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미디어세탁소] 기자들의 수능점수가 궁금하다

수능을 둘러싼 언론의 무규칙 플레이

또 다시 삼성이 도마 위에 오를락 말락 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발언이 폭탄처럼 떨어졌으나, ‘삼성장학생’으로 관리 받는 기자들에게는 그저 골칫거리인가 보다.


뚝 떨어진 기온만큼이나 대선정국은 12월 19일 한 표를 행사할 이들에게 인기가 없다. 그나마 유권자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어처구니없는 법안들로 인해 참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고 있다. 정책과 공약 중심의 선거는 또 다시 물 건너가고, 지난하게 후보자들에 대한 비리와 행보만이 매체에 소개될 뿐이다.


어디 이뿐인가. 정권 말기 대선국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문제와 허점투성이의 법안과 정책들을 쏟아내고, 이를 두고 정치적 타협을 위해 여당 야당의 국회의원들은 회의장을 들락날락 한다. 이에 대한 매체의 반응은 감시와 비판의 기능은 상실한 채 이해관계에 따른 관심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진 | cafe.naver.com/youthalltogether


이상한 나라의 한심하고, 기력 없는 연말이 또 찾아왔다. 주위를 둘러봐도 문제투성이며 허점 가득한 일들이 넘쳐난다. 이런 장면을 담고 있는 미디어는 본질이 빠진 채 오두방정만 떨고 있는 것 같아 이조차 불편하고 또 불쾌하다. 그래서 결론은 이러하다. 유권자와 정책이 빠져버린 대선과 삼성의 정.언 유착의 문제 등 굵직한 사회적 문제가 머릿속에서 맴돌지만, 지난 11월 15일 수능 날 또 다시 목숨을 끊어버린 수험생과 수능이 끝난 이후 매체에서 보여준 청소년들의 고통을 함께 나눠보고자 말이다.



D-day, 언론의 풍경


D-day. 학교 앞에 몰려든 후배들의 왁자지껄하며 기상천외한 응원, 학부모들의 간절한 기도와 수험생들의 오만가지 표정은 빠질 수 없다. 연예인들이 수능 시험장으로 향하는 길에 카메라는 동행한다. 어떤 이는 경찰은 물론 퀵서비스 오토바이에 몸을 실어 간신히 시험장에 도착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서 수능 시험을 보기도 한다. 갖가지 사건 사고는 수능 당일 신문과 방송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 뉴스 아이템이 된다. 때로는 경직되고, 진지할 수밖에 없는 국가적 행사를 조금은 부드럽게 다루려는 심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는 참으로 식상하다. 허나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니다. 왔다 갔다 하는 듯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 수많은 매체들 가운데 한 곳이라도 틀을 깨는 곳이 없단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카메라가 같은 곳을 응시하며 수험생들의 상처를, 그리고 고통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관대할 수 있을까.



오늘 수능…“시험 잘 보세요” 응원열기 ‘후끈’()
원더걸스 선예, 수능 잘보고 나오겠습니다(<연합뉴스>)
수능보는 연예인은 누구지? ‥ “선예와 예은이도 수능 봐요”(<한국경제>)
수능시험장 엄마의 기도, 2008 수능 5분전, 초조한 모습의 수험생들(<뉴시스>)
한 문제라도 더… 애타는 모정! ()
이색 수능 응원, ‘재수없다, 엿드세요?’(<조선일보>)
‘한국의 오토다케’ 이구원군의 ‘수능 무한도전’ 화제(<경향신문>)




D-day. 수능장 안팎으로 기자들과 카메라가 넘쳐난다. ‘열띤 취재 경쟁’이라 하지만 학교 앞 중계차는 물론 번쩍거리는 카메라 플래시, 그리고 시험장 안까지 찾아오는 ENG 카메라는 얼마 전부터 수험생 권리 침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기자들은 2004년부터 수능시험 때 합의한 취재준칙을 어겨왔던 것이 사실이다. 올해의 경우 한국사진기자협회는 △교실 안에서 사진촬영 불가 △스트로보(플래시) 사용금지 △기자가 너무 많이 몰렸을 때 1~2명으로 풀 구성 △교문 밖에서는 자율취재 등의 지침을 별도로 내리기도 하였다. 허나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예년에 비해 기자들이 ‘차분’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기는 하지만, 여전히도 수능 이벤트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언론사들의 과잉 취재는 문제가 되기 마련이다. 특히 교육부총리 등이 시험장이라도 들어가는 순간에는 취재진이 함께 몰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교원단체에서 교육부총리가 고사장에 직접 들어가 취재진의 카메라 세례를 받는 것이 부적절한 처신이라 비판하지만 이와 같은 관행은 변하지 않고 있다. 굳이 당일 시험장까지 찾아들어가 격려를 하는 교육부총리의 몹쓸 ‘언론플레이’에 낚이는 기자들이 한심하다. 지적하지 않아도 기자들도 알고 있다. 심지어 지난 수능이 있던 즈음 “인륜지대사 수능시험 방해하는 ‘수능 꼴불견’ 언론들”(<노컷뉴스>, 변상욱의 기자수첩)이라는 칼럼을 통해 기자는 수능을 보도하는 기자들의 태도를 꼬집었다. “새롭게 실시되는 등급제를 비롯해서 수능 제도 전반과 입시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분석 보도가 그동안 전혀 없이 정치 소식, 비리나 스캔들 보도에만 치중하다가 수능 당일에 이르러서야 관심 많은 척 달라붙는 것부터가 고쳐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이다. 결과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기자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문제이거늘 고쳐지지 않는 것이 마냥 이상하기만 하다. 더욱이 기자들의 수능 취재 관행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 <노컷뉴스> 역시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이런 경우는 뭐라 설명해야 하는 지, 참.


D-day. 모두가 하나같이 수험생들의 행운을 기도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좋은 성적을 얻기를 희망하고, 노력의 대가를 빠짐없이 챙겨가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와 고생에 대해서 격려한다. 허나 시험은 경쟁이고, 1~2점에 대학 당락이 결정되는 현실 속에서 이런 주문은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 함정이고, 기만이다. 한국 사회 내에서 입시라는 것은 뼛속깊이 각인되어 있는 고통이 동반되어 있다. 그리고 사실이다. 시험을 보기 전까지 ‘죽음의 트라이앵글’은 수없이 울려대고, 시험을 본 이후 사회는 더욱 빡빡하다. 취업난은 이제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비정규직철폐가’는 이들의 미래이고, 한국 사회의 재앙이다. 그러나 이벤트, 그 당일에는 일단 시험점수가 잘 나올 수 있도록 모두들 희망한다. 그리고 소망을 이야기한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감성적인 위로가 아쉬울 뿐이다.



언론의 무규칙 플레이



바로 그제(15일) 수능 시험을 봤던 대입 수험생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채점 결과에 실망한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 경찰은 조 씨가 아파트 20층 복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조 씨는 그제 수능 시험을 본 삼수생입니다. … 변리사를 꿈꾸며 서울의 한 유명 사립대에 가기 위해 삼수까지 하며 시험을 봤습니다. 하지만, 가채점 결과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자 괴로워했다고 가족들은 전했습니다. 가족들은 이번엔 그냥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하라고 했다면서, 갑작스런 비보에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변리사 꿈꾸던 삼수생, 수능 비관 투신 자살”, 8시뉴스, 11월 17일)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을 전후로 한 수험생의 자살이 이어졌다. 허나 이에 대한 언론보도는 웬일인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와 <오마이뉴스> 정도에서 보도했을 뿐이다. 물론 뉴스로서의 가치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수험생의 자살이 보도되지 않았을 수 있음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늘상 호들갑을 떨던 미디어에 수능 당일, 수능 때문에 생을 달리한 수험생의 이야기가 빠졌다는 것이 말이다.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된 15일 수능 응시를 거부한 고교 3학년생 허그루(18)군이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수능과 입시제도 폐지를 위한 1인 시위를 펼쳤다. 허군은 “오늘 거부는 단지 수능을 거부하는 것뿐 아니라 입시제도에 의한 대학서열화를 반대하고 평준화를 요구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며 “청소년 인권 활동을 하다가 본질적인 문제인 입시와 대학평준화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졸업 후에도 후배들을 위해 계속 노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입시 폐지하라” 수능거부 고3학생 1인시위”, <연합뉴스> 11월 15일)

사진 | cafe.naver.com/youthalltogether


수능이 있던 당일 수능 시험을 거부한 고3 학생이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수능과 입시제도 폐지’를 주장하며 1인 시위를 펼쳤다. 당일 시험을 거부하면서 한국 사회 내 입시제도에 문제를 제기한 경우는 전무하다. 허나 1인 시위를 펼친 학생의 주장은 대부분 단신처리 내지는 수능시험 이모저모로 처리되었다. 물론 보도건수 역시 많지 않았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이명박, 정동영 등 대선 후보자들의 수능 시험장 방문보다 ‘수능 폐지’를 외친 고3 학생의 1인 시위가 어떻게 기사 밸류(value)에서 밀릴 수가 있는 지 의문이다. 당사자가 발언하였다. ‘수능뿐 아니라 입시제도에 의한 대학서열화에 반대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매체는 그이의 발언에 주목하지 않았다.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기자들은 ‘텔미’ 열풍을 일으킨 ‘원더걸스’의 멤버들이 수능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발길에 동행할 뿐이었다.


매체의 노출 빈도의 문제뿐 아니라 기사에서 드러나는 내용 역시도 참으로 성의가 없을 뿐이다. 자살보도를 한 SBS의 경우 단순 스트레이트 형식으로 처리하였고, 1인 시위를 보도한 <연합뉴스>의 경우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1인시위의 경우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수능장 이모저모로 처리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도무지 기자들과 언론의 무규칙 플레이에 당황스럽다. 자극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좇는 방식으로 수능장을 시끄럽게 만들더니, 왜 한국 사회의 입시 제도가 가져오는 병폐에 대해 극적으로 저항하는 이들의 상처는 외면하는 것일까? 그러하니 문제는 늘상 반복되기 마련이고, 해결될 기미를 찾지 못한다. 교육단체는 물론, 청소년들, 그리고 학부모들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교육문제를 지적하며 대안을 내놓지만 목소리는 묻히고, 정책은 공허하게 된다. 거들먹거리는 정책입안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침묵하고, 필요할 때만 들먹이는 매체의 맥없는 비판과 감시의 기능 또한 문제다. 그러나 사회가 작동되는 과정 속에서 기자들의 한계와 언론매체의 기능의 상실 역시도 사회 속에서 큰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득 얼마 전 지상파 방송사에서 일하는 이가 “모 방송국, 그러니까 언론고시를 보고 들어온 이들의 대다수가 외고 출신이다. 강남권은 말할 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혹시 이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이 든다. 수능 시험장에서 벌어지는 다종다양한 감성들에는 동감하지만, 입시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냉담한 엘리트적인 사고방식이 투여된 것은 아닐까. 경쟁 사회 속에서 승리를 거머쥔 이들이 가진 자부심과 사회 인식의 한계라고 단정하는 것이 그다지 위험한 결론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밀려온다.



상상력과 인권을 이야기할 때는 지났다


D-day는 지나갔다. 하지만 또 다른 D-day의 카운터는 벌써부터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시험을 본 이들에게 ‘대학’이라는 문턱을 넘기 위한 다양한 관문이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 당락 여부를 포함하여 서울지역 대학, SKY의 그룹화, 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 등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연말연시가 희비를 가르며 폭풍처럼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3월이 다가오면 새내기를 맞이한 학교는 만연한 봄을 만끽하며 ‘청춘예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입시로 인한 상처와 고통은 잠시 묻어둔 채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D-day는 다시 찾아올 것이고, 우리는 시끌벅적한 시험장의 풍경을 아주 낯익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수능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을 향해 동정과 보호, 연민으로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순간의 고통을 잊기 위한 진통제밖에 되지 못한다. 분명 한국 사회의 교육정책은 심각한 문제에 당면해 있다. 대학 입시 중심과 학벌과 학력 사회의 메커니즘은 굳건하며 이에 대한 도전에 대해서 철옹성 같은 방어를 한다. 단적인 예를 살펴보자. 지난 9월 12일 공청회를 거쳐 입법예고한 ‘차별금지법’(안)에서도 ‘성적지향, 병력, 출신국가, 언어, 범죄전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과 함께 ‘학력’ 역시 누락되었다. ‘학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한국 사회 내에서 ‘차별’이 아니라는 이들의 주장은 여전히도 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 날만 되면 순간적 치유방법만으로 수험생들을 대상화시키는 언론매체의 태도는 여전하고, 변함이 없다.


학습노동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죽음을 선택하거나 고통을 호소한다. 상상력이라는 것조차도 암기하는 것이 현실이며 등급으로 인한 상처는 더욱 커져간다. 경쟁을 넘어 상상력과 인권을 이야기할 때는 벌써 지났다. 그럼에도 변치 않는 기자들의 태도와 언론의 무관심은 아무래도 기자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학력과 학벌에 대한 욕망의 한계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기자들의 수능점수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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