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좌담>우리 사회 진보의 길을 묻는다

일시 : 2007년 11월 21일(수) 오후 2시부터 4시경까지 / 장소 : 인권연구소 ‘창’
참석 :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원,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상임연구원, 사회 박래군 <사람> 편집인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장석준, 류은숙, 박래군.


장석준 씨는 민주노동당 부설기관인 진보정치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고, 『혁명을 꿈꾼 시대』란 제목의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류은숙 씨는 인권운동사랑방에 몸담았던 시절 어린이.청소년의 권리, 인권교육 활동을 했고, 지금은 인권연구소 ‘창’의 상임연구원으로 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우리사회의 진보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다. 이번 좌담에서는 우리사회 진보운동의 현재와 그 위기에 대한 진단, 그리고 그 위기를 넘기 위해 필요한 방안에 대해서 두 연구원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박래군(이하 박) 올해 상반기에 최장집, 조희연, 손호철 같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진보 논쟁이 전개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논쟁은 정치적인 측면에만 집중이 되었고,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논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좌담은 의미가 클 것으로 보인다. 우리사회에 진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빠진 것은 무엇이고 진보를 재구성한다고 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해봤으면 한다. 각자 내가 생각하는 진보 이런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봤으면 좋겠다.


장석준(이하 장) 진보라는 말 자체가 한국사회에서는 대체용어라고 본다. 애초에 그 말을 쓰게 된 것은 좌파라는 말은 쓰기가 힘드니까, 보수세력에 대립되는 말로 진보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다. 진보라는 것이 지금보다 나아진 것, 새로운 것이라면 이것은 자본주의의 가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도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가고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것과 그런 것과 잘 구분이 안 되면서 유행 따라 변하는 것과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것과 오버랩 되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는 것인데 말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진보라는 말보다는 좌파라는 말이 나은 것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다.


류은숙(이하 류) 진보의 어원이 뿌리를 캔다는 것에 있고 근본적인 것을 고민하는 사람이 진보주의자라고 한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이 사회의 근본을 캐는 사람들로 비춰지지 않고 그냥 잘난 척한다, 분석하려 한다,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이렇게 느껴지면서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진보 아닌가. 인권과 정치는 뗄 수 없는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진보논쟁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사실 딴 세상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상반기에 인권활동가 50인 인터뷰를 진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중에 인권운동의 한 원로 선생님이 래디컬하다는 것, 진보라는 것은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 가장 구체적이고 현장에 있어야지 진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진보는 구체적 현장이 아닌 밖에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래서 진보가 흔들리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그 의견에 동감한다.



진보가 아닌 좌파, 래디컬은 현장에 있어야


진보의 위기는 굉장히 많이 이야기되었다. 진보의 가치, 진보운동의 위기에 대한 진단이 있지만 거기에 대한 합의된 대안은 여전히 못 찾고 있는 것 아닌가.


워낙 여러 층위의 문제가 얽혀있는 문제다. 진보세력, 제 표현대로라면 좌파세력은 토착화에 실패했거나 토착화가 지연되고 있는 것이 위기의 한 측면이 아닌가 한다. 어떠한 사상이든 토양 속에 뿌리내려 정착을 해야 하고, 그 과정은 교과서를 통해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들의 가치 속에 녹아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맨 날 외국이야기나 하고 백 년 전 이야기나 하고, 이런 비판이 이런 측면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사회주의 운동이 지식인들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나서는 87년 이후 잘 나가는 민주노조, 지금에 와서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라고 부르는 87년 이후 운동을 이끌어가는 핵심이 민중에게 접근하고 녹아들어가는 과정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이었지 않았나 싶다. 노동운동, 민주노조 운동이 상대적으로 고립되고 정체된 이유다. 또 다른 측면은 결국 신자유주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물리적 탄압만이 아니라 고도의 이데올로기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전 세계적 시간과 한국의 시간이 엇나가고 있다고 보는데, 특히 라틴아메리카 같은 경우 가장 먼저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경험하고 전 세계적으로는 반격에 나서고 있는데, 우리 같은 경우 IMF이후 이제 10년 밖에 안 된 상황이다. 여전히 한국의 대중들은 신자유주의로부터 받는 고통을 신자유주의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것이 이명박에 대한 지지로 나타난다고 본다. 이 두 가지 측면을 같이 봐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제일 무서운 것이 “너희들이 기어봤자 대안은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살아남아봐라.”라고 하는 것이다. 해보자가 아니라 대안은 없다는 게 가장 무서운 게 아닌가. 토착화를 말씀하셨는데 인권운동도 마찬가지로 토착화에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 인권운동이 신종 이론을 많이 수입을 했는데 일단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한 권리가 있다고 하면 굉장히 흥미롭게 받아들이고 첫 반응은 좋았다. 당연히 생각했던 것이 인권의 이름으로 이야기가 되는구나, 새롭네, 신기하네, 그 이상으로 우리 사회에서 뭔가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내고 어떤 연대를 발휘하고 이런 게 있어야 하는데 거기까지 나가지 못하고 밑천이 딸리는 상태다. 인권에서 가장 중요한 밑천은 인간을 바라보는 어떤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인간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식으로 똑같이 바라본다는 것이다. 하염없이 고립되고, 사회와 상관없고, 경쟁만이 유일한 인간형으로 사람들이 학습하고 찬양하고 있는데 인권 또한 수많은 권리들을 이야기하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 위에 권리 토대를 쌓아보았자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밑 작업, 인간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정말 근본적인 것을 서로 물어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비단 인권운동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 사회운동에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오늘이 IMF 10년이라 기자회견을 했는데 기자들이 많이 왔다. 그러나 다른 기자회견에서는 기자들을 찾아보기 힘들 때도 많다. 재미없는 운동, 언론만 바라보는 운동이 많다. 운동의 토착화 실패만이 아니라, 운동의 지향점 내지는 운동의 담론, 진보의 담론이 생산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가?


운동이란 것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서로에게 묻는 것이고,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 그런 삶을 위해서 중요한 제도를 뜯어고치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세미나 하고 그 결과로 노선으로 정하고 그러니까 제도에 무게를 두고 뜯어고치는데 중심을 두었고 그러다보니 운동이 대안을 보여주는 데는 무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 사례를 보면 울산에서 노동자들이 밀집해서 나름대로 주거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파업투쟁으로 임금이 오를수록 더 나은 아파트로 이주하면서 그 공동체가 와해되어 버린 사례가 최근에 지역 연구결과 속에 나온다. 한편에서는 운동이 잘 나간다고 이야기했지만 파업투쟁이든 노조 활동이든 그 속에서 결국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부족했고 실천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다. 최근에 고민하는 것은 연대라는 개념이다. 자유, 평등, 연대 할 때의 연대. 추상적인 철학가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를 운동 속에서 구현해나갈 것인가. 이것이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연대를 키워드로 위기 넘기


연대에 대해서는 사실 인권연구소에서도 중요하게 보고 나름대로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연대를 주제로 100명을 인터뷰했고, 이론적인 논의들도 했다. 제 동료가 인터뷰를 했는데, 즐겁게 하는 운동하는 사람은 연대에 희망을 갖고, 즐겁지 못한 사람은 연대에 희망이 없다고 한다. 제일 즐거운 사람은 지역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운동방식 자체가 연대이고 연대가 곧 운동이다. 연대를 가장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곳이 노동운동, 품앗이 투쟁, 내가 가 줬으니까 너 다음에 올 거지라고 하는, 연대라기보다는 단결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약자라고 하더라도 일반시민에게 동의를 구하기 쉬운 사회적 약자와 그렇지 않은 사회적 약자가 있다. 성소수자는 연대를 밝히려면 같이 돌 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반면 아동, 빈민 이런 것은 연대가 잘 된다. 왜냐하면 나에게 득이 되니까. 내가 좋은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진정한 연대란 같이 돌 맞을 각오를 하는 연대가 진정한 연대라 볼 수 있다.


위기 이야기 할 때마다 연대의 형식성은 언제나 지적되는 문제다. 실제 자기가 공대위에 결합했는지도 모르고, 단체 수가 적으면 안 되는 거 같고, 연합단위가 있어도 또 다른 뭔가가 만들어지고, 굉장히 형식적인 이름 걸어주기가 횡행한다.


연대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은 진보의 학습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다. 보수진영의 학습효과는 탁월하다. 저렇게 사니까 잘 먹고 잘 살더라. 자유주의에서는 학습효과가 탁월하다. 예전에는 적어도 숨기려고 했지만 지금은 노골적으로 그러한 인간상과 생활방식을 찬양한다. 광고 같은 경우 얼마나 노골화되었나. 마음에는 안 들지만 저렇게 사는 게 살아남는 방식이란 것을 보여주지만 반면에 진보는 학습효과를 주는 게 없다. 도대체 쟤네들 주장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 대충 하려다 정치권에 가려나 하는 의심도 받는다.


그 부분이 지역운동과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진보운동에서는 미시적인 생활 속에서 대안을 체험하고 신뢰를 갖게 하는 부분과 거시적이고 전국단위에서 제도를 바꾼다는 흐름이 서로 환류가 안 되고 있다. 좁은 의미의 공동체적 연대를 경험하고 거기에 대한 정서적 애착, 이성적 동의가 되면서 이것이 전국단위의 정치에서 진보적인 요구로 모아지고, 다시 자기 삶의 공간에 들어와서는 생활수준의 연대 속에서 정당함을 확인하고…이렇게 환류가 되어야 한다. 87년 이후 잘못된 것 중에 하나가 생활 속의 연대를 수준 낮은 것, 부차적인 것으로 봤다는 점이다. 이제는 제도적인 변혁과 생활 연대 운동을 같이 사고하고 서로 환류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실제 일을 해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말발이 먹히려면 생활이 있고 대중이 있어야지, 외국 모델과 제도만 갖고 이야기하면 형식적이거나 말이 안 먹히는데 생활세계에서 사람들이 있고 거기서 압박을 가하게 되면 재미있고 활기를 띠게 된다. 실제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환류인데 현실에서는 이원화되어 있다. 소위 전문가가 활동하고 생활세계에 있는 사람은 동원 대상이고….



환류가 되지 않는 게 문제


다른 층위의 운동들이 환류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동의한다. 그렇다면, 그 환류의 방법은 어떤 것이 있겠는가?


민중운동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노동, 농민, 이러한 운동이 갖고 있는 대중, 80만 조합원이라 말하는 그 사람들이 노동현장 뿐만 아니라 그곳을 벗어난 생활에서도 공동체를 더해나가도록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답이 있지 않지만 지금은 뭐라도 하고 시도를 해야 하고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어떻게 하면 환류를 할 것인가. 일을 조금하고 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 과잉의 사회란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사안도 과잉화 되어 있다. 지구를 우리가 지켜야 한다, 하는 일을 보면. (웃음) 지구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 하나를 깊이 파다보면 하나에서 다 보일 수 있다. 하나하나에 사회 전체가 담겨있는데 그런 하나를 깊게 오래 파보는 그런 풍토가 필요하다. 절제와 금욕은 운동에도 필요하다.


절제와 금욕이 민주노동당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표현된다. 5대 과제가 대의원대회 가면 10대 과제로 된다.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하면 선택과 집중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말한 접근법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 역량을 집중하면서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을 각 부문에서 잡아서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한다.


우리 사회의 진보의 기준에 대해서도 얘기해 봤으면 좋겠다.


내가 진보로서, 나의 조직은 이런 기준으로 살겠다는 자기 선이 명확하면 된다. 그걸 무너뜨리지 않고 타협을 안 하면 자연스럽게 경계가 설정된다. 내가 갖고 있는 원칙의 선명성과 거기에 대한 나의 열심이 드러날수록 헷갈리는 사람도 이쪽으로 흡수, 통합될 수도 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까 말했듯이 진보라고 하면 경계를 설정하기 참 어렵다. 미국 같은 경우 진보는 좌파만이 아니라 리버럴까지 다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란 말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다. 그걸 떠나서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진보를 생각하면, 결국 인간의 권리를 확장하려는 것이 진보의 첫 번째 기준이 아닌가. 개별적인 인간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체제의 구조와 충돌을 빚을 때가 있는데 그때 그 속에서 그 구조 내에서 타협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충돌이 되었을 때 인권을 위해서 체제의 변경을 요구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좌파와 그렇지 않은 진보, 일반적인 의미의 민주주의와 갈리는 것 아닌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먼저


인권운동진영에서 진보적 인권운동을 주장하는 그룹도 있지만,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그룹도 있고, 시민권 확보를 당면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그룹도 있다. 진보적인 그룹들에게 반자본주의라는 구호는 있지만, 우리가 만들어갈 세계에 대한 내용은 없다. 진보의 담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어려운 부분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담론이란 말에 우리가 스스로 속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애초에 담론투쟁을 제기했던 사람의 문제의식은 담론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모든 행동이라든지 집단, 제도, 구조 등등이 하나로 모이는 꼭짓점 역할을 담론이 하는 거다, 그런 것을 담론으로 모아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담론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담론이 없다, 이럴 때는 우리 스스로 일종의 관념에 빠지는 거 아닌가. 담론과 행위가 같이 가야 한다. 안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만 이명박이라고 할 때는 한반도 운하 이런 담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영자, 서울시장 이런 행위와 결합되어서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여기서 행위란 것은 일상적인 것의 반복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 어떤 집단들이 손을 잡는다던지 타자였던 이들과 같이 한다던지 이런 행위를 통해 상징화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유포할 때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운동진영에서) 이런 행위가 너무나 의례화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100만 민중대회였다고 본다. 과거에는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는데 지금은 의식에 불과하다. 대중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을 반복만 할 것이 아니라 이 틀을 떠난 행위, 상징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 운동이 행위를 만들었던 유일한 집단으로 긍정할 수 있다.


장애인운동에서도 제도가 만들어진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있다. 제도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도 중요하다.


제도화 되는 순간 인권운동은 재빨리 도망쳐야 한다. 제도화 되는 순간 거기 앉아있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는 운동했던 당사자, 참여했던 전문가 그런 사람이 직접 참여하는 구조였는데, 그 사람들이 결합하는 것은 부정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도망가는 것이 맞는데 단순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를 파견해야 한다. 역량을 훈련시켜서 대중이 직접 참여하게 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난 몇 차례 동안 그런 것을 못했다. 대중을 끌어들여서 그 공간에 참여하면서 훈련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준비나 체계, 상상력이 취약했던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한 대안은 어떤 게 있는가?



재빨리 도망치고, 게릴라를 파견하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는 어렵고 한계를 느끼는 부분이지만 아무리 체계가 치밀하게 짜여있어도 대중의 욕망과 체계는 항상 엇나가게 된다고 본다. 인터넷이나 대중문화에서도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변화되어야 한다. 같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같은 언어를 써야 하고. 그런데 그걸 못하고 있다.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자. 민주노동당이 대중정당이기 때문에 계속 경험하면서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문제다.


무엇보다도 실질적으로 필요한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자발적인 소모임이 있었다면 이제는 개별화라는 변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얼마나 개별화되었나. 개별주의를 집단의식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본다. 개별주의, 개인화를 분명한 변화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일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변화된 환경에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 내용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나도 거기에 공감한다. 개별화는 분명히 진보의 척도이고 사회가 성숙되는 출발점이다. 인권도 권리의 출발점은 어쨌든 자유 아닌가. 나의 자유, 나의 권리를 위해 타인의 자유, 나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고, 타자의 권리에 대한 인정이 가장 추상적인 의미에서 연대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화를 인정하는 속에서 자신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세대들의 강렬한 요구들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서로 소통하고, 남의 자유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유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인 행위 담론 등을 통해 설득하는 것이 진보운동이 접근해야 할 방식이 아닌가. 사실 기존의 우리 운동이 쓴 이야기를 잘 못한다. 가령 대공장 노동자에게 (비정규직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자기 권리의 유보도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했는데 못했다.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욕망의 제어도 필요하다. 개별화에 대한 전적인 인정과 자신의 자유의 제어나 유보도 필요하다는 쓴 소리도 같이 가야 하지 않을까.


지난번에 사회운동 포럼 평가를 하면서 나온 얘기가 여성주의, 인권,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인정하고 만나기는 만나는데 적극적으로 동의해서 내 운동을 그것으로 성찰하고 재구성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치와 가치, 운동과 운동이 만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형식적으로 만난다. 한 예로 경찰에게 맞았을 경우에만 인권운동을 찾는다. 다른 운동을 기획할 때 인권운동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이혼직전의 부부 또는 만년 권태기에 빠진 사이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야기 해봐야 상대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것을 전제하면서 겉도는 대화를 하는 것, 충돌 이후에 뭔가 바뀔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대화인데…, 결국 우리 안에서 싸워야 한다. 서로 확인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헤어질 수도 있고 다시 만날 수도 있는 싸움, 우리 안의 가치를 그렇게 충돌시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부분에서 용기를 새롭게 내야 할 시점이 아닌가. 또한 정직해지고….



“우리 안에서 싸워야 한다.”


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갈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욕먹는 것의 두려움 때문인지 운동사회에서는 말을 많이 아낀다. 진정성 있는 대화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 진정한 대화를 기피하다 보니 서로를 정체시키는 것까지 나아간 것 같다. 그런데는 운동 상층의 책임이 크다. 상층이 투명하지 못하니까 밑에서도 건강하게 변화하는 것을 막는다. 굴절 없이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밑에서도 파악하고 건강한 흐름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게 안 되고 있다.


대화에서의 어법의 문제도 심각하다. 꼭 남성적 말하기라고 명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사회에서 말하는 것이 고정되어 있다. 다른 방식의 말하기가 필요하다. 지금의 방식으로는 그냥 침묵하고 싶다. 소통이란 것이 어떤 단체가 소집을 해서 둘러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을 탈피할 수 있는 대화법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해보고 있다. 생태운동에서 인문학적 교양이 필요한데, 분야를 불문하고 누구나 올 수 있는, 지금 운동현안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모임, 이런 식의….


오늘 좌담을 정리해야겠다.


연초에 진보 논쟁이 있었는데 고위급 학자들 중심으로 된데다가 대통령까지 나섰는데, 필요 없는 논쟁은 아니었지만 정작 진보운동의 환골탈태를 위해 필요한 구체성, 일상적 이야기는 전혀 못되었다. 오늘 이야기된 것과 같은 이런 이야기가 이제라도 진보운동에서 중심적인 화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떤 분들은 너무 미시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비판할 수 있지만 오히려 거시적인 운동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이 필요하다.


나는 진보적 인권운동을 고민하면서 그 단어 하나하나가 다 고민이다. 진보, 인권, 운동.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말들이 개념 규정 없이 그냥 쓴다. 보수주의자들에게 점령당한 언어에 대해 개념 규정을 하는 작업 자체가 진보의 밑바닥을 만드는 공사라고 생각한다. 기초공사가 너무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통역자가 너무 필요하다. 통역자가 없어도 되려면 우리 언어를 단순화 하고 같이 공부하고 그 개념에 대해서 까발려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내년에는 아주 조금 쓰고 쉽게 제대로 쓰고, 각 분야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인권의 기본 개념, 이런 거 정리하기를 하려고 한다. 운동을 내가 맨 처음 시작했다면 했어야 할 일로 돌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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