다. 이렇게 보편성은 매우 급진적인 사상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가 되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보편성을 승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보편적인 인권이 먹히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은가.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법을 통해서 피지배계급의 권리를 형식화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애용하는 수단이다. 독재체제에서는 1인의 독재자의 말 한 마디가 곧 법이었지만, 법치의 세계에서는 법으로 은폐된 지배계급의 지배논리가 배어들어 있다. 모두가 한 표씩을 행사하는 투표를 통해서 대표를 뽑고, 그 대표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이므로 그 법을 준수할 것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을 시 공권력이라는 폭력을 동원하고, 감옥에 가두거나 벌금을 부과한다. 이런 논리들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법을 통해서 사실상 인권을 제한하는 것에 우리는 쉽게 저항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법의 지배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우리는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 연재의 다음 번 순서다.



인권의 당파성


우리는 보편성을 승인하는 순간 이런 함정들에 빠져든다. 사실상 계급지배의 체계 속에서 지배계급의 우월적인 지위를 인정한 위에서 피지배계급 내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형식을 부여받는다. 본질적으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은 다르다는 설정이 인권의 보편성 안에 숨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인권이 자본주의 사회 모순을 은폐한다고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그런 연유로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인권이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어쨌건 인권의 보편성은 당파적인 현실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똑 같다는 전제가 힘을 가질 때는 그런 주장이 필요한 이들이 힘을 가질 때다. 역사는 어느 한 순간도 인권이 저절로 승인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을 때, 그래서 지배세력들이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들이 깔고 앉은 기반마저 흔들릴 것이라는 위협을 느낄 때 피지배세력들에게 절실한 권리가 보편적 인권으로 승인되어왔다. 그래서 인권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투쟁 없이 인권의 한 항목이라도 확보될 수 있었던가.


보편성은 그래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 선진적인 주장을 내놓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받고, 그 동의가 확대되면서 힘이 붙고, 그런 힘으로 투쟁을 통해 지배세력의 양보를 끌어냈다. 어떤 때는 격렬한 투쟁을 통해서, 그 과정에서 지배세력에 의한 학살까지 감내하는 가운데서 인권은 비로소 승인된다. 그래서 결국은 다수가 동의하고, 심지어는 지배세력마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권리의 항목이 하나둘 늘어나다 보니 오늘과 같은 인권체계가 생긴 것이 아닌가. 이런 인권의 역사는 오늘도 진행형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소홀하게 취급되었거나 소수의 주장에 그쳤던 것이 내일에는 큰 힘을 얻어서 인권의 체계 안에 안착할 수가 있다.


한 번 보편적인 인권체계 안에 들어온 권리항목은 쉽게 부정할 수 없는 권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그 권리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틈만 보이면 해체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지배세력의 도발이 진행된다. 권리가 보편적 인권체계로 들어왔다고 안심할 것은 아니다. 잘못 하다가는 껍데기만 인권인 권리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에게 인권은 없다


얘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다. 원래의 얘기로 돌아와서 이어가 보자. 우리는 종종 노동자들이 인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권력과 자본이 통제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선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는 이기주의로 내몬다. 파업의 권리에 대해서는 무노동 무임금, 영업방해와 영업손실과 같은 논리로 맞불을 놓는다. 집회와 시위의 권리 행사에 대해서는 다수 시민들의 불편과 이동의 권리를 들고 나오고, 전경들이 부상한 것을 앞세우고 나온다. 다수 시민들의 인권과 전경들의 인권은 무시해도 좋다고 믿는 무법자라고 시위대를 몰아세운다. 이렇게 보편적인 인권은 상대화된다. 이익의 형량을 따지기 시작하면 사실 인권이 들어설 곳은 점점 없어지게 된다. 인권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보장되어야 하는 당위적인 것이다.


그런데 다시 얘기를 사회적 약자의 권리 확보라는 측면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앞의 예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가. 자본가들의 권리와 노동자의 인권을 같은 수준에 놓고 문제 삼는 것 자체가 문제다. 자본가들에게 사실은 인권은 없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을 본질로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가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으로서 탄생한다. 그는 개인으로서 국가권력으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할 수 없는 인권의 주체일 수 있지만, 노동자와의 관계에서는 인권의 주체가 아니라 인권의 가해자로 등장한다.


또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보게 되면, 남성의 인권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질서 속에서 권력관계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남성은 자신들의 지위를 포기하고, 여성과 동등한 지위로 내려와야 한다. 이때 여성의 인권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권리다. 또, 성인과 어린이.청소년의 관계를 보더라도, 성인의 인권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앞의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남성의 인권이 인정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관계들은 많다.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인권은 재정립되고는 한다.


이럴 때 인권은 보편성에 숨어서 마치 모든 인간의 권리를 승인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벗어버리게 된다. 결국 인권은 힘이 없는 자, 피지배세력의 것이다. 자본가에게는 이윤의 몫을 양보할 것을, 남성에게는 가부정적인 권력관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인권은 사회적 약자는 지위를 상승시키고,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세력들에게는 지위를 약화시키거나 낮추면서 균형을 맞출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등은 무늬만 평등이게 된다. 형식적인 기회만의 평등을 규정하는 법 앞의 평등은 결과까지 평등한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것을 인권은 요구한다.



인권은 사회적 약자들의 해방의 수단


인권의 명제들은 “모든 사람은 ∼권리를 가진다”는 식으로 정리된다. 여기에서 인간이 어떤 조건에 있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편적인 인권이 적용되어야 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때로는 피해자의 입장이 될 수도 있고, 가해자의 입장이 될 수도 있다. 인간관계는 중층적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가해자의 인권을 고려할 때는 개인 간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라고 해서 국가가 그의 인권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주장해야 할 인권을 보편성의 진지 안에 안착시킨다면, 인권이 갖는 도덕적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보편적인 인권으로 승인되는 순간, 이제 국가도, 사회도 이런 권리를 특수한 계층이나 소수의 권리로만 인정하여 무시할 수 없다. 그런 권리를 확보하는 길은 관련 국제인권조약에 국가가 당사국으로 가입하도록 강제하거나, 헌법 기본권 규정으로 명문화하고, 구체적인 법률로 기구와 예산을 확보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보편적인 지위를 확보한 인권은 이럴 때 사회적 약자들의 해방을 위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그럴 때 인권은 비로소 인간의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진보적인 이념이 되며, 그로부터 유효한 방안이 도출된다.


이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유효한 방법인 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따져볼 차례다. 다음 호에서는 ‘법의 지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계속)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래군 | 편집인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