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미디어세탁소] 살굿빛 흉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문화일보>의 신정아 씨 관련 인권침해와 선정보도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오래전부터 ‘살굿빛 조선일보’라 불렸던 <문화일보>. 독특하게도 신문지 색깔을 살구 빛으로 바꾼 이후 몇몇 사람들은 <문화일보>를 ‘살굿빛 조선일보’라 규정하였다. 농담 섞인 말처럼 들리지만 점차 <문화일보>에 붙은 수식은 기정사실화되는 듯 보인다. 이는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조선일보>가 가지고 있는 미디어의 상징적 징후가 <문화일보>에서 포착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사진 | 한국여성단체연합


사생활을 담보로 한 흥행의 저열함


연일 계속되는 스캔들과 뜬구름 잡는 의혹들이 언론매체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다름 아닌 신정아씨 학력 위조 파문이 점차 핵심에서 멀어져 가며 이제는 ‘前’이 되어버린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정아 학력위조 파문의 핵심적인 본질은 학력위조를 통한 ‘권력’의 획득과 ‘권력’을 이용한 개입과 청탁이 있었는지에 대한 주목이다. 물론 애초 신정아 학력 위조 파문이 던진 한국 사회 내 화두 가운데 주요한 문제는 학력/학벌 중심의 사회, 그를 통한 학연의 사회적 병폐와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론매체는 한국 사회의 병폐를 꼬집고,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본질적·구체적 답을 구하지 않은 채, 또 다른 학력 위조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흥밋거리에 치우쳐 사건의 본질을 흐리멍텅하게 만들더니 급기야 신정아 학력 위조 파문에 남성이, 그것도 청와대에서 일하는 이가 포착되자 언론매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쾌재를 외치고 나섰다. 사건의 문제와는 상관도 없는 개인의 사생활이 무차별적으로 공개되었다. 신문과 방송은 사건을 풀이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신정아 씨와 변양균씨의 개인적 사생활에 불과한 기사가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신정아 씨는 이미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 속에서 논의되는 대상이 아니었고, ‘거물급 오빠들 많았다(<헤럴드경제>)’는 섹스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결국 언론매체는 신정아 씨 배후의 ‘몸통’에만 혈안이 되었을 뿐, 신정아 학력 위조 파문 사건의 핵심적 ‘몸통’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점차 사건은 본질에서 멀어져가고, 황색저널리즘의 본색이 드러날 때 즈음 결정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창 언론매체가 신정아 씨와 변양균 씨의 사생활과 주변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아갈 때 <문화일보>는 9월 13일 1면 ‘신정아 누드사진 발견’이라는 기사와 3면 ‘성로비도 처벌 가능한가’라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그리고 신정아 씨의 누드 사진을 2면에 버젓이 게재하였고, 이로 인해 <문화일보>는 인터넷 포털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와 접속자 폭주로 인한 홈페이지 다운이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추악하고 저열한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대박’에 <문화일보>가 희열을 느꼈을 그 순간, 한국 사회는 분노하고 경악하였다. 그리고 <문화일보>에는 언론의 기능도 저널리즘의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1)


충분한 사적 영역이다. 신정아 씨의 누드 사진이 외설적이기 때문에 독자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포르노를 유포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될 것을 악착같이 보여주고자 하는, 굳이 말 안 해도 될 시시콜콜한 정보를 집요하게 까발리는 현대의 대중매체를 외설적이라고 비판한다.2) 그렇다. <문화일보>는 외설적이다. 의도적으로 신정아씨의 누드 사진을 공개하고, 그로 인한 흥행을 내심 기대했다. 대량 유포된 신씨의 벗은 사진은 응시하는 카메라 시선 배후에 숨은 비리의 국가권력, 음흉한 문화권력, 야비한 매체권력에 노출된 개인의 약한 신체, 짓밟힌 여성의 허술한 인권을 비극적으로 드러낸다. 포르노화한 야만적 매체체제를 역설적으로 입증할 뿐이다.3)



‘알권리’가 아닌 ‘무차별적 폭력’


그리고 이중적이다. 분노하지만 관음한다. 신정아 씨의 누드사진이 게제되었다는 소문은 신문 발행과 함께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갔다. 포털사이트 검색어 1, 2위를 <문화일보>와 ‘신정아’가 앞다투었다. 신문, 인터넷신문, 방송 등 온갖 매체가 신정아 씨 누드 사진 게재에 주목하고, 기사는 또 다시 가공되어 등장하였다. <문화일보>가 의도한 외설적 파문이 삽시간에 한국 사회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갔다. 그리고 <문화일보>는 포털 검색어 순위 1위라는 수상 소감을 다음 날 지면을 통해 밝혔다. <문화일보>는 다음 날인 9월 14일 3면에 ‘사건실체 이해에 중요단서로 판단’이라는 기사를 통해 “사진의 존재 사실을 보도한 것은 이 사진이야말로 신씨로 인해 최근 두 달여 계속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문화일보>는 사생활 침해, 인권 침해에 대해서 반성은커녕 “독자들의 신씨 사건 본질 이해를 돕는다는 ‘알권리’가 상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며 오히려 되도 않는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한 <문화일보>는 사회적으로 비판의 여론이 거센 가운데에도 <문화일보>가 발행하는 무료신문 14일자에서 <문화일보>의 보도를 인용하며 신정아 씨의 누드 사진을 살짝 더 모자이크 처리해 게재하는 등 개인은 물론 한국 사회를 향해 무차별적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일보>가 주장하듯이 독자들은 무엇에 관한 어떤 ‘알권리’가 있는 것일까? 당일 <문화일보> 기사 그 자체는 사실상 조목조목 반박하고, 비판할 만한 가치조차도 없다. 신정아 씨의 누드 사진을 게재하기 위해 구차하게 적어놓은 변명조차 되지 않는다. <문화일보>는 누드사진을 게재하면서 ‘성로비’에 초점을 맞췄다. 추측이고, 의혹이었다.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근거들을 우왕좌왕 설명하면서 신정아 씨의 누드 사진을 부각하였다. 근거도 없는 추측성 기사로 일관하면서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 독자들의 ‘알권리’를 위한 언론행위인 것인가? 한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관음하며 침범하고, 범죄로 몰아가기 위해 개인의 몸에, 그리고 인권에 흉기를 휘두르는 것을 독자들이 알아야 하는 권리라 주장하는 것인가?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정보를 집요하게 캐내어 독자들을 향해 흉기를 휘두르는 <문화일보>가 어떻게 ‘알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신정아 씨의 누드 사진은 물론이고, 사생활과 연애관계,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의 모습과 선호하는 브랜드 등은 신정아씨 학력 파문 위조 사건을 둘러싸고 독자들이 알아야 하는 정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일보>는 사생활.인권 침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정보에 대해 사과는 못할망정 독자들의 ‘권리’를 위한 것이라 소리 높이고 있다.


‘도색잡지(양문석)’, ‘포르노 매체(전규찬)’ 등 신정아 씨 누드 사진을 게재한 <문화일보>에 대한 새로운 수식이 붙고 있다. 이처럼 <문화일보>는 신정아 씨 개인의 인권 침해는 물론, 저널리즘의 가치와 사회적 책무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제 <문화일보>를 언론이라, 미디어라 호명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가 자처한 언론의 책임방기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하고, 어떻게 <문화일보>를 언론매체라 인정할 수 있겠는가?



<문화일보>의 반문화성


사실상 <문화일보>는 그 동안 저널리즘의 역할과 기능의 경계를 오고가며 여론을 왜곡하거나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서 외면해왔다. 특히 <문화일보>는 문제의 핵심을 비껴간 선정주의의 논조를 고수하였으며, 권력에 대해 감시의 촉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소외된 계층에 대해서 질타하고 비판해왔다. 이런 과정 속에서 신정아 씨 누드 사진 게재 파문은 그 동안 <문화일보>가 지향해왔던 저열한 욕망의 줄타기의 절정으로 드러났고, <문화일보>는 이제 그만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야 하는 매체가 되고 말았다.


<문화일보>는 현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대그룹이 <문화일보>에 출자한 상황에서 <문화일보>가 현대라는 대기업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신임사장이 들어올 때마다 화두였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지난 2005년 국감에서 대한축구협회가 논란의 대상으로 부각하였을 때였다. 대한축구협회는 회계부정을 일삼으며 정몽준 회장 개인의 사조직 문제에 대해 체육계와 시민단체는 물론 국회에서까지 논의가 진행되었다. 시민단체들은 비판 여론을 원천 봉쇄하기 위하여 ‘정몽준 장학생’을 관리한 사실에 대해 사과하고, 대한축구협회의 투명한 운영과 행정, 정상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문화일보>는 “축구를 정치판에 이용”한다면서 “일부 정치인들이 ‘국민적 관심사’를 구실로 축구를 정치판에 끌어들인다면 ‘국민적 저항’으로 되돌아 올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며 오히려 대한축구협회를 옹호하였고, “‘축구협회 때리기’ 위한 國監?”과 “‘축구협 국감’ 일파만파”라는 기사에서는 축구인들의 프라이버시 침해와 기업의 영업 비밀 공개라며 경악하였다. 그리고 정작 대한축구협회의 회계부정과 투명하지 못한 운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설명조차 없었다. 그리고는 침묵하였다. 속 빤히 보인다. 정몽준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그저 대견할 뿐이다.


어디 이뿐인가. <문화일보>는 친재벌적인 논조를 유지하며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을 향해 늘 쓴 소리를 해대기 일쑤였다. 최근 비정규직 보호법의 시행으로 인해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세다. 특히 이랜드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차별적 해고에 저항해 매장점거는 물론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일보>는 사업주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노조원들이 밉살스럽기 그지없는 모양이다. <문화일보>는 몇 차례의 사설을 통해서 이랜드 노조의 정당한 노동권을 되찾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 다그쳤다. “이랜드 노조는 영업방해 말라(7월 26일)”는 사설을 통해서 “이랜드 노조는 뉴코아와 홈에버를 중심으로 빚어지고 있는 사회적 물의에 대해 국민과 정부에 사과한 회사 측의 고충을 이해하고 매장 현장의 질서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 바란다”고 말한 <문화일보>는 7월 30일 사설을 통해서는 “법에 정면 도전한 이랜드 노조와 상급 민주노총”이라며 호통을 쳐댔다. 8월 25일 “노조도 이젠 세계를 보라”는 사설을 통해서는 이랜드 사업장의 문제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에 대해서 “민주노총이 개입하면서 매장 점거, 오물 투척, 불매운동 등으로 영업 차질을 빚는 중이다. 이런 식의 투쟁은 회사, 비정규직, 영세상인 모두를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아 끝내 자신들에게도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라며 “국내에서 작은 이익을 두고 티격태격하다 보면 글로벌 경쟁사들은 멀리 앞서가”게 된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한 <문화일보>는 생존의 문제로 고된 투쟁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 노동자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동시에 기업과 사업자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기업자본의 그림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문화일보>는 7월 6일자 “비정규직 정책 실패가 왜 기업 탓인가”라는 사설을 통해서 “비정규직 존재는 그의 진단처럼 노동시장 양극화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결과적 현상에 가깝다. 정규직을 채용할 여력이 없다든지 정규직이 기피하는 영역에 기업은 비정규직을 활용해왔다. 또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지나치게 보호받을수록 비정규직을 늘려온 것도 사실이다. 이 실정을 익히 알면서 굳이 외면하고 법의 허울로 강요하면 고용 자체를 재조정하는 것, 그것이 기업의 불가피한 선택이다.”라고 말한다. 친자본 매체들이 극성을 부리는 요즘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문화일보>가 자본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현실 속에서 매체를 통해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문화일보>는 폐간이, 마땅하다


매체는 다양하고, 다양한 목소리가 사회 속에서 소통되어야 한다. 방송이나 신문이나 그리고 개인이 작성하는 블로그 포스트 역시도 모두 언론행위이고, 이와 언론행위 속에서는 서로 다른 비판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권력과 헤게모니 속에서 사실을 은폐하고, 내용을 왜곡하고, 소수를 대상화시키고, 보이지 않는 헛것들을 위해 봉사하라고 주장하며 다른 목소리를 배제하는 데 있다. 따라서 삶의 기본적 가치들을 훼손하고, 평화.평등.호혜의 의미를 묵살하고, 폭력과 반민주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매체는 존재 의미와 가치가 없다. <문화일보>가 딱 그러하다. 무조건적 다양성이 아닌 공공성과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가치 속에서 <문화일보>는 폐간이, 마땅하다.

덧붙이는 말

1) [성명] “천박한 ‘특종’을 위해 사회를 향해 ‘흉기’를 휘두른 <문화일보>는 퇴출되어야 한다(문화연대, 9월 14일)” 참고 2) “포르노 매체의 야만적 풍경”(<미디어오늘>, 9월 14일, 전규찬) 3) 앞의 글, 전규찬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김형진 |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활동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