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운동 길찾기]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진보적 인권운동의 길을 향해

비상식 인권론 ⑨ ⑩

<연재를 마치며>
모두 10회를 기획하여 출발한 이 연재를 이번호로 마치려 한다. <사람>을 재창간하려는 이 마당에 이 연재를 새로 태어나는 <사람>에까지 연장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연재가 예정했던 끝을 향해 가고 있으므로 여기서 압축적으로 얘기를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원래 두 번에 걸쳐서 실으려 했던 ‘인권의 국제적 보호를 믿을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와 ‘인권운동은 인간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합쳐서 이 연재를 마무리한다.



국제인권레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권운동만큼 국제화되어 있는 운동은 없을 듯하다. 유엔에는 사무총장과는 별도로 인권고등판무관을 두고 있고, 인권이사회가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종 조약마다 위원회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국제전범재판소나 국제형사재판소도 있고,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세계인권선언이 있고, 각국이 당사국으로 참여하는 각종 인권조약들이 널려 있다. 또한 유엔은 매년 총회에서 결의안이나 선언의 형태로 인권에 관련된 규범들을 쏟아내고 있다. 대륙들로 넘어가서 보더라도 유럽, 미주, 아프리카 등에서는 별도의 인권조약과 선언들, 기구들을 설치하고 있다. 아시아에만 아시아 인권선언이나 조약 또는 기구가 없을 뿐이다.


인권단체들도 국제적인 연대망을 갖고 움직인다. 국제앰네스티나 휴먼라이츠워치와 같은 국제단체들도 있지만, 세계에는 다양한 내용과 형태의 수많은 인권단체들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들 인권단체들은 유엔과 협의자격을 갖추었든 아니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유엔과 국제인권레짐에 영향을 미치면서 국제적인 인권기준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 물론 국가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공동의 행동도 조직하고, 국가들에 대한 감시 리포트를 작성하기도 한다. 유엔의 인권관련 위원회들은 이들 단체들의 보고서를 정부의 보고서만큼이나 비중 있게 취급한다. 종종 국가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통계와 보고는 제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제인권레짐(regime)이란 국제관계의 인권 영역에서 행위자들의 기대치가 수렴되는 명시적이고 암묵적인 여러 원칙, 국제적 규범들, 의사결정 절차 등을 말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인권레짐의 발전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누구도 이런 국제인권레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권이 갖는 도덕적 힘을 부인할 수 없듯이, 각종 인권조약이나 인권기구들의 활동,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의 활동은 국가나 인권행위자들에게 유형, 무형의 압력으로 실재하는 힘이 된다.


최근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소속기구로 개편해야 한다는 안을 내놓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이 항의하는 편지를 내는 등 국제사회의 압력이 인수위에 가해지고 있다. 인권활동가들은 이런 국제적인 항의에 힘입어서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대통령 소속 기구화 반대 노상 농성을 진행했다. 이렇게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국제사회의 감시망에 걸리고, 국제연대에 의해서 국내 사안은 국제적인 사안으로 되는 일이 인권에서는 종종 일어난다. 인권운동은 이런 국제인권레짐을 적극적으로 운동의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부메랑효과’와 국제연대


이제 어떤 인권사안도 국제적인 인권감시망을 피해갈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아직도 국가주권의 영역으로 숨으려고 하지만, 이미 세계에서 인권문제는 단순히 주권을 강조하는 것으로 용납되지 않는 상황을 맞은 지 오래다. 이런 근거로 해서 세계의 수많은 인권 NGO들은 자신들의 국내의 인권문제들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도 감시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한 노력도 동시에 진행한다.


물론 NGO들이 모두 긍정적인 활동만 하는 것은 아니다. NGO들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령 미국의 프리덤하우스와 같은 단체나 NED와 같은 단체들은 말이 NGO이지 사실은 미국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곳의 운영자금도 미 CIA와 같은 곳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며, CIA 국장을 역임한 사람들이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데, 어떻게 NGO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이제 국가들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인 목적으로 인권 NGO를 육성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언론들은 이와 같은 NGO의 배경에는 관심도 없이 프리덤하우스와 같은 곳에서 발표하는 인권지표 상의 국가순위를 그대로 보도하기 바쁘다.


그렇지만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한 1,300개의 단체들, 1995년 북경 여성대회에 참가한 3천 개의 단체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전문영역을 갖고 인권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인종학살문제에서부터 고문, 경제·사회적인 인권문제에까지 인권 NGO들의 활동은 무척이나 활발하다. 인권단체들의 국제적인 활동은 국제적인 압력으로 전환되고, 그런 압력으로 국가를 압박하게 되며, 국내에서도 인권단체들의 입지를 강화하게 된다. 결국은 멀리 돌아서 오는 것이기는 해도 부메랑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이를 겨냥하여 국제연대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토마스 리세(Thomas Risse)와 시킹크(Sikkink)는 이 부메랑 효과를 이론화하였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국가는 먼저, 인권침해의 현실이 외부에 나가지 못하도록 탄압하게 되며, 다음으로는 국제사회의 압력에 대해서 부인으로 일관하거나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하면서 주권을 내세운다. 다음으로는 표적이 된 국가가 전술적인 양보를 하는 단계로 국내의 단체들과 대화를 하거나 아니면 매수하려는 단계이다. 다음 단계는 표적이 된 국가의 정부가 국제적인 기준을 수용하는 단계다. 인권조약들을 비준하고, 조약이 정하는 규칙들을 헌법이나 법률로 제도화한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의 인권침해가 당장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단계는 “국제 인권기준이 관행으로 굳고, 필요한 경우에는 법의 지배(rule of law)를 통해 집행되기도 한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국제인권기준은 국가 안으로 들어와 안착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대로 되지 않는다. 국제적인 압력에 당장은 정부가 양보를 했다고 해도 언제 다시 탄압국면을 조성하면서 국제인권레짐을 무시할 수도 있다. 또 미국 같은 나라들의 정부는 국제인권레짐에 양보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세운 기준을 국제사회에 강요하려고 한다. 심지어 이라크의 침공의 명분은 이라크 민중들의 인권과 해방이었지 않은가. 이런 강대국의 횡포 앞에서 국제인권레짐은 종종 무기력하기만 한 것처럼 보인다.



지구화 시대의 국제연대


현재 발전해온 국제인권레짐도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에서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 사실이다. 세계 차원의 인권의 개선과 발전을 위해서 유엔의 한계는 한층 분명해지는 것 같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인권레짐의 외부에서 인권침해는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국가들은 국제인권조약을 비준하고, 정기적인 보고서를 제출하여 심의를 받는다. 아마도 국가들은 국제적인 비난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국가들은 보고서를 심사받을 때와는 달리 국내에 돌아와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입안하고 추진한다. 이때 인권단체들이 지적과 항의는 종종 묵살되기 쉽다.


더욱이 국제인권레짐은 대체로 국가에 대한 감시와 규제체제를 발전시켜왔지만, 요즘의 초국적자본의 행태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논리와 체제는 적극적으로 개발해오지 못했다. 국가의 영역을 벗어나거나 국가를 강제하는 초국적 자본의 활동을 제어하지 못한다고 하면 국제적으로 벌어지는 인권침해의 근원은 해결하지 못한 채 현상만 갖고 문제 삼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초국적 자본들은 이런 국제인권레짐이나 국가를 비웃으면서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거나 장악해 들어간다. 또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서도 보듯이 미국은 이미 유엔의 인권레짐을 무시한 채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전쟁을 자유롭게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힘없는 국가들의 인권침해만이 유엔의 무대에 오르고, 권고를 받게 되는 상황이 되풀이되면서 국제인권레짐의 허약함이 드러난다. 인권단체들의 국제적인 연대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외교적 수단으로만 국제인권레짐을 활용하려는 국가들을 국제인권레짐의 규범과 기구들의 통제 속에 잡아놓을 방법은 딱히 없다.


그래서 가장 국제연대적인 활동방식을 발전시켜온 인권운동은 당면한 이런 현실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유엔 밖에서 인권단체들이 국제연대를 통해 힘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라크 전쟁 시기의 인간방패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와 고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운동, 국제적인 무기거래 감시운동과 같은 운동이 실질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떤 국제연대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국제사회에서 축적하고 발전되어온 규범들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제사회의 지적에 대해서 변명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국가들을 압박하는 수단 정도로 약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국제인권레짐은 여전히 작동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국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국제적인 문제일수록 유엔을 활용하면서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연대는 더욱 절실하다. 이런 국제연대를 통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하는 일 또한 인권운동의 임무로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한 때다. 특히 국내의 인권운동은 필요한 때에 국제적인 지원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다른 나라들의 상황에는 무심하거나 힘을 보태려 하지 않는 경향부터 극복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인권운동은 진보운동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9개의 주제에 대해서 나름으로 필자의 얘기를 해보려고 했다. 인권운동에 대해서 기존의 자유주의적 관점, 일반화된 관점을 넘어서 생각해볼 거리들을 같이 고민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연재가 인권운동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필자의 공부와 고민의 짧고, 옅은 점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아서 지난 연재들을 돌아보기가 부끄럽다. 어쨌건 지금까지의 연재를 마무리해야 할 때다.


인권운동은 위기국면에 처해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총체적인 인권에 대한 공격에 인권운동의 대응력은 너무 허약하다. 지금까지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쌓아온 성과들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되돌려질 판이다. 더욱이 FTA체제가 공고화와 함께 보수적이고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정권인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인권운동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국제적으로 기여한 바는 크지 않지만, 국내에서 인권운동은 30여 년의 전통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남겼다. 인신구속절차를 개선하고, 사회권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고, 소수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활동을 해왔고, 이런 모든 결과들로 인권이란 가치에 우리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게 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성과들이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문제는 단순히 국가인권위원회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국가권력 하에서 국가권력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인권으로 그 지위를 전락시키느냐 아니면 지금보다 더 단단하게 인권의 가치를 높이느냐 하는 첫 싸움인 것이다. 그러기에 국가인권위원회 투쟁은 중요하다.


이런 때 국제적인 인권기준을 활용하는 것에 만족할 수만은 없다. 근본적인 문제까지 인권운동이 파고들어가서 사회의 진보운동으로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잡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경쟁과 효율의 체계로 내몬다. 그곳에서 소수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은 인권보장체계로부터 배제되고, 심지어는 사회적인 적으로 증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법의 지배가 당연시되면서도 법에 의한 인권의 침해가 정당화되는 시대를 맞는 때에 여전히 입법운동과 합법운동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을 수는 없다. 절대화되고 있는 사유재산보장체제, 경쟁과 개발의 체계를 넘어서 대안적 세계를 고민하는 진보운동의 일원으로 인권운동은 나아가야 한다. 그런 방향을 그리면서 사회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동하고 기여하는 인권운동으로 거듭날 것을 정세도, 지금의 국내외 상황도 요구한다.


이런 진보운동의 길이 하루아침에 열리지는 않겠지만, 운동의 전망은 운동하는 모든 이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권운동이 진보운동임을 자각하는 이들로부터, 인권보장체계로부터 배제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인권의 주체로 세우는 것에서부터 진보적인 인권운동의 길을 찾아가자.
그런 길을 찾기 위한 나름의 고민을 풀어보자고 시작했던 이 연재를 진보적 인권운동의 길을 같이 찾자는 말을 다시 하면서 아쉬움 속에서 끝낸다. 한계 많은 문제의식을 거칠게 풀어냈지만, 이후 이런 고민들이 인권운동을 하는 이들 속에서 함께 토론되기를 바랄 뿐이다. (끝)


박래군 |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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