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미디어세탁소] 2008년 미디어의 대재앙, 그 예고편

예의를 찾아볼 수 없는 미디어

꽤나 유명한 가수의 사생활이 연일 문제다. 풍문과 잡설이 미디어의 공식적 형식을 빌려 위상을 확보하고 그 위상의 창조가 다시 풍문과 잡설을 당당한 사실로 둔갑시키는 ‘사실의 역설’이 어제의 권력이 내일의 권력에게 권한의 전부를 내어주는 2008년 오늘의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보도해야 하는 걸 보도하지 않는 미디어, 보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도하는 탈(脫)미디어적 상황의 미디어는 어쩜 그래서 대재앙을 예고하고 있거나 혹은 예고조차 하지 않는 미혹의 상황일지도 모른다.



광고 앞에 초라해진 예의 없는 것들


1월 23일, 24일자 <한겨레>에는 ‘한겨레·경향 살리기 캠페인’이라는 제목의 의견광고가 실렸다. 전반적인 미디어 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내용이 담긴 언론미디어단체의 광고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겨레·경향 살리기’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광고다. 빤한 주머니 사정에 단체들이 돈을 모아 신문에 광고를 하는 경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머니를 털어 광고를 게재한 이유는 <한겨레>에 삼성광고 중단사태가 장기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특검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한겨레>와 <경향신문>, 그리고 삼성 간의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삼성 비자금에 대한 적극적인 의혹 및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삼성과 삼성 계열사는 보란 듯이 광고 집행을 하지 않고 있다. 근 3개월 가까이다. 삼성은 노골적으로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이유 있는 문제 지적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며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광고를 끊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몇몇 언론단체에서는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대한 광고 탄압을 당장 중지하라고 삼성 본관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삼성의 ‘사적보복’을 비판하였다. 허나 삼성은 꼼짝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향해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는데 광고를 실어봐야 효과가 없다고 판단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이 말을 다시 구성하면 ‘긍정적인 기사가 나오면 광고를 싣겠다’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다. 광고, 즉 돈줄을 끊어버리겠다는 재벌권력의 거들먹거림이다.


자본권력이 광고를 통해 매체를 지배할 수 있는 재정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시급히 마련하지 못한 채 그저 재벌들을 향해 광고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독립 언론으로서의 역할, 진보매체로서의 책임을 이야기하기에도 현재 상황은 안녕하지 못하다. 이미 경험을 했고, 지금도 문제에 직면해 있다. 광고를 미끼로 언론을 유인하는 재벌권력의 오만함이 새롭지는 않기도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눈여겨 볼만하다. 삼성은 노골적으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간단하게 뛰어넘었고, 2007년 <시사저널>에 이은 언론 길들이기로 이후 재벌권력/자본이 매체를 가지고 장난질 칠 수 있는 여지를 100%로 열어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재벌권력은 생명에 생존에 자연에 몹쓸 짓을 저지르고도 고개 한 번 숙이기조차도 힘들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배알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겨레>의 독자들에게는 당연히 해야 하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 ‘자원봉사자관’을 세우자는 예의 없는 것들


삼성중공업은 1월 22일 주요일간지 2면에 사과광고를 실었다. 물론 삼성의 눈 밖에 나버린 <한겨레>를 제외하고 말이다. 서해안 원유유출과 관련하여 근 3개월이 다 되어서야 ‘사과’를 하면서도 그들은 철저하게 그들만을 상황만을 고려하였다. 그 결과 삼성은 그들을 향해 날카로운 펜을 세우고 있는 <한겨레> 독자들에게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허나 광고 수입의 90%를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 신문들은 남의 일로 치부한 채 조용하게 입을 닫았다. 사실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왜냐면 서해 바다에 엄청난 양의 기름이 유출되었다는 뉴스가 속보로 전달된 그 순간부터 몇몇의 주민들이 목숨을 내걸고 서울까지 올라와 혹한에 시위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 미디어의 언론으로써의 비판과 감시의 기능은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개월이 다 되도록 미디어는 서해 바다를 검게 물들여 버린 기름의 양에 충격을 받더니,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칭찬하고, 기름 바다가 되어버린 서해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있는 이들을 동정하였다. 몇몇의 주민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죽음을 넘나들며 주민들의 절규가 강해질 즈음에는 더욱더 사고의 본질을 비껴가기 시작하였다. 사실 기름유출 사건이 발생하고 한참동안 기름 유출 사고가 어떻게 어떤 경위로 이루어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했으며, 도대체 사건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뉴스9’의 경우 사건이 발생한 7일 이후 10일까지 무려 23꼭지의 관련 리포트를 보도하면서 ‘삼성중공업’을 거론하지 않은 채 ‘예인선 업체 관계자’라고만 언급하였다. 도 다르지 않다. ‘뉴스데스크’ 역시도 7일부터 10일까지 기름유출 사건에 대해 23개의 리포트를 처리하였지만, ‘삼성중공업’ 업체명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의 경우는 8일 ‘원인 놓고 서로 네 탓’에서 사건의 당사자인 ‘삼성중공업’의 실명을 밝혔지만, 이후 ‘삼성중공업’ 대신에 ‘예인선’이라 바꾸어 표현했다(<미디어스> 참조). 뉴스에서 교통사고에 대해 보도를 할 때도 사고가 난 차의 생산업체를 밝히는 데 비하면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 사건’에 대해서 관대해도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시기적으로 삼성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감싼다 하더라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와 특검법 등 미디어에서 삼성 계열사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허나 결과는 삼성 계열사 이름이 줄줄이 거론되는 것에 대한 것을 막기 위한 삼성의 노력인지 미디어의 배려인지, 결국 삼성과 미디어가 손을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재앙을 일으킨 당사자인 ‘삼성중공업’이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것은 최소화되었다. 냄새가 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더니 비판의 화살은 ‘정부’에게로 모두 쏠리고 말았다. 정부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의도적인 일방성으로 인해 ‘정부’에게 무게중심이 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건사고의 원인은 점차 축소되고 있었고, 사건의 본질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삼성과 돈독한 연대를 이루고 있는 <중앙일보>의 경우에는 “태안 다녀오셨나요 그럼 노벨상 후보로”라는 기사로 사건을 둘러싼 경위와 문제보다는 자원봉사를 부축이며 사건을 덮어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지난 1월 23일 태안 기름유출 사고피해지역 주민들이 서울에서 ‘조속한 특별법제정과 삼성 무한책임 촉구 대회’를 열었던 그 순간에도 <중앙일보>는 오피니언 면을 통해 ‘자원봉사기념관을 태안에 세우자’는 외부칼럼을 게재하였다.



인수위원회의 횡포를 찬양하는 예의 없는 것들


서해의 ‘사상 최악의 인재’ 기름유출 사고로 인해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 주민들의 생존의 절규가 크나큰 사회적 문제로 한창 부상했을 때 즈음 인수위원회는 1월 17일 새만금 간척지를 동북아 최고의 경제중심도시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하였다. 새만금을 중동의 두바이와 같은 세계적인 투자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이명박 당선자의 공약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새만금을 굳이 생명의 땅이라 호명하지 않아도, 자연 그대로의 삶의 공간을 인위적으로 만들겠다는 죽음의 발상이다. 그것도 두바이와 같은 인공적인 공간으로 말이다. 물막이 공사로 인해 새만금은 이미 죽음의 땅이 되었고,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가 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당선자는 물론 인수위원회는 삶을 죽음으로 만들겠다며 선언하였다. 서해의 기름유출 사고와 무엇이 다를 바 있는 일인가. 사고와 계획의 차이일 뿐이지 결과적으로 드러날 문제는 같다. 이는 또한 대운하와도 물려 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미디어의 태도는 무지의 극치이다. 연관성을 찾지도 못한 채 인수위원회의 입장을 고스란히 전달할 뿐이다. 오히려 인수위원회에서 발표하는 정책방향과 내용에 대해서 선전하기에 급급하다.


이런 와중에 인수위원회의 횡포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사회 전반의 공공성이 뒤흔들리고 있으며 공론의 장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무수한 것들이 인수위원회의 결정으로 판가름 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입장은 지극히 인수위원회의 결정과 발표에 친밀감을 표시하거나 혹은 강 건너 불구경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인수위원회에 대해서 미디어는 검증이나 비판을 하는 것조차 꺼려하고 있다. 선거 전부터 시작된 언론매체의 줄서기의 게임이 연장전으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장전은 꽤나 오래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김빠지는 소리이기는 하지만 우선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이 문화관광부에 언론사 주요 간부들의 성향을 파악하도록 지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허나 언론사의 반발은 생각하지도 못할 수준으로 봉합되고 말았다. 너무도 명백한 ‘언론사찰’이자, 언론 통제를 위한 사전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인 언론인들과 언론사는 무감각하였다. 정작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저 불구경만 할 뿐이니 어찌 인수위원회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서 기대조차 할 수 있겠는가.


인수위원회에서 정부개편에 대한 발표가 있자, 여기저기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나섰다. 형식적인 절차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정권교체의 흥분을 감추지 못한 막가파식 인수위원회의 권력 휘두르기가 절정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의 태도는 시종일관 한참 어이가 없다. <국민일보>는 16일자 사설에서 “정부조직 개편안이 다소 미흡하고 못마땅하더라도 수용하는 대승적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한국일보>도 “우리는 정부조직 축소를 위한 이 당선인의 흔들림 없는 의지를 반긴다”며 반색하였다(<미디어오늘> 참고). 인수위원회의 정부개편안이 발표되기도 전이다. 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살펴보면 경제부처의 과대권력화와 공권력을 강화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회 공공성은 주변부로 밀렸으며, 국가기구와 독립적인 행보를 취해야 하는 기구들의 대거 대통령 직속 기구로의 개편되는 등 논란의 여지는 물론 문제점들이 가득가득하다. 그러나 정부조직 개편안 발표 이후에도 미디어의 태도는 시종일관 인수위원회 편에 선 단순보도에 그치고 있다.


언론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아닌 모시고 싶은 대상이 되어버린 인수위원회. 빳빳하게 목을 세운 인수위원회의 오만함으로 인해 한국 사회 내의 공공의 가치와 인권의 가치는 깡그리 상실된 채 또 다시 차디찬 길거리의 바닥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기구로의 정부 조직 개편안으로 인해 인권활동가들을 비롯해 인권의 의미를 살리기 위한 이들의 혹한의 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류 일간지, 지상파방송이라고 하는 곳에서의 반응은 그저 냉담하다. 해석도 평가도 못하고 그저 발표하는 대로 받아쓰기만 한다면 그것이 무슨 언론이고 그들이 무슨 기자라 할 수 있을까. 허나 애석하게도 공공의 가치와 인권의 가치, 주변부의 삶은 철저하게 봉쇄당하고 있다.

사진 | 민언련

사회를 뒤흔들 ‘대운하’는 어떠한가. 지난 겨울동안 대운하에 대한 언론의 태도는 공공연한 눈치 보기에 그쳤다. , , 는 ‘대운하’에 대해 묵인하는 방식으로 일단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정책안에 대한 분석과 해석, 그리고 검증보다는 일단 정황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전국 일간지 혹은 같은 매체에서도 대운하에 대한 정책적 검증보다는 지역 사회에서 열리고 있는 대운하 토론회, 세미나 등을 중계식으로 보도할 뿐이다. 한 술 더 떠서 이미 지역 언론매체들은 대운하에 대해 ‘홍보’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참언론대구시민연대 허미옥 사무국장은 <대구 MBC>는 지난 18일 “포커스 M ‘대운하와 지역개발’”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내용의 대부분을 경부운하에 대한 소개와 홍보자료로 채우고 있다며 <미디어오늘>을 통해 밝혔다. 덧붙여 <매일신문> ‘한반도 대운하 해외에서 배운다’를 통해, <영남일보>는 이명박 당선자 자문그룹인 한반도대운하연구소 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한반도 대운하와 낙동강’ 시리즈를 보도하면서 홍보성 정보만 보도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비단 대구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예의 없는 것들을 향한 분노의 예고편


쉽지 않은 일들이다. 묵직하고 신중해야 하는 사건들과 내용들이 사회를 뒤흔들고 있지만 때로는 은폐되고, 때로는 찬양된다. 허나 이는 대재앙의 예고편에 불과하다. 미디어의 기능에서 비판과 감시의 기능이 점점 더 축소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보다 정확하게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괘를 같이 하거나 혹은 이해집단으로, 미디어 재벌로써의 기득권을 쟁취하고자 한다. 권력의 중심에서 판단하고, 이를 훼손하는 수많은 삶의 가치들을 왜곡하기 위한 시도와 노력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2008년 1월 얼어붙은 길바닥에 몸을 맡긴 채 인권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이들의 분노가, 하루아침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서해안 주민들의 분노가 부당하고 오만한 권력으로 사회를 재편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그 분노는 신문과 TV에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는 예고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미디어 그 당사자들도 읽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각오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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