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한국에서의 진보정당, 그 역사적 도전

진보정당과 진보정당운동의 역사

외세의 개입과 억압,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 여성·성적소수자·외국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 과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 전쟁과 핵으로 인한 인권과 인간사회의 파괴 등 한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질곡과 고통을 제거하여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실질적 평등과 지속가능한 발전의 조건이나 상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정당은 그러한 질곡과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선거운동, 총파업, 무장투쟁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조직을 뜻한다.


진보정당이 어떤 과제를 주로 추구하느냐 즉 어떤 성격의 진보정당이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그 시기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질곡이 무엇이냐, 정치적 조건 특히 민주화가 얼마나 진전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에서 자본주의의 모순과 노자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던 19세기말 20세기 초반의 서구에서는 노동당, 사회당, 공산당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사회민주주의적 진보정당이 나타났고,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상태에 놓여 있어 제국주의적 착취가 격심하게 나타나는 제3세계에서는 반제민족해방을 표방하는 민족주의적 진보정당이 등장하였으며, 민주주의가 상당한 발전수준에 도달해 있고 성장 위주의 산업화로 인한 환경파괴나 핵개발에 따른 인류생존의 위협이 심각해진 사회에서는 생태주의나 반전반핵을 표방하는 ‘시민운동적’ 진보정당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각 시기의 가장 심각한 질곡이나 갈등의 성격과 정치적 환경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진보정당이 활동하였다.



1987년 민주화 이전의 진보정당


해방 전에는 일제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여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의 성격을 가진 진보정당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 진보정당들은 주로 농민과 노동자를 조직하여 소작쟁의나 총파업 등을 주도하였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고 전쟁물자와 인원의 동원에 따른 착취가 격심해지자 이들 진보정당 인사들은 국내의 경우 지하로 들어가거나 국외의 경우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해방이 되자 지하활동이나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진보정당 인사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공개적인 합법정당을 결성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대부분의 우익인사들이 자의 또는 타의로 일제에 협력한 반면 좌익인사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일제에 대해서 무장투쟁 또는 총파업 ‘선동’ 등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에 대중들의 진보정당에 대한 신뢰와 지지는 높았고 조직기반도 탄탄했다. 그러나 한반도가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되면서 통일정부의 수립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친일극우세력과 손을 잡고 남한지역에 친미적인 정부를 세우려는 시도를 노골화하였다. 급진적 진보정당인 조선공산당은 총파업과 무장투쟁, 온건한 진보정당인 조선인민당은 우파민족주의세력과 손을 잡고 친일파청산, 토지개혁, 단선단정반대, 외국군철수 등을 요구하는 한편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였다.

진보당의 조봉암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높아지자 이승만 정권은 그를 간첩죄로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불법화시켰다. 사진은 이른바 '진보당 사건'의 재판.

그러나 친미반공정권 수립만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라고 생각한 미국은 군사력과 남한 내 친미반공세력을 동원하여 모든 진보정당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함으로써 진보정당은 한국전쟁 이전에 그 세가 크게 약화되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소멸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친미반공주의 독재체제가 강화되었고, 따라서 공산당과 같은 급진적 진보정당은 남한 사회에서는 아예 발도 붙일 수 없었고, 온건한 진보정당마저도 활동에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유일한 진보정당은 조봉암 등에 의해 1956년 말에 결성되었다가 1958년 초에 불법화되어 해체된 진보당이다. 진보당은 노동자와 농민 등 특정계급·계층을 넘어선 ‘피해대중’ 전체를 대변하려고 했던 온건한 진보정당 즉 사민주의정당으로서 정치와 사회의 영역에서의 ‘평등한 민주주의’(의원내각제, 노동자 경영참가 등), 경제영역에서의 ‘계획적 민주주의’(주요 산업의 국유화, 직접 경작치 않는 토지의 소유 및 소작 금지 등), 외교영역에서의 미국 등 우방국과의 유대강화(우방국의 경제원조 환영 등), 남북관계의 영역에서의 ‘평화통일’을 주요 정강정책으로 내세웠다. 특히 진보당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분단 상황이 대중의 고통을 더욱 심화하고 비민주적 상황을 정당화한다는 인식 하에 ‘평화통일’을 가장 중요한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그러나 진보당이 폭력혁명이나 북한을 옹호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북한에게 전쟁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요구하였고 폭력혁명과 공산당독재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의 대중적 지지(1956년 대선에서 30%)가 높아지자 이승만 정권은 ‘평화통일론’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당대표인 조봉암을 간첩죄로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불법화시켰다.


진보정당이 재건된 것은 4·19정치혁명으로 친미반공을 내세운 이승만 독재정권이 붕괴된 이후였다. 해방정국에서 사민주의적 진보정당이나 민족주의적 진보정당에 몸을 담았던 인사, 조봉암의 진보당활동을 했던 인사 등이 ‘계급독재와 자본독재를 배격한 정치적 민주주의와 의회정치’, ‘계획과 민간자율의 조화에 바탕을 둔 자립경제체제 확립’, ‘자주독립적 통일국가 건설’, ‘민주적 복지사회’ 등을 모토로 하고 농민, 노동자, 근로인텔리, 중소상공업자, 양심적 자본가 등 거의 모든 국민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혁신정당’ 즉 1950년대 진보당과 비슷한 성격의 온건한 진보정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들은 노선 차이도 극복하지 못하고 통합적인 리더십의 부족으로 사회대중당과 사회당으로 크게 양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쿠데타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박정희군부세력에 의해 정당도 해산되었다. 이들 진보정당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쿠데타 직후 또는 그 이후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에 의해 또는 20년 이상 지속된 군사정권의 강도 높은 탄압으로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온건한 진보정당조차 인적 조직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진보정당


이 땅에 진보정당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확장된 합법적 정치공간과 정당·선거정치의 활성화를 적극 활용한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다. 또한 농민이 인구의 대부분(80%내외)을 차지했던 이전과는 달리 이 시기에는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급진전으로 전체 국민 중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어섰고, 학생운동이 진보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에는 학생운동과 더불어 노동운동, 농민운동, 주민운동 등 각종 시민사회운동도 크게 활성화되어 있어 진보정당이 대중적 기반을 확대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20년 이상 단절되었던 진보정당의 재건을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취중에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찬양고무죄’, 주체사상 관련 책자를 소지한 것만으로도 불온서적 소지죄로 투옥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이나 진보정당의 가장 주요한 기반인 노동자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노동법·선거법·정당법 등 반민주악법이 1990년대 말까지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87년 민주항쟁으로 진보정당이 등장할 환경이 조성되었으나 40년 이상 공백상태에 있던 진보정당운동의 재건에 필요한 인적, 조직적,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는 결코 쉽지 않았다.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또한, 1987년 민주화가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보수정치인 간의 타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군부권위주의세력의 인적, 조직적 기반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온존해 있었다.


셋째, 이와 같은 두 가지 조건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20년 내지 40년 이상 공백상태에 있던 진보정당운동의 재건에 필요한 인적, 조직적,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도 단숨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 적합한 진보정당의 노선과 전략 그리고 대중적 기반을 둘러싼 정파 간의 대립과 갈등은 불가피했다. 특히 대외종속성이 강하고 부침도 심했던 한국 경제와 민주주의의 미래가 불확실한 가운데 폭력혁명을 통한 사회주의건설을 주장하는 급진적 진보정당 건설론과 선거를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과 사회주의건설을 주장하는 온건한 진보정당 건설론 간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넷째,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크게 이루어지고 불완전하나마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가 확보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보수’정당(예,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과, 생태주의, 반전반핵, 양성평등 등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예, 경실련, 환경연합, 여성연합 등)이 등장하여 진보정당은 이들과 경쟁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미래와 진보정당의 성격과 노선을 둘러싸고 정파 간의 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반에 소련과 중·동구의 현존사회주의국가들이 급속하게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체제로 전환하게 됨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지향해야할 방향을 상실하여 진보진영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번째 치룬 대선에서 진보인사들이 사분오열되고, 1990년 무렵 추진된 한국노동당과 민중당 건설운동이 실패로 끝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시기에서 진보정당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계기는 1996~97년 겨울의 총파업이었다. 정리해고 법제화 등을 담은 노동법을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로 통과시키자 그 무렵 출범한 민주노총과 개혁적인 지도부가 이끄는 한국노총이 연대하여 한 달여 동안 연인원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정부수립 이후 최대 규모의 총파업을 전개하여 무효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진보세력이 없는 국회에서 재개정된 노동법은 날치기 노동법과 별반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이에 진보정당의 건설과 선거참여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에 힘입어 이전의 민중당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진보정당 창당이 추진되었다. 이들은 총파업 직후인 대선에서는 ‘국민승리21’의 이름으로 참여한 뒤, 여론조성과 참여단체 확보 등 창당 작업을 본격화하여 마침내 2000년 1월에 정식으로 민주노동당을 출범시켰다.

진보정당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97~97년 겨울 총파업이었다. 사진은 민주노총 금속연맹 대의원대회.

민주노동당은 ‘국민소환제, 국민발안제 등 직접민주주의의 구현’, ‘노동자를 비롯한 생산주체의 경영참가 등을 통한 직장과 가정의 민주화’, ‘호혜평등과 자주성에 기초한 대외관계의 실현’, ‘화해와 평화의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건설’, ‘삶에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의 사회화’,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인 여건의 평등한 보장’, ‘인간사회와 생태계의 조화로운 공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철폐’ 등 사회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시민운동적 과제를 혼합한 진보정당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이전의 진보정당과 달리 민주노총, 전농 등 기층대중조직과 제도적으로나 인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지기반이 안정적이다.


게다가 창당을 전후한 시기에 그간 금지되어 있던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허용, 민주노총의 합법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도입 등 제도적 조건과,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관계개선에 따른 반공이념의 약화와 경제대국으로의 성장에 따른 민족자긍심과 자주의식 강화 등 대외적인 조건이 개선됨에 따라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을 통해서 1960년 이후 약 반세기 만에 원내진출을 실현하였다.



사민당은 물론 폭력혁명을 추구하지 않는 한 공산당조차도 합법적인 활동이 허용되는 서유럽이나 남미와는 달리 이 땅에서는 아직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내팽개쳐야 하거나 때로는 목숨까지도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전통적인 진보정당운동이나 시민운동적 진보정당운동을 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물론 지금은 이전보다 여건이 많이 좋아진 편이다. 적어도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폭력혁명을 지향하지 않는 한, 북한정권을 찬양하지 않는 한, 대통령도 될 수 있고 국회의원도 될 수 있다. 하지만 보수정당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에 비하면, 진보정당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은 현존했던 사회주의가 실패로 끝난 뒤 국민들을 쉽게 설득할 대안의 사회모델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는 점과, 국민들의 의식구조 내지 가치관이 보수화되었다는 점이다.


진보정당의 내부사정도 대단히 어렵다. 민주노동당의 예를 보면, 북한과의 연대?협력을 통한 ‘반제민족해방’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정파와 노동계급 등 기층대중에 대한 착취와 그로 인한 고통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정파 간의 노선대립이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직노동자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환경보호나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보호 등 시민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소극적인 것은 물론 비정규직을 포함한 노동자 전체의 이익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의 미래는 이와 같은 대내외적인 도전과 제약을 넘어설 때 비로소 우리 사회를 개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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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태 | 인하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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