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뜨거웠나, 시원했나, 두고 볼 일이다

대충대충 얼렁뚱땅 사회운동포럼 참가기

왜 하필 나한테 이런 글을 쓰게 하냐고, 절대 못 쓴다고 도리질했지만 편집장은 들어주지 않는다. “당신한테 객원기자 명함 파주고, 그 검문 심한 대추리를 몇 번이나 무사통과하게 해 줬는지 기억한다면, 쓰라는 글 열심히 쓸 일이지.”라는 눈빛이었다. 헐값에 지면을 채우려는 그의 의도는 빤하지만, 나는 왜 이 기사만은 이렇게 쓰기 힘들어하는지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누군가는 주최 측이 무슨 참가기를 쓰냐고 했으며, 진짜 주최 측인 누군가는 ‘어, 박진은 제대로 참가하지도 않았잖아’라고 되물을 형편이니 그 어중간함이 하나의 이유일 터. 어쨌든 대충대충 얼렁뚱땅 사회운동포럼 참가기, 뜨거웠나, 시원했나 슬쩍 들춰보자.


사회운동포럼의 출발은 알다시피 월간 <사람>의 박래군 편집장이 제안한 글이 시작이었다. 그는 이미 진보운동은 위기에 처해 있으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진보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할 주체들(그는 민중언론 <참세상>에 기고한 글 ‘왜 진보운동의 새로운 기획인가’에서 ‘인권, 생태, 여성주의, 평화, 지역’운동의 주체들을 거명했다)과 주류운동이 대화와 교류를 해야 한다, 이러한 연대는 별개의 운동, 일시적 연대가 아니라 ‘우리 사회 진보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창출해야 한다는 역사적 과제를 공동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는 문제의식 속의 실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울 것 없는 제안, 그러나 선택도 없다


사실은 이미 새로울 것 없는 문제제기였다. 기존의 운동조직은 둔갑술을 부리듯 요동치는 현실의 문제를 감당하기에 너무 낡은 그릇이 되었고 심하게는 나쁜 권력과 점점 쌍둥이 같이 닮아가고 있으며, 희생되는 사람과 자연은 급속도로 늘어가는 세상 아니던가. 그러니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위기다, 반성하고 대안을 마련하자…. 이야기는 오히려 구태의연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새로울 것 없는 제안이 솔깃했다.


사무실 앞 4차선 대로까지 형태가 변해버릴 만큼 변화무쌍했던 10년 동안, 한 치도 좋아지지 않은 세상. 초고층 마천루들은 고급화에 페달을 밟고 세련의 극치를 달리지만 그 건물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하꼬방 같은 쉼터는 아직도 곰팡내가 나고, 한 달 80만 원도 되지 않는 월급은 언제 잘릴지 알 수 없는 처지에 천금만큼 귀한 거금이 되었다. 그것이라도 붙잡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점점 비루해지고, 가난한 자들의 의식도 부자의 것과 다르지 않아 개발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희생되어도 좋다는 식의 보수주의에 포섭되었다. 울부짖는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이 점거한 계산대를 지나 좀 더 값싼 물건을 소비하려고 무심히 지나치는 보편타당한 시민들의 의식 앞에 수 없이 좌절하며, 나는 무엇을 위해 운동이라는 것을 선택하고 있는지 분노와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그보다 더 잔인한 것은 10년째 변하지 않는 선수들. 오히려 떠난 사람들은 부지기수고 새로운 사람은 보이지 않는, 사회운동이라는 직업군은 몸도 지치고 마음은 더욱 지쳐가는 그야말로 3D업종 아니던가. 그 와중에도 각 정파는 그들만의 리그전을 치르느라 말따먹기 전투에 지쳐가고, 권력과 싸우고 자본과 대항해야할 때는 가족들과 스키를 타러가고, 그래도 싸워보자고 고군분투하는 몇 안 되는 선수들은 한미FTA 투쟁에서, 이랜드-뉴코아 투쟁에서 용병처럼 몰려다니며 경찰 방패에 쥐어 터지고 있지 않은가. 하늘아래 희망은 이제 없다고 포기하기에 자존심이 있지. 희망을 만들어 보자는데, 일단 그의 제안에 솔깃해보자는 것이 나의 선택이었고 사회운동포럼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마음 아니었을까.



그래?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그래? 그럼 어떻게 할 건데? 현실의 고단함과 운동의 정체, 목젖까지 차오른 자기 운동에 대한 불만과 돌파구 없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데? 여기서 사회운동포럼의 선택은 일단 한번 모여서 ‘소통/연대/변혁’을 외치자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으나) 그랬었나보다. 미리 말했지만 나는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이였지만 주최 측은 아니었기에, 엄밀하게 따지면 내가 안고 있는 문제의식 이상을 벗어나 무언가를 만들어낼 재주는 없는 이였기에, 적당히 참여했으나 묘하게 관전에 임했던 또 하나의 제3자였다. 여기에는 ‘그래? 그럼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는 얄팍한 계산속도 있었다. ‘잘되면 떡 하나 얻어먹고, 잘못되면 내 탓은 아니지.’라고 발뺌할 수 있는 비겁한 이의 참가기, 이제 들어가 보실까?


친구 하나는 ‘진보운동의 새로운 기획’이라는 큰 꿈이 왜 굳이 포럼이라는 자리로 좁아져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새로울 것이 없지 않겠냐는, 그의 아쉬움에 나도 동의했다. 2007년 한 해 동안 내가 기억하는 포럼만 하더라도 ‘한국사회포럼’, ‘맑스코뮤날레’, ‘맑시즘2007’ 등이 있으니 또 하나의 새로운 포럼이 아니기 위해서, 또 다른 포럼이 되기 위해서 조직위원회는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 또 하나 (미안한 이야기지만) 조직위원회에 구성된 사람들이 너무 익숙했다. 새로운 선수들을 보고 싶었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뭐야 ‘인권, 생태, 여성, 평화, 지역’의 새로운 흐름은 어디로 간 거야. 그리고 백만대군을 자랑하는 민주노총, 현장의 노동해방 전사들은 다 어디에 숨었다니, 소위 말하는 사회운동 좌파그룹 선수들 말고 눈에 보이는 자들이 별로 없네. 아쉽다.


하지만 조직위원회는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힘겨운 산 하나를 거뜬히 넘어섰다. 포럼이나 대토론회들이 갖는 뻔 한 과정과 내용(전혀 새로울 것 없는 매년 똑같은 주제, 똑같은 전문가)을 경계하며, 2개의 대토론회와 4개의 열쇠말, 13개의 주제별 워크숍을 준비하기 위해 5월부터 8월 사이에 각 기획단별로 모임을 가지고 사전토론을 했으며, 여러 차례의 횡단대화 자리와 워크숍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회운동포럼 조직위원회는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4일간 성균관대학교에서 보인 사회운동포럼은 6,7,8월 동안 각 기획단별로 진행된 중소규모의 온오프라인 모임과 교류의 결과이자, 빙산의 일각”이라는 표현을 썼다. 또한 특별한 후원, 거대조직의 분담금, 정부기관의 지원금 따위에 기대지 않고 풀씨(조직위원)들의 한푼 두푼으로 행사를 치러낸 것도 커다란 성과일 것이다. 발제자건, 토론자건, 사회자건 출연료를 마다하고 하나의 풀씨가 되어 참여했다. 두 개의 토론회에 참여했던 나도 그랬고, 그걸 깨닫고 보니, 다들 기특하다는 생각. 물질로 채울 수 없는 열망을 그 자리에서 채웠으니 값은 톡톡히 받았다.



여전히 어려운 언어들, 그러나 열정에 넘쳤던 청중


말 못하다 죽은 귀신들이 붙었는지, 어찌나 말들을 잘 하던지. 사회운동포럼의 시작을 알리는 대토론회 1부. ‘전쟁과 빈곤의 시대, 사회운동의 대안이념과 변혁의 전망은 무엇인가’라는 어마어마한 제목의 토론회는 토론자들조차 긴장시키는 시작이었다. 이들은 ‘△시대규정 △한국사회운동역사에 대한 평가 △사회운동혁신방향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는 공통질문을 두고, 한국사회운동의 평가와 사회운동의 혁신 방향을 중점으로 이야기했다. (또다시 미안하지만) 2부 토론회를 준비한다는 핑계 반,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들로 인해 자리를 일찍 비웠다. 이후 기자들의 놀라운 정리 능력에 힘입어 토론회 내용을 훔쳐보니 ‘조직적으로 사회운동이 위기라고 하지만, 위기의 핵심요인은 민중들과 조직적인 결합이 취약했던 점’과 ‘여전히 운동에 대해 무엇을 중심으로 얘기되고 있는가가 눈앞에 보인다, 노동계급이 유일한 보편계급이라고 하는데 여성주의, 생태주의에서는 주체가 달라진다. 의식적으로 특권화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평등한 상태에서 새롭게 이념이 재구성 돼야 한다’(<참세상> 기사 인용)는 말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쨌든 새로운 사회운동 활동양식 열쇠말(이하 새로운 양식) 워크숍에서 밝혔듯, 운동사회의 문어적 표현과 언어는 내 귀에도 쏙 들어오지 않으니, 문제는 문제다. 다음날 있었던 새로운 양식 워크숍에 참여한 지역참가자 한분은 이렇게 말했다. “어제 토론회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너무 어려워서 아는 사람 만나고 왔는데, 오늘은 귀에 쏙 들어오네요. 이후부터 하는 워크숍이랑 토론회에 제안해서 이렇게 좀 합시다” 조금 딴 곳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지만, 내가 새로운 양식 워크숍에서 언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게 된 배경은, 사회운동포럼을 지역의 여러 활동가들에게 제안하면서 ‘이거 좌파들이 뭐 하자는 건가봐?’ 또는 ‘뭔 말이 이렇게 어려워, 너무 어려운 주제라 나하고는 멀어.’라는 거부를 당했기 때문이다. 여러 술자리에서 또는 집회현장에서 운동에 대해, 삶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했던 그녀들조차 생경해 하는 언어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운동을 어떻게 조직할 것이며, 보다 많은 민중을 어떻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이것도 넘지 못하고 무슨 새로운 운동인가. 이러한 문제는 사회운동포럼 기간 내내 이어졌다. 구체적 현장을 거론했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화하는 뜬 구름 잡는 언어들이 난무했다. 비단 언어의 문제인가, 내가 소통하고자하는 이들, 변혁을 위해 연대하는 이들을 만나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 2부 대토론회의 토론자였던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김진억씨는 그것을 집약해 ‘무능한 좌파들’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부 대토론회 ‘사회운동의 소통과 연대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가 끝났던 시간 밤 11시까지 강당을 꽉 채운 청중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지금 ‘소통’과 ‘연대’가 서 있는 자리 △운동 안에서 작동하는 분할과 배제 △운동의 방식 앞에서 무릎 꺾이게 되는 지점들 △가치, 운동들 사이의 횡단 △소통과 연대를 복원하기 위한 열쇠말 등 5개의 질문에 대해 9명의 패널은 짧은 시간에 어떻게든 자신의 경험과 의견을 보태기 위해서 경주했다. 하지만 성토는 있었지만 그래서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인가는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았다. 기껏 대안으로 ‘운동진영 내 담장 허물기와 자기 영역을 두툼하게 만들어 보자’는 대안을 제시한 나 역시 청중들의 열의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현실 토로에 그쳤던 2부 대토론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길 내내 헛헛했다. 역시 현장에 기반을 두지 않는 소통과 연대는 공염불이다, 몸을 굴려 미래를 만들어야지,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야지, 결심은 그것이었다.


토론자로 참여한 새로운 양식 워크숍 외에는 ‘비정규운동의 비상(飛上)을 위한 원탁토론’과 마지막 날 사회운동총회밖에 참여하지 못했다. 갈매기살 번개 모임만 없었어도 그 재미났다는 빈곤심판민중법정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말도 안 되는 대학구조조정을 말(抹,없애다)하다’, ‘남북정상회담과 미군 없는 평화체제’, ‘지역운동의 평가와 전망 모색’도 참여하고 싶었다. 자료집에 실린 글이 아니라, 사회운동포럼을 채운 생동감 넘치는 열기를 만나고 싶었지만 이래저래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이렇게 부실하게 참가기를 쓰게 될 줄 알고, 그렇게 마다했는데, 어쩔 수 없다. 필자를 잘 못 고른 편집장이 책임을 질 일이다.) 그래서 종합해서 어땠냐고? 변혁과 소통, 연대로 심장이 뜨거웠나, 그러한 것들이 채워져 가슴이 시원했나? 글쎄 두고 볼 일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사회운동포럼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고 이제부터 시작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운동이 변혁에 새롭게 발 딛지 못한다면 이제 죽는 일만 남았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열망한다, 사회운동포럼의 문제의식이 현실에서 타오르기를. 그곳에 나도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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