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내목소리] “욕망에서 시작된 성적 시민권 투쟁”

차별금지법과 성전환자성별변경법 투쟁을 함께 하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잠을 잘 수도, 글을 쓸 수도, 무슨 생각이든 이어갈 수도 없었다.
차별금지법 관련해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아달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니 가능하면 가장 최근 소식을 담기 위해 글쓰기를 미루고 있다가 마감날짜인 오늘(11월 20일) 그럭저럭 원고가 써지려니 하고 앉자마자 노회찬 의원실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법제사법위원회 1소위원회를 무난히 통과하리라 예상되었던 성전환자 성별변경 법안이 한나라당 김명주 의원의 반대와 법무부의 동조로 내일 법사위 전체회의 상정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구태여 성기성형수술을 해야 성별변경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결국 공청회를 열기로 하면서 내년 2월 임시국회로 넘어갔단다. ‘삼성특검법안’ 건으로 인한 법제사법위원회의 정당 간 갈등에 소수자들이 또 다시 희생된 측면도 있다.


울화통이 난다기보다 절망스럽다. 저런 놈들에게 성전환자들의 일상과 인생 계획과 희망과 사랑과 성적 쾌감을 저당 잡혀야 한다니… 도대체 저들은 성전환자들을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진 | 성소수자차별저지긴급행동


몇 몇 성전환자들에게 법안 소식을 전하고 성전환자들 인터넷 카페에 간단하게 보고 글을 올려놓고는 다시 카페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의 절망이 눈에 선히 보인다. 내일 아침 9시에 있을 차별금지법 관련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이 원고를 써야 하는데,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잠을 자보려다가 두통만 심해져, 두통이라도 털기 위해 글을 써보기로 작정하고 다시 앉았다. 울화통이든 절망이든 쏟아내야 살겠다.



한국 사회에서 ‘시민’이 되지 못한 사람들


‘성적 시민권’이라는 용어가 요즘 성소수자 진영에서 회자되고 있다. 성정체성의 각별함(다름)에 근거한 시민으로서의 권리, 그 정도 의미의 용어이다. 한국 사회의 동성애자나 성전환자들에게 성적 시민권은 전무하다. 그들은 불법적인 존재는 아니나 드러나지 말아야할 법외의 존재들이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근거로 한 시민권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단다. 법무부 차별금지법안에서의 ‘성적 지향’ 항목 삭제는 차별을 감수하고 살라며 동성애자들을 확인사살 했다. ‘성기성형수술’을 반드시 하라는 김명주 한나라당 의원과 법무부의 공조는 “성기만이 성별이다.”라는 유치하고 야만적인 선언이다. 쟤네들의 성기와 호적상 성별을 국회와 정부종합청사 정문에서 일일이 비교하며 체크할 일이다.


성소수자들은 상대적으로 비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성정체성에 대해 국가와 법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요즈음의 차별금지법안과 성전환자 성별변경법안에서 확인되듯이 국가와 법은 그들을 법테두리 바깥으로 계속 밀어내고 있다. 정신적, 육체적 실존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당장 나눠먹을 게 뭐가 있다고 정치에 관심이 있겠는가? 정치권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는 정당에 소속되어 성소수자운동을 하고 있지만 내 외침은 늘상 스스로에게도 발악처럼 느껴진다. 정치권에서든 사회에서든 때로는 진보진영이라는 곳에서조차….


사실은 성소수자들 속에서 조차 때때로 발악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아니면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리는 헛손질이랄까? 같은 소수자 운동의 한 부문인 장애운동 진영에 갈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지만 몸 자체로 실존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과 달리 성소수자들은 차별을 감수한 채 감추려고만 한다면 적당히 숨어 사는 것이 차라리 편한 사람들이다. 실존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 성소수자들은 가장 먼저 존재 자체에 대한 세상의 혐오에 맞닥뜨려야 한다. 하여 인권과 시민권의 가장 끝에 아니 아예 법과 권리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면서도 싸우지 않은 채 세상의 곳곳에 숨어사는 것이 절대 다수 성소수자들의 생존과 생활 방식이고 혹은 전략이다. 이를 탓할 수만도 없다. 자신을 드러낼 때 당할 혐오와 배제와 폭력의 일상들을 아무도 책임져 줄 수 없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국가가 최소한 불법화는 하지 않은, 그러나 합법의 영역에 (거의) 포함되지 않은, 그래서 존재나 조건 자체로 차별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국가의 기본적이고 상징적인 선언에 해당하는 법률이다. 그런데 이 선언적인 법에서 성전환자들에 대한 항목(성별 정체성)은 애초에 법 제작자들의 상상력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항목(성적 지향)은 넣어졌다가 삭제되었다, 법리적 논쟁이 아닌 혐오와 낙인의 난무에 밀려….



‘진부한 진보’보다 더 혁명적인 싸움에 나서야 할 때


이번 ‘성소수자 차별저지 긴급행동(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차별 저지를 위한 긴급공동행동)’의 “다방면/자발적/보글보글” 투쟁(활동가들만이 아닌 100여명의 성소수자들이 두 차례의 ‘벙개’에 모여 대응을 논의했고, “헤쳐 모여~!”진 12개의 팀이 알아서 돌아가면서 상상력에 기초한 기발한 활동들을 생산 유통 확산해내고 있다.)은 국가와 법의 맨 가장자리에서 마저 밀린 성소수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반격의 투쟁이다. 불법이 아닌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대해, 이제는 성적 시민권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하겠다는 투쟁이다. 몇몇의 활동가들만이 아닌 성소수자 대중(아~ 재미없는 단어ㅠ.ㅠ.)들의 투쟁으로 시작되고 이어지고 있다는 면에서, 이번 투쟁은 충분히 역사적이다. 그리고 ‘성적 지향’의 항목에만 매몰된 정체성 운동의 한계를 넘어, “삭제된 7개 항목”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 의제를 사회에 촉발해내고, 나아가 “삭제되지 않은 13개 항목”의 계층과 “20개 항목 바깥의 구태여 차별금지를 하지 않아도 차별당하지 않는” 계층의 연대까지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면에서 이번 성소수자들의 투쟁은 충분히 진보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이다.


국민이기를 거부하고 시민으로 서고자 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는 그 개인에서부터 시작된다. 성정체성에 근거해 국민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성소수자들이 이제 ‘성적 시민’으로 나서고 있다. 이기든 지든 법제도 투쟁의 한계가 여전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인정’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가부장적 이성애주의 사회에 명백한 균열을 만드는 싸움이라는 면에서 ‘진부한 진보’보다 훨씬 혁명적이다.


최선을 다하면서도 짧은 성과나 실패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넓은 대오도 만들어야 하지만 새롭고 탄탄한 주체들도 세워내야 한다.


정당한 성적 욕망에서 시작된 변혁은, 원초적이어서 더 근본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