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혁신 없이 진보는 없다

동맥경화에 걸린 진보운동의 현주소




2007년 진보의 얼굴



올 상반기 <레디앙>에서 촉발된 ‘진보논쟁’에서는, 중간에 대통령이 끼어들어 이상한 모양새가 되기는 했지만, 정치적 지형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 되어 제법 풍부하게 다뤄졌다. 월간 <사람>은 시선을 좀 돌려 진보적 운동사회 내의 진보, 그러니까 우리 안의 진보에 대해서 살피고자 한다. 운동사회의 자기 성찰의 계기로 삼자는 의미에서 범민련 사건을 반추해 보았고,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좌담에서는 두 진보적인 연구소의 연구원들 생각을 들었다.



혁신 없이 진보는 없다
진보적이지 않은 ‘진보’가 문제
투쟁의 주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좌담> 우리 사회 진보의 길을 묻는다





제18대 대통령선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는 12월 19일 대선에서 누군가 새 대통령에 선출되어 당선자로 인사하게 될 것이다. 이번 대선은 어느 해보다도 정책이나 인물 대결 같은 것이 없는 채 이미 굳어진 형세를 따라가는 꼴이 되었다. 치열하게 붙기에는 너무도 일찍 선거 결과가 보이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특히나 진보진영의 입장에서는 이번 대선 만큼 흥이 나지 않는 선거가 없다. 민주노동당의 후보가 바람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중도적인 후보들이 있어서 비판적 지지를 하자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만큼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반영해 줄 수 있는 후보가 없다는 말이다. 그만큼 사회는 보수화되었고, 진보진영이 국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 안병주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들 수 있다. 진보가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보라고 해야 하나에 대한 의문이 그것이다. 혹자는 민주노동당조차도 진보의 반열에서 제외하려고 한다. 민주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때 진보는 좌파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주의 개혁세력까지를 포괄하여 대통합신당이나 문국현 후보까지 진보로 본다. 이때 진보는 넓은 의미의 진보를 의미한다.


이런 한국사회의 정치적 지형에 대해서 손호철 교수는 ‘진보’, ‘개혁적 보수’(자유주의세력), ‘냉전적 보수’(수구)로 구분하고 있다. 나아가 손 교수는 “1997년 이후 우리 사회에는 민주개혁을 둘러싼 ‘민주전선’(진보+개혁적 보수 대 냉전적 보수)과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신자유주의 전선(진보 대 개혁적 보수+냉전적 보수)의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지금의 정치지형이 복잡한 것은 이 두 개의 전선이 현실에서 교차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 교수의 설명처럼 지금 무슨 전선이 제대로 형성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보가 뚜렷하게 자기를 정립하고, 개혁적 보수가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여야 하는데, 현재 정치지형에서는 냉전적 보수세력만이 자기 분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정치적 힘으로 느껴지지 않는 전선이 어정쩡하게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이런 정치적 지형에 대한 논의는 이번 특집의 주제가 아니다. 그런 지형들에 대해서는 이미 올 상반기에 이루어진 ‘진보논쟁’에서 충분하게 다루어졌다. 여기서는 정치세력들 간의 진보-보수 논쟁이 아니라 진보적 운동사회 내의 진보, 그러니까 우리 안의 진보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그런 이유로 운동사회의 자기 성찰의 계기로 삼자는 의미에서 범민련 사건을 반추해 보았고,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고, 좌담에서는 두 진보적인 연구소의 연구원들 생각을 들었다.



진보적인 사회운동은?


사회운동 그룹들을 진보와 보수로 나눈다면? 이전에는 간단했다. 자생적인 보수단체들이라는 것이 손에 꼽힐 정도였기 때문에 사회운동 그룹에는 진보적인 운동들만을 얘기해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노무현 정권 참여정부 시기에 세를 확장하기 시작한 보수단체들이 이미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움직이고 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은 일찌감치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이유로 시민단체들이라고 하면 북한인권운동을 한다는 그룹까지 포함하여 말하게끔 되었다. 노무현 정권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상황이다. 예전에는 보수단체들은 관변단체들 외에는 찾아볼 수 없던 상황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끔 되었다. 그래서 사회운동 그룹도 진보, 개혁적 보수, 냉전적 보수의 3분 구도를 맞은 지 오래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은 어디를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운동에서 주도권은 진보진영이 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보수단체들의 움직임은 대중들을 직접적으로 조직하여 자발적으로 움직인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들은 정치세력과 연결되어 움직이거나 보수교회의 지원 속에서 움직이는 게 대부분이다. 다만 뉴라이트 계열 중 일부는 매우 활발하게 대학사회를 잠식해 들어가서 세를 확장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참으로 우려스럽다. 취직도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직장을 보장해주겠다는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대학사회를 평정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은 진보진영이 개척해왔고, 역사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아직은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이란 말 속에는 진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보수단체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서 활발한 활동력을 보이게 되는 상황이 오면 지금과 같은 인식이 지속되리라고 볼 수 없다. 언어의 주도권마저 빼앗기는 상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쯤에서 논의를 좁혀보자. 우리의 관심은 보수단체들까지 아우르는 것은 아니고, 진보적인 운동에 한정해서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사회운동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이고, 어디까지를 포괄하는 것일까?


진보의 사전적 정의는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 정도가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쓰이는 진보의 개념인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도 자신이 진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고, 심지어 보수세력들은 노무현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사전에서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진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진보운동이라고 할 때는 이 뜻이 더 맞다. 그런데도 여전히 의문이 있다.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도 자신들이 보수이고, 수구라고 자처하지 않는다. 사회의 진보를 위해 노력한다고 강변하는 보수주의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특집의 좌담에서 장석준 연구원처럼 진보라는 말이 모호함이 있으므로 ‘좌파’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위키사전에는 “진보주의 또는 혁신주의는 정치·경제·사회 체제의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사상”이라고 설명하면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처럼 교회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기독교 사상도 진보주의라고 부른다”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놓고 있다. 나아가 “보수주의에서도 온건한 개혁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진보에서만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고까지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개혁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진보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보다 분명하게 진보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정책이나 지향을 짚어보아야 한다. 정당들의 정책이 신자유주의를 긍정한 위에서 일부 민주적인 개혁을 한다고 해서 진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보아야 오늘날의 한국사회 현실에서는 보다 분명해질 것 같다. 그렇다고 하면, 진보적인 정당들은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정도다. 대통합신당이나 창조한국당은 신자유주의를 긍정하는 위에서 냉전적 보수와는 결이 다른 정책들을 지향한다. 남북관계에서 이런 구분은 보다 뚜렷해진다.


사회운동으로 넘어와서 생각하면, 진보진영은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는 단체로부터 한국진보연대로 모인 민중진영단체들, 그리고 시민운동의 일부 단체들이 이런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시민단체들의 경우에는 진보에서 (자유주의)개혁세력으로 많이 기울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시민단체들을 자신들이 정책적 파트너로 활용해왔고, 거버넌스에 동참하고 있는 단체들의 경우에는 경계선을 위험하게 넘나들고 있다.



위기는 내부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진보운동진영의 상황은 어떨까? 진보운동진영에서는 오래 전부터 진보운동의 위기를 말해왔다. 진보운동의 위기는 대강 대중들에게 제시할 진보적인 담론이 없으며,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의제를 설정한 능력을 상실했다는 정도의 비판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다. 또 진보운동은 일부에서는 도적적인 위기마저 맞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진보적인 담론이 없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의 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대중들을 이끌어갈 방향을 주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이유로 대중들은 진보운동진영은 늘 반대만을 일삼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대중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조직된 대중들을 동원하는 것이지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을 주장에 동조하도록 설득하지도 못한다. 진보운동의 큰 자산이었던 도덕적인 면에서는 민주노총과 같은 경우에는 채용비리에 노동조합 간부들이 간여하여 구속까지 되었던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에서는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정권에 대거 참여하게 됨으로써 시민운동이 정계나 관계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되고, 그러므로 정권의 2중대란 소리가 나오게 된다는 점이 지적된다. 거기에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 보인 개혁의 무능력함으로 인해서 진보운동진영이 싸잡혀서 욕을 먹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외형적이고 일반적인 지적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를 진보운동진영은 갖고 있다.
첫째, 주체의 문제다. 노동운동의 주체는 노동자인데, 현재까지 민주노총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장악하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은 전노협 시절부터 오늘의 노동운동을 주도해온 세력이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에서는 노동자계급 내에서 상층을 형성하면서 비정규직과는 다른 위계를 갖기에 이르렀다. 자본과 권력이 분할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도를 수용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조직 내에 들이기를 거부하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이전에 민주화운동의 중심세력이었던 청년학생들은 대학사회에서 뉴라이트 계열에 밀리고 있고, 청년실업 문제가 극심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청년학생들을 조직할 능력을 보이지 못한다. 이런 연유로 노동자나 학생들이 진보운동으로 새롭게 충원되지 못하는 상황은 진보운동의 지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 시민운동도 최근에는 활동가들이 충원되지 않는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다.


둘째, 진보운동의 담론 수준의 문제다.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대중들은 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인터넷 포털이나 텔레비전 등의 매체를 통해 세뇌를 받고 있다.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뉴스들을 접하고 살고 있는데, 이런 대중들을 상대로 하기에는 진보운동진영의 담론은 솔직히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일방적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한다든지 너무 어려운 말로 자신만의 웅변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구체적인 문제의 폭로나 대안의 제시가 없고, 추상적인 비전만을 제시하다 보니까 남의 말은 듣지 않는 고집스런 집단으로 진보운동진영의 인상이 고정되어 있다. 체계적인 교육이나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한 진보진영은 대중들로부터의 고립을 면할 수 없다.


셋째, 진보운동 내의 권위주의 문제다. 진보운동진영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위계화된 모습들을 마주치게 된다. 연령, 경험, 성별의 차이, 그리고 큰 조직과 작은 조직, 심지어는 인맥까지 동원되어 위계가 서게 된다. 사회에서도 가부장제가 많이 해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단체들의 내부에서는 여전히 가부장제가 위력을 발휘하여 여성의 경우는 주요 간부직에 올라가기도 힘들다. 회의에서는 큰 대중조직의 입장에 따라 정책이나 투쟁의 방향이 설정되게 되므로 작은 조직들은 들러리를 서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연대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문제들은 단체 내부에서, 그리고 단체들 간에 자유로운 소통을 가로 막는다. 자유로운 소통과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서로 간에 불신만 깊어지는 상황이다.


넷째, 진보운동 내의 차별의식의 문제다. 진보적인 운동단체들에서 성소수자나 장애인, 학력 등으로 차별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대한다. 진보운동단체 간부들부터 인권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가령 민족주의적인 단체들의 경우에서는 성소수자 문제는 골치 아픈 문제로 치부된다. 심지어는 특집의 다른 꼭지에서도 얘기한 사례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까지 발견되기까지 한다. 진보운동단체 내부에서 차별의식은 정파 간에도 발생한다. 정파는 같은 정파끼리 움직인다. 대의는 내동댕이치고 자신의 정파가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인물이나 정책은 뒷전에 밀린다.



혁신 없이 진보는 없다


운동의 혁신은 진보운동 내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진보운동은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계속 지적되어 왔음에도 나아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진보운동을 주도하는 그룹들일수록 이런 문제들에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직의 동맥경화 현상이라는 말까지 나온 게 오래되었다.


진보의 반대말은 퇴보만이 아니다. 답보 또한 진보의 반대말이다. 어제의 진보가 오늘의 진보일 수 없고, 내일의 진보로 남으리란 보장도 없다. 사회변혁이란 지향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은 것, 그리고 그에 맞게끔 시대정신을 체화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대선에서 진보진영이 죽을 쑤는 지금의 상황은 혁신 없는 진보의 초라한 성적표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진보운동은 어느 때보다도 겸허하게 지신을 돌아보고, 대중을 가르치지 말고, 배우도록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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