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피해자의 경험이 국가형벌권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명랑’에게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저와 명랑 님이 어떤 생각을 달리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씀, 하지만 솔직하게 활동의 고민을 나누고 싶다는 말씀에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선뜻 답장을 드리기 어려운 제 마음도 들여다보게 되었고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수많은 촛불에 대한 반가움과 함께 얼마 전 광화문에서 보았던 한 광경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군복을 입은 예비군들이 2열종대로 시위대를 지나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을 막는다며, “위험하니 여자들은 뒤로 빠지십시오.”라고 말했던 순간이었지요. “예비군들에게 보호받기 위해 촛불 들고 나온 건 아니다.”라는 날카로운 목소리도 들렸었고요. 그 때 제가 본 것은 국민주권 수호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촛불을 드는 거대한 집단 안의 차이였습니다. 국가의 일방적 정책 추진에 반대하는 시민의 다양한 목소리가 가부장성을 중심으로 구획되는 방식을 보면서, ‘국민’의 성별을 다시 질문하였지요. 아동 성폭력을 주제로 나누는 이번 서신 역시, 명랑 님의 ‘인권’과 제가 생각하는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의 내용, 그 차이가 기반을 두는 서로의 정치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도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현 정부의 경찰국가화 경향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반성폭력운동의 지향에 함께하시는 명랑 님과 어떤 정치적 차이가 있는지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명랑 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바로 그 차이에 대한 성실한 고민의 궤적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확인해야만 우리가 이번 기회에 함께 이야기한 내용이 성과로 정리될 수 있을 테니까요. 지난 4월 말 우리가 함께 참여한 회의 자리에서 저는 ‘아동 성폭력 근절을 위한 구체적 대안’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했었습니다. 성폭력 법 정책이 실제 성폭력 피해자에게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일상의 활동에서 종종 접하는 저의 활동에 기반을 둔 기대였지요.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이런 논의 기회를 통해 국가 형벌권 강화 저지를 위한 여러 단체의 ‘하나 된’ 주장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던 듯했어요. 기자회견문을 만들고 의견서를 쓰면서도 문구의 수정과 글의 제목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 그것은 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상황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에 대한, 소위 현재에 대한 ‘정세 판단’이 달랐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성폭력 근절 대책의 구체화를 고민하는 것이 활동의 한 영역인 저로서는 성폭력과 관련한 법정책이 우리사회의 성별 규범과 강간 문화를 실제적으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을 지향하는 활동을 합니다. 정부의 성폭력 관련 대책에 대한 저의 대응 역시 이러한 지향을 갖지요. 성폭력 사건으로 온 나라가 분노하고 있었던 당시에 대한 저의 정세 판단은 ‘성폭력을 양산하는 강간 문화와 성별 이중 규범을 온존시키는 가부장적 국가의 정책 생산’이었습니다. 하지만 국가 형벌권 강화 경향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또 다른 주장은 당시에 대한 정세 판단을 ‘아동 성폭력을 계기로 강화되는 국가 형벌권’, ‘시민사회영역에 대한 국가의 탄압’으로 정리한다고 느껴졌습니다. 각 단체가 이슈를 해석하는 프레임이 다르다는, 단체의 활동 역사에서 비롯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비록 우리는 각자가 다른 프레임을 갖고 있었지만 우리가 갖는 모든 정보와 자원을 총동원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런 작업을 함께 하기 어려워졌던 이유는 명랑 님이 활동하고 있는 ‘재소자 인권’과 저의 활동에서 이야기하는 ‘피해자 인권’이 국가와의 관계 설정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형제 폐지’와 ‘재소자 인권’은 개인의 정보를 독점/통제하여 통치권을 강화하는 경찰국가로부터 ‘통치되지 않을 권리’입니다. 국가 앞에 개인들의 차이보다는 ‘국가와 개인’의 적대에서 개인들의 동질감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고요. 반면, 여성운동에서 성폭력을 범죄화해왔던 과정은 국가 앞에 선 개인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인권이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죠. 성폭력을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로 정의한 성폭력특별법이 1994년에 제정되었으니 성폭력이 범죄로 여겨진 기간은 ‘성폭력이 범죄가 아니었던 시간’의 역사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그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의 판단기준은 여전히 ‘성폭력은 피해자가 유발하는 것이다’, ‘성폭력은 합의만 하면 되는 것으로 유사 성관계이다.’라는 해석을 반복하고 있죠.


따라서 여전히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중요하며, 이 처벌 가능성을 높이는 데에 매우 중요한 것은 ‘특수한 권리’로 이야기되는 ‘성폭력 피해자의 경험’을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성편향적이고 가해자에게 온정적인 사법부의 판단을 변화시키기 위해 ‘대법원 판례 바꾸기’와 같은 사업을 진행하기도 하며,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와 경험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성폭력 피해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열기도 합니다. 만일 제가 국가 권력 자체에 대해 회의적 입장으로 일관한다면, 혹은 국가 ‘형벌권’의 대상인 ‘국민’을 동질적인 ‘피억압 집단’으로 본다면, 사법부에게 ‘가해자 처벌 가능성 확보’를 요구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국가 형벌권’의 행사를 주장하는 것은 가부장적 규범에 도전하는 일이며, 피해자의 경험을 국가의 ‘형벌권’에 반영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저는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 질문은 ‘그렇다면 당신은 국가 형벌권 강화에 찬성하는 것이냐?’입니다. 이는 곧 ‘여성단체로서 여론의 뭇매를 맞지 않으려고 주장을 숨기는 비겁한 태도는 아니냐’라는 힐난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에 대해 꽤 오랜 논쟁의 가운데에 있었던 성폭력 가해자 신상공개제도에 대한 쟁점을 짚어볼까 합니다.


성폭력은 드물게도 피해 사실을 빌미로 삼아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여 또 다른 가해를 행할 수 있는 범죄라고들 합니다. 현재 법적으로 성폭력이 범죄이긴 하지만, 이런 현실에서 성폭력은 사실 ‘범죄’가 아닌 것이죠.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도 ‘여자가 성폭력 당한 게 알려지면 좋을 거 하나 없다, 시집도 못가고 평생을 불행하게 살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는 지속됩니다. 신상공개라는 쟁점이 부각되었을 때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의 내용은 이런 맥락에서 고민스럽습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의 피해에 대해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 ‘신상공개 제도’라는 것이 피해자의 얼굴이 아니라 가해자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의 긍정적 의미는 없을지, 그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성폭력 가해자들은 ‘다른 남자들도 다 하는 건데, 재수 없게 내가 걸린 것이다.’라고 생각하지요. 강간을 격렬한 성관계로 이해하고 있는 가해자들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통제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서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느끼게 하는 사회적 계기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신상공개 제도가 이러한 계기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를 위해서 신상공개 제도의 운영에 적극 개입해야할 필요는 없는지에 대한 고민이 큰 화두였습니다.

하지만 신상공개를 ‘국가형벌권 강화’로만 읽으시는 분들과 저는 ‘반성폭력 운동’의 지향을 나누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신상공개는 수많은 ‘○○양 비디오’ 시리즈를 비롯하여 피해 공개를 빌미로 피해자를 협박해온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그리고 성폭력 피해로 인해 스스로를 평생 ‘죄인’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있어 ‘부끄러워야할 사람은 가해자이다.’라는 반성폭력운동의 오랜 구호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의 또 다른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한 운동의 내용과 구호, 방식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인권은 서로 배치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배치되는 것처럼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저는 이에 대해 명랑 님과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성폭력 가해자의 신상 공개와 같은 ‘(피의자) 인권 침해’를 ‘성폭력 가해자는 버젓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피해자는 오히려 숨게 되는’ 성별 권력 구조에서 고민되는 이런 맥락에 대해서 말이죠. 이런 고민을 하며 국가 형벌권 강화라는 단일한 입장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국가형벌권 강화에 맞서 함께 싸우기를 거부하는 여성 단체’로 평가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고민의 긴장을 놓아버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이 고민이 가부장적 성문화를 변화시키는 성문화운동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고민을 함께 풀어갈 소통과 연대의 장이 확장되길 바랍니다.


사회운동단체로서 경찰국가화되어가는 경향에 대한 우려 역시 당연히 갖고 있습니다. 다만,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 확보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 마련’에 있어 ‘국가 형벌권 강화 반대’가 반성폭력운동의 목마른 지점의 출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반성폭력운동의 목마른 지점’에 대해 명랑 님께서 어느 정도의 간절함과 열정을 갖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그 열정에 근거한 반성폭력 대책을 만들기 위한 공간이, 모임이, 그에 대한 공부가 너무 필요합니다.


자, 그렇다면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을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대책’을 이야기하려면 구체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누구에게 일어나는 범죄인지에 따라 그에 대한 대책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불거진 아동 성폭력의 경우 빈곤 아동에 대한 사회적 방치가 피해의 큰 원인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빈곤 아동에 대한 사회복지적 정책을 수립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그 정책 집행을 위한 역할을 다하도록 강제하는 것, 그를 위한 장기적 모니터링과 시민사회단체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민들 스스로가 ‘이 문제 해결에 사회적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임을 인지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요. 명랑 님이 말씀하신 ‘우리 사회의 문화를 바꾸는 일’의 시작은 그것이 무엇이든 아주 구체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동 성폭력과 같이 ‘아동의 사회안전망’에 대한 대단히 긴밀한 정책 제언을 위해 필요한 내용은 그에 맞게 개발, 생산되어야 하겠지요. 저는 여성운동가로서, 반성폭력운동을 하는 활동가로서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이 네트워크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를 차근차근 밟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연대의 모습과 내용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저로서는 아동성폭력을 계기로 만났던 이번 자리에서도 연대를 위한 필요조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대는 함께 결합할 공동의 이슈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 운동의 쟁점을 알게 된다는 것은 곧 다른 세상을 만나는 일이지요. 어떤 의미에서 연대는 다른 세상이 나에게로 들어와 나를 완전히 뒤흔들고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의 변화가능성을 늘 염두에 둔 연대라는 것에 대해 저도, 명랑 님도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키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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