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이에요, 당연하지] 스물 한 살 내 친구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습니다!

강요되는 획일화에 목표를 상실한 입시지옥

벌써 여섯 번이나 치렀다. 입시생들과 함께 한 겨울을. 사교육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공교육의 공공성을 지켜내지도 못하면서 입시생들과 학부모들을 피 말리게 하는 그 겨울을 벌써 여섯 번이나 보낸 것이다.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는 일 자체에 대해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학생들을 만나고 가르치는(과연 뭘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동안은 그런 문제들도 싹 잊게 된다. 어쨌든 학생들을 만나는 순간만큼은 단순히 계약관계로 이루어진 교육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만나 서로에게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요즘 젊은 것들은~’으로 시작하는 한숨 섞인 푸념들과 비난 따위로 늘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들에게 욕을 먹어왔다. 기존의 세태에 안주하고 안정을 찾고자 하는 나이든 세대들에게 젊은 세대들의 끊임없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모색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태껏 젊은 세대들의 고민과 노력이 세상에 무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프랑스 68혁명이 그랬고, 4.19나 80년대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이 그랬다. 하지만 그 젊은 세대에 속하는 21C의 대학생들은 갈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고작 20년 전인 80년대 대학생들과 비교해보면 지금의 대학생들은 과연 현재에 대해 고민을 하고는 있는 것일까 회의적인 기분이 들기도 한다. 겨울나기 친구들과 이런 저런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도중, ‘그게 바뀔 수 있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인 거 아니에요?’라는 반문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무기력함과 무심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그들의 잘못 때문일까?



대학 합격 한 달 사이에


얼마 전 올해 대학에 합격한 친구를 만났다. 합격 소식을 들고 온 날, 그 친구는 자신이 선택한 학과가 요즘 전망이 좋은 학과이기는 하지만 그 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전공이어서 합격한 것이 너무 기쁘다고 했다. 그 뒤로 한 달이 지난 지금, 그는 이제 대학에 가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영어학원에서도,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학교 선배들에게서도, 누구를 만나도 학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어떤 곳에 취업할 수 있는지, 무엇을 공부해야 편하게 살 수 있는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나 고민보다는 어떻게 놀아야 할지, 무엇을 공부해서 취업해야 할지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꾸 조급해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고 했다. 자기 앞에 갑자기 펼쳐진 막막한 그 상황 앞에서 나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라고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편한 삶을 위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지만 쳇바퀴 돌듯 지루한 일상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회의 요구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만족해하며 살고 싶어 하는 그 친구가 현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새로운 취미생활을 찾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보였다. 또 다른 한 친구의 경우는 ‘대학생’이라는 자신의 역할보다는 ‘고등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졌지만, 그의 넓은 관심과 자기 가능성에 대한 열정을 채워주기에 대학이라는 공간은 너무도 좁아보였다. 그 친구는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다. 두 친구 모두 1년간의 재수생 생활을 포함해 13년, 이들에게 강요된 그 긴 시간의 대입 준비는 합격통지서 한 장으로 대체되었고, 이제 그들은 남은 평생의 목표를 이제부터 찾아야 하는, 물가에 내던져진 어린아이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이 아닌 것쯤은 알고 있다.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솟구치고 있으며 대기업들은 대학을 취업양성소로 전락시키고 있다. 각종 고시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은 따로 있지만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에 없는, 말 그대로 ‘돈 되는’일만 하는 교육 기업체가 되어버린 대학에서 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최근 이명박 인수위원회에서 발표하고 있는 교육정책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절로 뒷목에 손이 간다. 혈압이 치솟아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특목고를 강화하고 입시를 대학에 자율적으로 맡긴다면서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모순적 발상을 해내는 인수위의 입장에 대한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 겨울나기 친구들의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더욱 무기력해질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씁쓸해진다.



죽은 사회로 가는 지름길


그러나 그들에게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머리가 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이기적이고 영악한 모습만을 가지고 있는 철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공간에서 타인과의 소통과 사회와의 교감, 그리고 자신의 행위가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자발성이나 그들의 다양한 사고는 변화하는 입시제도에 맞춰, 그리고 ‘요즘 젊은 것들’을 걱정하는 어른들의 강요에 밀려 무기력한 객체로 만들어진다. 최근 계속 갱신되고 있는 교육정책이 그들의 다양한 입장들과 생각을 살려준다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교육정책만이 문제는 아니다. 그 교육정책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그대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며 한숨짓는 어른들의 태도는 젊은 세대들의 가능성을 철저히 짓밟는 일인 것이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적은 가능성은 커지기도 전에 버리기를 강요받는 것이다. 학생들이 철저히 배제된 교육공간이 계속된다면 ‘요즘 젊은 것들은~’이라는 수식어는 없어지겠지만 그건 결국 새로운 발전과 가능성 역시도 기대할 수 없는 죽은 사회로 가는 지름길을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 겨울나기 친구들에게 당신의 12년이 결코 무익하지도, 하지만 도움 되지도 않는다는 현실을 같이 뛰어넘기를 제안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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