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Mom, I killed your only son.

여자, 혜진을 만나다

벨기에로 입양됐던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아, 복잡다단하고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겠구나 짐작케 하는 단어들로 규정된 그녀 혜진. 인터뷰 전에 한 번 보자는 말에 그녀를 탐색하러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그녀를 인터뷰 대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월간 <사람>이 그녀에게 평가받는 자리였다.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인 자신을 편견이나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잡지인지 어떤지…. 통역을 도와주시는 복어알님을 통해 그동안 어떤 분들을 인터뷰 했는가와 몇몇 꼭지의 성격을 설명하고 나서야 그녀의 승낙(?)이 떨어졌다.



혜진은 1984년 4월 태어나 생후 14개월 때 벨기에 안트워프의 작은 마을에 입양되었다. 가족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며 성장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열일곱 집을 나오던 그때의 심정부터 들려주었다.



“어렸을 땐 주변에 나와 닮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굉장히 외로웠어. 모든 게 굉장히 이성애 중심적이었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다 똑같애서 숨 막히는 기분이었지. 보통의 젠더모델도 들어맞지 않았고 섹슈얼리티도 맞지 않고, 사회에서 ‘정상적’이라는 하는 것들이 나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힘들었지.
14,5살 때부터 학교가 맘에 안 들어서 학교나 주변 친구들과 거의 담을 쌓고 지냈어. 그 전에는 숙제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잘 받을라고 하고 그랬었는데… 학교 친구들은 내가 입양아라는 걸 아니까 놀려먹었지. 동양인이라 인종차별적인 놀림도 받고, 여성적인 특성 때문에 날 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근데 난 사람들이 날 게이 취급하는 게 불만이었어. 난 게이가 아니라 여자라 그런 건데.
그리고 학교에서 배울만한 게 없었어. 이를 닦는다거나 수학문제를 푼다거나 이성과 결혼한다거나, 이런 정상적으로 사는 것만 가르쳐 주잖아. 이런 불만들이 폭발해서 16살에 자퇴하고. 집을 나온 건 17살 때, 그건 내 선택이었어. 다른 식구들한테 물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나가길 바랬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누구일까?


피부색이나 인종문제도 물론 사춘기의 그녀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자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게이인지 문제가 뭔지에 대한 불안과 혼란이 혜진을 잠식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나고픈 욕망, 여기만 벗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는 환상에서 그렇게 자의반타의반 집을 나왔다.



“친구 집에서 지냈어. 그때는 그냥 하루하루 살았지. 이때 트랜스젠더를 만나게 되면서 내가 트랜스젠더구나 깨달았지. 하루는 암스테르담에서 파티가 있어서 놀러갔다가 지금까지 5년 동안 눌러앉게 된 거야.(웃음) 암스테르담엔 뭔가가 있는 거 같애. 친구 중 한 명은 며칠 여행 왔다가 지금 15년째 살고 있는 친구도 있어. 내가 암스테르담에 눌러앉게 된 건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심도 됐고… 머랄까,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점 같은, 사실 내가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는 이미 바닥을 친 상태라 올라갈 일밖에 없었으니까. 근데 너무 비관적으로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여기서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을 만나면서 내가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이란 걸 알고 젠더 클리닉에서 여성호르몬 처방도 받기 시작했지.
어쨌든 무작정 암스테르담에 가 살면서 성노동을 처음 시작했어. 그래서 경제적으로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건 18살에 ‘퀴어 스캇(Queer Squat)’에서 활동하면서 ‘사이렌(De Sirenen)’이라는 페미니스트 그룹에 들어가면서부터일 거야. 사이렌은 80년대 생긴 학생들로 이루어진 급진적 페미니스트 그룹인데 난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식멤버는 될 수 없었고, 몇 번 일을 도와주면서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지.
그리곤 퀴어업션(Queeruption)이라는 아나키스트 그룹에 끼어서 베를린으로 히치하이킹을 갔어. 퀴어업션은 ‘다를 수 있는 권리’를 내세우는 운동인데, 다른 이성애자들과 같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다르게 살면서도 존중받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롭고 개방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그룹이야. 같이 DIY(Do It Youself!), 집도 직접 짓고 음식도 직접 만들어 먹으면서 생활했지. 암스테르담에서도 한 번 퀴어업션이 열렸는데 그때 기획단으로 참여했어. 일주일간 열렸는데 스캇한 창고 같은 건물에 텐트를 치고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행사를 여는 거야. 평소 7명이 살던 건물인데 텐트치고 한 300명 정도가 살았지. 많을 때는 최대 700명까지 같이 살았었어. 근데 여긴 굉장히 백인중심적이야. 대놓고 노골적으로 차별하진 않는데 여러 차별적인 뉘앙스들이 느껴져. 그래서 여기선 발을 뗐어.”



다를 수 있는 권리를 향한 여행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지향하는 단체 내에도 오리엔탈리즘은 살아 있다. 아시안은 특이하고 이국적인 존재였고, 흥미로운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혜진은 인종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없어서 그곳을 나왔다고 한다. 2003년 우연히 구인광고를 보고 지원한 퀴어 아카이브(International Gay/Lesbian Information Center & Archive)에서 일하면서 ‘세상을 바꾸고 싶은’ 그녀의 꿈에 한 발짝 다가갔다.



“아카이브에서 나의 공식적인 직책은 정보전문가(Information Specialist)지만 모든 일을 다 해. 자료검색, 데이터베이스 관리, 기자들 방문응대도 하고 뉴스레터도 만들고.
2005년도에 친구가 브뤼셀에서 열린 European Conference on Sex-Worker Human-Rights, Labour & Migration에 참가하라고 권유해서 갔다가 성노동자 운동을 시작했지. 컨퍼런스가 열리는 3일 동안 섹스워커들이 주축이 돼서 성노동자인권을 위한 선언을 작성해서 유럽의회에 발표했어. 의회위원으로 있는 녹색당 의원들이 초청을 해줘서 가능했지. 이후에 유럽의회(European Councils)에 소속된 국가들의 인권운동가 네트워크인 YOUACT에 가입해서 멤버로 활동하고 있어. YOUACT에서는 재생산권, 성적권리, 낙태문제, 성소수자 문제에 관해 강의를 진행해. 주로 내가 하는 일은 커뮤니케이션 부분, 다른 활동가 단체와 접촉하는 일을 하고 있어. 물론 성소수자 인권문제나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사안에 대해 문제제기하기도 하고.
올 3월부터는 암스테르담 성매매정보센터(Prostitution Information Center in Amsterdam)에서도 일해.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데, 일반 대중들에게 섹스워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교육하고 있어. 이 안에 가게가 있는데, 책이나 티셔츠를 팔아서 섹스워커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서 쓰고 있지.
4월엔 오스트레일리아 지구 액션파트너로 선정 되서 옥스팜(Oxfam)1)의 3년짜리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어. 젠더적 경제정의, 평화, HIV와 관련해서 활동하는데 운동의 경험을 쌓는 좋은 기회인 거 같애.”



세계는 나의 무대


불안과 혼란이 떠난 자리를 세상을 바꾸려는 그녀의 열정이 채우고 있다. 이 일 말고도 키르기스스탄의 Labrys에서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여성들을 대상으로 ‘퀴어 여성들의 안전한 섹스’에 대해 컨설팅도 하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세계는 나의 무대’다. 이렇다보니 일주일 내내 일을 한다. 올 4월 성전환수술을 위해 잠깐 쉬는 동안 침대를 떠나기 싫었다고 한다.



“수술을 옥상 컨테이너 박스에서 했어(병원이 재건축 중임을 이렇게 표현). 수술대 위에 누웠는데 검은 고양이가 지나가는 거야(서양에서 검은 고양이는 불길한 징조다). 불안했지. 수술이 끝나고 나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생각이 마비돼 아무 생각도 안 나. 기쁘다기보다는 드디어 끝났다, 해치웠다는 후련함 같은 거….
사실 성기가 성별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나는 그냥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인 거니까. 그러니까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말은 쓰지 말았으면 좋겠어. 왜 꼭 신체를 바꿔야하는지 모르겠어. 그러면서도 내가 수술을 한 건 아이러니지.
사람들이 자꾸 나한테 왜 가슴수술을 받지 않느냐며 몸에 대해 물어오는데 그건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해. 작은 가슴을 가진 여자들도 많은데 그 여자들한테는 왜, 어떤 의미에서 여자라고 생각하냐고 물어보지 않으면서 왜 나한테만 물어보는데?(목소리가 격앙됐다) 왜 그런 질문을 아무 고민 없이 하는 건지, 그건 상당한 실례라구!”



혜진은 사회의 시선에 따르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성기수술을 한 걸 보면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으로 구조화 된 젠더 정체성 사이에서 얼마나 갈등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그녀에게 계속 쏟아지는 외모에 대한 외부의 시선과 질문은 그녀를 짜증나게 한다. 커밍아웃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또한 이해가 안가기는 마찬가지다.



“커밍아웃이 무슨 친구들 불러다 놓고 차 마시면서 폭탄선언하는 거야? 아님 고백하라는 거야? 웃기잖아. 한국이 네덜란드보다 보수적인 것은 사실이야. 네덜란드에서는 커밍아웃할 때 한국처럼 심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난 커밍아웃해야겠다 해서 한 게 아니라 단지 더 이상 숨기지 않게 된 것 뿐이야. 예전에는 나의 정체성이 드러날까 봐 하지 않았던 말, 행위, 어떤 스타일 같은 것들을 거리낌 없이 하게 된 거지. 머 가족이나 가까웠던 친구들이랑 떨어져 있어서 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한국 성소수자 운동은 미국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애. 미국식은 ‘정체성의 정치학’이라고 할까 ‘나는 레즈비언이다. 게이다. 혹은 흑인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데 네덜란드는 그렇지 않아. 그게 그렇게 대단한 사실도 아니고, 그걸로 자신을 정체화하거나 선언하지는 않지. 좀 차이가 있는 거 같애. 네덜란드 같은 경우는 정책형성이나 로비가 운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여기처럼 개인에 기반을 둔 풀뿌리 운동이란 게 없는 상태라 그런 건 좀 필요한 거 같애.”



“커밍아웃? … 웃기지 않아?”


혜진은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나 시로 읊는다든가 춤을 추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통해 풀어내기를 좋아한다. 올해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 퍼포먼스를 시도했지만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했다. 혜진이 처한 상황이나 주어진 환경에 따라 그녀의 퍼포먼스는 다르게 구성된다. 수술 전 했던 퍼포먼스 제목은 ‘Mom, I killed your only son’이었다.



“‘엄마 난 엄마가 나한테 바라고 있던 그런 모습을 죽였어. 엄마의 바람을 죽였어.’ 내 안의 남성성을 죽이고 여성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였어.
난 대중 앞에서 옷을 벗는 공연도 좋아해. 옷을 벗는 건 일종의 선언 같은 거야. 소위 ‘여성적’인 외모는 아니지만 나도 그럴 권리가 있다고 나한테, 사람들한테 말하는 거지. 금발에 가슴 크고 마른 사람들만 노출하고 즐길 성적 권리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나의 약점을 드러내 보이는 거기도 하지. 사람들이 날 특이한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당신들처럼 보통 인간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기도 해. 나도 똑같이 잠자고 먹고 술 취하고 감정이 있는 인간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혜진은 끊임없이 사회의 편견과 함께 그녀 안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다. “사람과 1:1 관계에 머무르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건 아마 심리적으로 아무래도 입양아라 또다시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거” 같다고 한다. 여자가 되어 돌아온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한국에 오지만 친엄마를 적극적으로 찾아보진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여러 활동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바라는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혜진이 혜진일 수 있는 세상, ‘너는 왜 정상이 아니냐?’고 묻지 않는 그런 세상 말이다.



인터뷰 이묘랑 | 인권재단 사람 활동가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덧붙이는 말

1)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치하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인을 구호할 목적으로 영국의 옥스퍼드 시민들 중심으로 모금활동을 벌여 생필품을 전달한 것이 모체가 된 국제구호단체로 ‘Oxfordcommittee for famine relief’의 줄임말. 95년 11개 회원국을 연계하는 옥스팜인터내셔널을 창설, 전 세계에 70개 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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