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이에요, 당연하지] 노약자는 노약자석에?

배려가 규칙이 되는 순간 그들의 권리는 박탈된다

아는 사람의 경험담이다. 어느 날 지하철 노약자석에서 어떤 할아버지와 젊은 여성이 마구 싸우더란다. 아이들 둘과 함께 탄 여성(아마도 아이 어머니인 듯)은 아이들을 노약자석에 앉히고 자신은 서서 가던 중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왜 노약자석에 아이들을 앉히냐며 화를 내던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弱’이라는 한자는 ‘老’를 수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약자석의 노약자란 약자인 노인들만을 지칭하는 것이지 다른 약자들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며 화를 내셨고, 아이 어머니는 노약자석 창문에 그려진 픽토그램을 보라며 노인과 장애인, 임산부까지 그려진 그림을 보면 약자를 포함하는 것인데 왜 아이들이 앉으면 안 되느냐고 따지고 있었단다. 그 얘기를 들은 나와 주변사람들은 일제히 ‘노약자’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노약자’의 사전적 의미는 ‘늙은이와 약한 이’로 되어 있었다. 마치 ‘노약자’라는 것이 특권인 양 생각하고 있는 그 할아버지가 안타깝기도 하지만, 같은 약자들이 서로의 자리를 뺏으려고 싸웠다는 그 얘기가 맘 편하게 들린 것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난 버스나 지하철에서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정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절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특히 할아버지들에게. 위의 사례처럼 마구 소리 높여 싸우시는 할아버지들이 얄미워서 그렇기도 할뿐더러, 어렸을 때 자리에 앉아서 깜빡 잠들었는데 어떤 할아버지에게 자는 척한다고 오해받고 지팡이로 두들겨 맞으며 차타고 가는 내내 욕먹었던 기억 때문일 거다. (왜 내 주변에서 이런 경험 있는 사람들은 대개 할아버지들한테만 욕을 먹었을까?) 요즘이야 지하철 경로석에는 아예 앉을 생각조차 안하지만(아마도 모 제약회사의 드링크제 광고-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탓일 게다) 버스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우선 좁은 공간이다 보니 우선 앉고 본다. 그러다가 나이 드신 어른이 타시면 양보를 할 때도 있고, 경로석이 아닌 곳에 앉아있으면 양보하지 않는다. 왜냐고? 나도 힘들다. 하지만 임신한 여성들에게는 한사코 자리를 양보하기는 한다.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다. 한동안 꽤나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녀 본 경험에 의하면 정말 24시간 내내 그 무게를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고 존경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니까.



노약자라고 말하는 순간


자리도 양보하지 않는 주제에 왜 뜬금없는 노약자석 타령인가 궁금하실 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얼마 전 너무 당당하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이 꽤나 민망했던 경우를 겪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두 분이 양손에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지하철에 올랐다. 노약자석도 아니었고 웬만하면 양보하지 않는 정신을 가진 나는 앞에 누가 서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잠시 후, 내 옆에 자리가 났고 두 분은 그 자리에 나란히 앉으셨다. 그러나 그도 잠시, 두 분 중 한 분이 말씀하셨다. “에이, 우리 자리로 갑시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 옆을 돌아봤다. 척 보기에 호감가고 따뜻해 보이는 인상(주관적 편견일 뿐이지만)을 가진 할머니 두 분이 주섬주섬 짐을 들고 왼쪽의 노약자석으로 옮기시는 것을 말이다. 이제 노약자석이 아닌 좌석은 ‘노약자는 앉아서는 안 되는 자리’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을 실감하고 계셨던 거다.


여성, 어린이, 혼혈인, 노숙인, 장애인…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들은 얼핏 별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지칭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일까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저 단어들은 특정한 집단을 그들의 가진 개성과 가치를 무시한 채 일반적 특성으로만 사람들을 구별 짓는다. 남성-여성, 어른-어린이, 순혈인-혼혈인, 정상인-장애인, 노숙인… 다 똑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사람들의 특성을 분리하고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보편적이고 다수인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다. ‘노약자’라는 말을 하는 순간 사람들은 힘없이 늙어버린, ‘집에서 아이나 돌보거나 폐지나 줍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고,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휠체어나 활동보조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끄집어낸다. 그것이 단순히 그런 관념을 가진 사람들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여성이 단순히 ‘housekeeper’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여성의 역할들을 이해시키고 선전했던 여성운동가들의 노력 때문이었으며, 저상버스에 익숙해지게 된 것은 숱하게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지하철 선로 위에 사슬로 몸을 묶고 투쟁했던 장애운동가들의 노력 때문이 아니었던가. 사실 제대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에 대해 막연한 편견을 갖는 것에 대해 그 자체가 문제라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편견이 차별이 될 때


하지만, 그 편견을 차별로 만들어버릴 때는 문제가 된다. 노약자석이 처음 생겼을 때, ‘노약자들에게 얼마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으면 저런 자리가 만들어졌을까’하던 생각은 이제 ‘노약자석은 저쪽이니까’라는 생각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나와는 다른 사람, 당연히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사이의 차별을 계속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노약자는 노약자석에 앉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자리에도 당연히 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약자가 아닌 사람들도 노약자석에 앉을 수 있다. 노약자석을 비워두는 것은 말 그대로 약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이지 교과서에 찍혀 나오는 명문화된 도덕이 아니어야 한다. 약속은 깨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법은 어겨지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노약자는 노약자석에’라고 말하는 순간 노약자들은 나머지 공간에 대한 점유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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